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57)화 (57/228)
  • 57화

    “……한이진 능력자가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어…….”

    “다 민폐 짓을 하며 구애를 하는 동물들이 문제죠.”

    “……?”

    선율이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민폐 짓은 하나씩 배식받아야 할 걸 멋대로 두 개나 가져온 걸 말하는 것 같은데, 구애하는 동물들이라니?

    이상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서 있다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구슬을 발견했다. 나에게서 받은 닭 날개 볶음밥을 양손에 들고 있는 구슬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 그럼 구슬 능력자에게 준 건…….”

    “…….”

    내 말에 선율이의 시선이 구슬에게 옮겨 갔다. 선율이의 시선을 받은 구슬은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그건 그냥 구슬 능력자가 드세요.”

    “네? 그래도 되나요?”

    “성장기니까 많이 먹어야죠.”

    “…….”

    나와 비슷한 말을 한 선율이가 무뚝뚝하게 몸을 돌렸다. 그녀가 멀어지려고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구슬이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꾸벅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부길마님!”

    “…….”

    아무 말 없이 구슬을 흘끗 본 선율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무뚝뚝한 그녀도 나름대로 구슬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저, 저는 다른 힐러분들과 먹을게요.”

    “잘 먹어요. 구슬 능력자.”

    “감사합니다. 한이진 능력자님.”

    나에게도 고개를 꾸벅 숙인 구슬이 양손에 닭 날개 볶음밥을 들고 총총거리며 멀어졌다. 그녀의 키만 한 스태프가 등에 매달려 달랑달랑 흔들렸다. 한숨을 쉰 내가 몸을 돌렸다.

    “야, 너희들.”

    “…….”

    “뭐 하는 거야. 왜 또 민폐 짓이나 하고 그래?”

    “…….”

    놈들은 내 물음에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내 발치에 엎드린 용식이가 ‘꺄우!’ 하고 울며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역시 여기서 제일 얌전하고 착한 건 우리 용식이밖에 없다. 망할 녀석들.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얼굴 가득 실실거리는 미소를 지은 강수현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형, 저랑 같은 침낭에서 잘래요?”

    “뭐? 침낭?”

    강수현의 말에 의문을 느꼈다. 침낭은 개인용이 아닌가? 근데 왜 저런 말을 하지?

    “개인용 침낭 아니야?”

    “아니던데요. 2인용으로 주던데.”

    “왜?”

    어이가 없었다. 보통은 1인용으로 주지 않나? 왜 잘 쓰지도 않는 2인용 침낭을 주는 거지?

    “여기는 두 사람씩 짝 지어서 불침번을 서니까 그런 거 같던데요. 어차피 용병들 말고는 여자들만 있는 길드니까 문제 될 것도 없을 테고.”

    “헐…….”

    그렇다고 그런 번거로운 짓을……. 당황한 눈으로 강수현을 보자, 그가 반짝 눈을 빛냈다.

    “네? 저랑 자요. 형.”

    “아니, 생각할 시간 좀…….”

    “이진아! 나 버릴 거야?”

    “…….”

    미치겠네, 진짜. 이 여고생 코스프레 한 놈들이 또 왜 이러냐고. 나는 곧 선택의 기로에 섰다. 강유현마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날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선택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잘못된 선택으로 이 또라이들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으니까.

    우선, 여기에 용병 계약으로 온 남자가 몇 명이지? 당연히 프레이야 길드원이랑은 같이 잘 수 없을 테니, 우리들끼리 침낭을 나눠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나랑 이든, 강유현, 강수현, 그리고 해송하……. 이렇게 5명이던가? 이미 홀수인 시점에서 망한 거 아닌가?

    “꺄아우!”

    “……!”

    그때, 발치에 엎드려 있던 용식이가 날개를 펼치며 길게 울었다. 나는 용식이를 보자마자 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덥석 안아 들었다.

    “난 용식이랑 잘 거야!”

    “……!”

    “꺄우!!”

    용식이의 커다란 외침이 주변을 울렸다. 에구, 이쁜 것. 용식이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소환수 따위한테 왜 침낭을…….”

    “그럼 우리 용식이는 땅바닥에서 자? 그럴 순 없잖아.”

    “그, 그래도…….”

    당황하는 이든의 어깨 너머로 지원팀의 누군가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그녀를 부르며 가까이 다가갔다.

    “저기요!”

    “무슨 일이시죠?”

    “침낭 말인데요. 저는 제 소환수랑 같이 자도 될까요?”

