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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0)화 (10/228)
  • 10화

    강유현이라는 재앙을 마주하고 와서 기운이 쭉 빠진 나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정신없이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겨우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길마 새끼가 와서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잠했다. 아마 라우페이 길마에게 된통 깨져서 뒷수습이나 하고 있겠지.

    조금 홀가분해진 나는 일어나서 씻고 밥을 먹었다. 한이진을 얼마나 철저히 가둬 놓는지, 연결된 방에 작은 식당까지 있었다. 누군가 해 놓은 밥을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머리가 조금 맑아져 있었다.

    “이제 어쩐다.”

    작게 중얼거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라던 대로 강유현에게 처맞는 루트는 피했지만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그를 마주하고 느낀 공포가 아직도 선연했고, 무엇보다 빌런인 나에게 적대감을 보였던 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길마가 하라는 대로 빌런 짓을 하면 죽는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젠장.”

    한이진의 수첩을 펴고 펜을 들었다. 이제 어중간한 방법으로는 데드 플래그를 부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선은 수첩에 지금 상황을 정리해 봤다.

    「1. 한이진은 로키 길드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다.

    2. 로키 길드 마스터는 한이진의 스킬을 이용해서 빌런 짓을 하려고 한다.

    3. 빌런 짓을 계속하면 강유현에게 죽는다.」

    여기서 1번 항목 옆에 줄을 긋고 내용을 추가했다. 나름대로 고심한 해결 방안이었다.

    「→ 로키 길드에서 벗어난다.」

    “…….”

    쓰고 나서 현타가 밀려왔다.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여기서 벗어나냐고!

    저도 모르게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 안이 마치 감옥인 것마냥 숨통을 조여 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내가 계속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어 나갔다.

    「→ 로키 길드에서 벗어난다. 현재 쓸 수 있는 스킬은 정신계(B급)와 보조계(S급), 정신계 스킬은 쓸 만한 대신 등급이 낮다. 반대로 보조계는 아군이 없으면 아무 쓸모도 없지만 등급이 높다.」

    그리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레벨 업을 하자!」

    지금의 한이진은 뭘 하든 능력치가 모자랐다. S급의 스킬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조계이고, 정작 펑펑 써먹을 정신계가 B급이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물론 한번 얻은 B급 스킬을 상위 등급으로 올릴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무엇보다 한이진은 모든 스탯이 처참했다. 기본 레벨도 너무 낮고, 스탯도 엉망이었다. 우선은 레벨을 올려서 B급 중에서도 상급의 반열에 올라야 했다.

    ‘레벨을 올리려면 던전을 가야 할 텐데.’

    과연 길마가 보내 줄지 의문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한이진은 던전 클리어도 한 번 해 보지 않은 모양이니까. 그 흔한 칭호도 하나 없으니 말 다 했다.

    아니, 그래도 애가 자진해서 강해지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지 않나? 슬쩍 말해 보면 보내 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왜인지 껄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스템상으로 동기화가 완료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한이진의 기억은 열람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허락된 건 그의 스킬과 능력치 열람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악역이 분명한 길마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청한다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결국엔 최대한 길마의 도움 없이 레벨 업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흠…….”

    고민하던 나는 굳게 닫힌 문 쪽으로 다가갔다. 벌써 오후 2시가 훨씬 넘었는데, 아무도 한이진의 방에 다가오지 않았다.

    끼익.

    문을 열고 복도를 살펴봤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야, 이든.”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텅 빈 복도에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이든이 가까이 있다고 확신했다. 내가 강수현을 납치할 때 이든이 나타났던 걸 보면, 그는 스킬로 자신의 몸을 감출 수 있는 게 분명했다.

    “안 나와?”

    대답 없는 복도를 둘러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오기가 생긴 나는 반쯤 열었던 문을 확 열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복도에 발을 내디뎠다.

    그대로 걸어가자 무언가가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당황스럽겠지. 난 아무 임무도 받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무시하며 계속 걸어가자, 복도 중간에서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야, 잠깐, 잠깐만!”

    이든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짐짓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놔라, 이 새끼야.”

    “어, 어디 가는데?”

    “…….”

    애석하게도 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진짜 나가려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게 왜 궁금한데? 계속 무시하지.”

    “아니, 그건…….”

    쩔쩔매는 이든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면서 팔을 흔들었다. 그러나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손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시발, 종이 인형 한이진 몸. 시발, 시발.

    “좀 놔라.”

    “안 돼.”

