102화
끼익.
짙게 선팅된 차가 협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남자가 마중 나온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서 오십시오. 박윤성 마스터님.”
“…….”
박윤성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비공식 방문이기 때문에 기자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왔지만, 아무래도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협회 주변에는 쥐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철저하게 인원을 통제하는 모양이었다.
속으로 혀를 찬 박윤성이 협회 사람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연승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상현은?”
“아직 알아보는 중입니다.”
“오래 걸리는군.”
티르 길드의 마스터, 진상현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가 무스펠헤임 던전 공략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도 박윤성은 이제야 알았다. 한심한 일이었다.
입술을 깨문 박윤성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이미 공대는 한창 던전 공략 중이고, 뒤늦게 강유현이 쫓아갔으니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왜인지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라이수. 그자가 개입한 게 분명했다. 진상현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어쩌면 그가 손을 썼기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협회가 이를 모르고 있었을 리 없었다. 회색빛을 띠는 박윤성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죠.”
작은 회의실 안에 박윤성과 연승원을 남겨 두고 무뚝뚝한 인상의 협회 소속 안내인이 나갔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뽑는 건지, 협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형처럼 표정이라곤 없었다. 말투도 딱딱해서 사람이 아닌 기계를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박윤성은 작게 한숨을 쉬며 목을 죄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게다가 협회 안에만 오면 묘하게 숨 쉬는 게 불편했다. 답답한 공기가 피부를 찔렀다.
달칵.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뒤,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짙은 갈색의 정장을 입은 여자가 혼자서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눈이 박윤성에게 향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박윤성 마스터님.”
“…….”
한국 능력자 협회 서울 지부 소속, 나예림 본부장. 예상했던 인물이었다. 박윤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본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한 나예림이 박윤성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깔끔한 태도로 마주 선 나예림이 고개를 까닥이자, 두 사람은 동시에 의자에 앉았다. 심플한 모양의 철제 의자가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협회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떼는 나예림을 보며 박윤성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협회가 이렇게 나오는 것도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박윤성은 부글거리는 속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그리고 나예림을 향해 물었다.
“진상현, 어디 있습니까?”
“…….”
직설적인 물음에 나예림이 조용히 박윤성을 바라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 보며 박윤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티르 길드의 마스터님을 왜 협회에 오셔서 찾으시는지 모르겠군요.”
“……본부장님.”
“죄송하지만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칼같이 말하고 입을 다무는 나예림을 보며 박윤성이 이를 악물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기분은 더러웠다. 박윤성이 얼굴을 찌푸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시겠죠.”
“…….”
“한이진 능력자의 동생, 한도결 군이 S급으로 각성했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
나예림의 딱딱한 얼굴에 작게 균열이 일어났다. 그녀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박윤성을 응시했다.
“그가 정신계 스킬 능력자라는 것도 알고 계실 테고.”
“그건…….”
“이건 모르시겠지만, 주 능력이 모두 정신계입니다. 한도결 군.”
“…….”
“당신들이 하는 거짓말은 얼마든지 간파할 수 있다는 뜻이지. 그동안 협회가 감춰 왔던 더러운 치부도 모두.”
“…….”
그동안 한국에는 고등급의 정신계 스킬을 가진 능력자가 부족했었다. 하지만 한도결이 S급 능력자로 각성하면서 판도가 달라졌다.
물론 아직 나이가 어린 데다 훈련이 부족한 한도결을 곧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협회가 모르는 일이었다. 박윤성은 그저 느긋한 태도로 미소 짓기만 했다.
“후…….”
그제야 미세하게 찌푸린 얼굴로 나예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책상 위로 시선을 떨어트린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한 표정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티르 길드 마스터님이 어디 있는지는 정말 모릅니다.”
“어디 있는지‘는’?”
“……네.”
미묘한 어감에 힘을 주며 따라 말하자, 나예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일 겁니다.”
“…….”
박윤성의 간파 스킬은 애석하게도 A급이었다. 그래서 같은 S급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나예림의 말을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도결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는 나예림이 섣불리 거짓을 입에 담지는 않을 것이다.
“협회는 대체 언제까지 그자의 행위를 묵인할 생각입니까?”
“…….”
“한이진 능력자가 그자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말 모르는 겁니까?”
서늘한 물음에 나예림은 입을 다물었다. 박윤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협회는 항상 그랬다. 대체 무슨 약점이 잡힌 건지, 라우페이 길드의 패악을 언제나 묵인해 왔다. 정부를 대신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기관이 이런 태도를 보이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속으로 혀를 찬 박윤성이 대답을 바란다는 듯 나예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나예림의 시선이 별안간 창밖을 향했다.
“노른 길드에서 다음 예언이 나왔습니다.”
“……네?”
뜬금없는 동문서답. 나예림의 성격에 맞지 않는 화법이었다. 박윤성은 저도 모르게 의아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아직 다른 길드에게는 알리지 않은 사항입니다.”
“……설마 노른 길드가 이번에도 한국만 콕 집어 예언을 한 겁니까?”
“…….”
노른 길드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예언 스킬을 가진 능력자가 있었다. 나이도, 성별도 알려지지 않은 그 능력자의 예언 스킬로 세상은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정체도 모르는 능력자의 말을 박윤성조차 신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노른 길드의 예언은 한국에만 집중되었다. 가뜩이나 이 작은 나라에 랭커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는 걸 세계 언론이 주시하고 있는데,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덕분에 한국의 길드들이 더욱 승승장구할 수 있긴 했지만 말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예림이 박윤성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태초의 던전’이 열릴 것이라 했습니다.”
“……!”
태초의 던전, 긴눙가가프. 예언자가 꾸준히 언급한 시작과 끝의 던전이었다. 그 던전이 언제, 어디서 열릴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하필 한국에서 그 던전이 열린다니. 박윤성이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입니까?”
“예언자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요.”
“…….”
“곧 긴눙가가프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전 세계의 랭커들이 한국에 모일 겁니다.”
예언자는 등급 이상 현상이 잠잠해질 무렵, 태초의 던전이 열려 인류를 시험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던전이 열리는 정확한 시기까지는 예언자도 모른다는 것이다.
등급 이상 현상을 빨리 해결하지 못하면 던전 브레이크 현상이 생겨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하지만 등급 이상 현상이 끝나면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긴눙가가프 던전이 열린다. 등급 이상 현상을 늦출 수도, 그렇다고 빠르게 정리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한국 정부는 연합의 지원을 받아들일 예정입니다.”
“……!”
예언을 두고 연일 회의가 이어졌지만, 결국엔 긴눙가가프 던전의 출현을 앞당기자는 결론이 나왔다. 아직은 등급 판정이 불가한 미지의 던전이지만, 예언자의 말로는 클리어하지 못하면 엄청난 재앙이 터진다고 했다. 그에 각국은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그 무대가 되는 한국은 순식간에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계에서 유일한 SS급의 능력자와 S급 보조 스킬 능력자가 주축이 될 수밖에 없겠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
나예림의 차분한 눈이 박윤성을 향했다.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갈증에 박윤성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미지의 것을 그 안에 품은 듯, 나예림의 눈은 무저갱처럼 끝도 없어 보였다.
“지금의 그들이 과연 태초의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까요?”
“그게 무슨…….”
나직하게 묻는 말에 박윤성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소름이 돋는 가정에 박윤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들 설마…….”
박윤성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믿기지 않는단 얼굴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희미한 확신을 품고 있었다. 박윤성의 목소리가 작은 회의실 안을 울렸다.
“라우페이 길드를 이용해 한이진 능력자의 스킬을 증폭시킬 생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