    그러자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 안겨 있는 용식이에게 닿았다. 흘낏 용식이를 본 그녀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침낭은 넉넉히 지급해 드리니 마음껏 쓰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미소를 지은 지원팀의 일원이 바쁜 일이 있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나는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내 말 맞지?”

    “…….”

    그러자 이든과 강수현이 똥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유현은……. 쟤는 언제나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나는 험악해진 분위기를 외면했다.

    아, 몰라. 진짜 무슨 사춘기 여학생들도 아니고. 아무랑 같이 자면 되지 왜 나한테 와서 이래.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나는 용식이를 안고 지원팀에게 침낭을 받으러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

    “…….”

    천막으로 만든 임시 본부 안에서 선율이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변경한 공략 순서를 적은 종이를 향했다. 그 옆에는 던전 지도를 띄운 아이템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율이야.”

    “……언니.”

    송차현이 다가와 선율이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시름에 잠긴 선율이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많이 되니?”

    “…….”

    선율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길드원에게는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송차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등급 이상 현상이 예상한 것보다 꽤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 세심한 네가 걱정하는 건 당연해.”

    “…….”

    잠시 침묵하던 선율이가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꾸만 이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요?”

    불안해하는 선율이를 보며 송차현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놀랍게도 S급으로 각성했던 그녀가 처음 들어간 길드는 라우페이 길드였다. 그때는 그곳이 빌런 길드인 줄도 모르고 얼떨결에 들어갔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꽤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S급 능력자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길드장인 라이수가 어떤 인물인지도 모른 채, 송차현은 그가 주는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그러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의 명령으로 들어간 던전 안에서 다른 능력자들을 죽일 뻔한 일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는 어리숙해서 던전 입찰이나 길드 간의 알력 다툼에 대해 잘 몰랐다. 그동안 그녀가 들어가 휩쓸었던 던전들이 모두 타 길드의 소유이거나 입찰이 되지 않은 곳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라이수가 시키는 대로, 닥치는 대로 클리어했다.

    당시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이트 사태 이후 그녀 역시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잃었으며, 빨리 던전을 클리어해야 세상이 안정된다고만 믿었다. 그러다 정당하게 던전에 들어온 다른 길드의 사람들을 해칠 뻔했다.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곧바로 라이수에게 따졌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자신의 스킬을 걸고 계약서를 쓴 뒤였다. S급 계약서는 아무리 그녀라 할지라도 함부로 파기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가진 가장 등급이 높은 스킬을 포기하고 계약을 파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킬을 포기한 그녀의 곁에는 누구도 남지 않았다. 거기다 다른 길드들도 라우페이 길드 출신인 그녀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언니,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

    -…….

    그때 그녀에게 손을 내민 건 선율이와 현재의 몇몇 길드원들이었다. 그녀들은 어린 나이에 각성하고 악질 브로커들에게 걸려 하루하루 힘겹게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심지어 반항도 하지 못하는 어린 여자애들만 붙잡혀 있었다.

    아무리 최고 등급 스킬을 잃었다고 해도, 송차현은 S급 능력자였다. 브로커의 본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아이들을 구해 냈다.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깨달았다.

    그렇게 브로커들에게 구한 아이들과 길드를 만들었다. 그게 지금의 프레이야 길드였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여자애들만 구해서 길드를 만들었는데, 그때의 몇몇 아이들이 남자를 보면 트라우마를 호소해서 어쩔 수 없이 정식 길드원들을 계속 여자로만 받게 되었다.

    선율이는 그중에서 가장 침착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길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율이의 속이 멀쩡했을 거라고는 송차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길드를 위해, 다른 아이들을 위해 내색하지 않았을 뿐. 선율이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지금도, 그 상처는 쉬이 낫지 않았을 거다.

    “완벽할 필요는 없어. 율이야.”

    “…….”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해낼 수 있을 거야.”

    지금의 프레이야 길드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송차현은 확신하며 말했다. 그녀의 손이 선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하던 대로 하자. 알았지?”

    “……네, 언니.”

    고개를 끄덕인 선율이의 눈이 다시 던전 지도를 향했다. 지도의 2구역 부분은 가운데에 파란 점이 무수히 박혀 있었다.

    “보조 스킬을 받은 강수현 능력자가 감지한 곳이 정확히 여기까지였지?”

    “네, 아슬아슬했어요.”

    1시간의 제약이 걸려 있는 보조 스킬. 만약 그 제한 시간까지 중립 지역을 찾지 못했다면 큰 불상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선율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