    손을 뿌리치려는 내 행동에 이든이 고개를 내저었다. 일순간 얼굴이 굳은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면 안 돼.”

    “…….”

    뭐 이렇게 절박하게 말할 필요까지야. 좀 기막힌 기분이 들어 이든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요란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진중하고 심각한 얼굴이 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진짜로 나갈 생각은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든을 꾀어낼 생각이었지.

    뻘쭘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틀며 말했다.

    “안 나가니까 손 좀 놔 봐.”

    “…….”

    그러자 머뭇거리던 이든이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튀어 나갈까 봐 불안한 얼굴이었다. 얼굴을 찌푸린 내가 곧바로 뒤를 돌았다. 그리고 열려 있는 문으로 다시 걸어갔다.

    문고리를 다시 잡았는데 따라오는 기색이 없었다. 난 의아한 얼굴로 뒤에 서 있는 이든을 돌아보았다.

    “안 들어오냐?”

    “……뭐?”

    충격받은 듯한 이든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역시 방에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닌가?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 이든이 일방적으로 친한 척하는 사이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지금부터 이든에게 할 얘기를 누가 들으면 곤란했다. 이곳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이든 같은 스킬을 가진 능력자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고작 한이진에게 그 정도의 사람을 붙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자의식 과잉이긴 한데,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한 번 더 훑으며 다시 이든에게 말했다.

    “들어와.”

    “…….”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이든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우리가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뭐래, 미친 새끼.”

    아니, 왜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지껄이고 지랄이야. 화가 난 나는 그대로 문을 닫으려 했다.

    “들어오지 마. 씹새끼야.”

    “아, 잠깐, 잠깐만.”

    다급하게 문틈으로 한쪽 발을 밀어 넣은 이든이 소리쳤다.

    “안 들어간다고는 안 했다!”

    “…….”

    난 짜게 식은 얼굴로 몸을 살짝 비켜 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든이 몸을 구기며 문 사이를 통과했다. 그 기세에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난 내가 어이없는 눈으로 놈을 쳐다봤다.

    “허…….”

    내 눈길은 상관도 하지 않고 이든은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별로 볼 것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두리번거리는 게 퍽 수상해 보였다.

    “뭐 마실 거냐?”

    “어? 뭐?”

    아무렇지 않게 티 포트를 손에 든 나를 보며 이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커피?”

    “……네가 커피를 끓여 준다고?”

    “…….”

    불신 어린 눈을 보며 나는 또다시 한이진의 인성을 실감했다. 그래, 커피를 주긴커녕 커피를 얼굴에 쏟지만 않으면 다행인 성격이지. 나는 혀를 차면서 티 포트를 내려놓았다.

    “마시지 말든가.”

    “…….”

    괜히 이상한 행동을 해서 이든을 의심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녀석의 호의적인 태도는 거짓일 확률이 높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든을 항상 의심하면서도 그를 이용해 이득을 취해야 했다. 나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이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스킬 숨기는 거 알고 있었지?”

    “……!”

    길마의 방 앞에서 나도 모르게 개박하 스킬을 발동시켰을 때, 그리고 어제 강유현 앞에서 또 개박하 스킬을 썼을 때. 이든은 당황하긴 했지만 내가 그 스킬을 쓰는 것 자체에 의문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감시자인 그가 한이진이 숨기고 있던 스킬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게 맞는 듯 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왜 길마한테 말 안 했어?”

    “뭐?”

    감시자인 이든이 대체 왜 길마에게 보고하지 않았는지, 그게 궁금했다. 만약 길마가 한이진의 보조 스킬을 알고 있었으면 더 철저하게 이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길마는 모르는 눈치였고, 개박하 스킬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든은 길마에게 언질조차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설마 한이진한테 돈이라도 받았나? 아니, 한이진이 그렇게 돈이 많을 리가 없잖아. 대체 왜…….

    생각을 하던 차에 이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말하지 말라고 했었잖아!”

    “…….”

    한동안 이든의 말이 와닿지 않았던 나는 고개를 기울이다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진짜 말 안 했다고?”

    얘 바본가? 길마한테 숨겼다가 자기도 무슨 일 당할 줄 알고.

    얼굴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이든은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오빤 항상 너한테 진심이었다.”

    “씨발.”

    생각지도 못한 오빠 드립에 험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든은 오히려 기분이 더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변태 새끼 같으니.

    생리적인 거부감을 꾹 누르며 겨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말 안 한다고?”

    “당연하지.”

    “흠.”

    이든를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솔직히 이놈이 이러는 의도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계속 입을 다물어 주는 게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럼,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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