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모두 움직이지 마라. 지금은 나 혼자 싸울 테니.”소리친 것은 아니었지만 태운의 목소리는 미리 깔아둔 마나 회선를 타고 병사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자 태운의 목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혼자 싸우겠다고…?”
“저 숫자를 혼자 감당 가능하다고…?”
이곳에서 태운은 귀족이었기에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지만 병사들 모두 미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태운이 최전선으로 나가 가만히 서 있을 때 헤온 제국의 대군이 태운의 앞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힘 차이로 그대로 찍어누르려고 했군.”
헤온 제국군은 병사를 나누지 않고 본대가 한데 뭉쳐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벨자하의 자신감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벨자하는 자신이 절대 함정이나 적의 전략에 당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을 품고 있었다.
그 자신감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벨자하는 태운이 깔아두었던 함정을 전부 파괴한 뒤 전진했으니까.
‘그리고 자잘한 함정이나 전략에 당하지 않으려면 한 번에 움직이는 편이 좋지. 한곳에 모여 있으면 벨자하가 변수를 통제하기 편하니까.’애초에 압도적인 힘이 있다면 정면 승부를 하는 편이 승률이 가장 높다.
벨자하도 그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온다.”
태운이 펜달 왕국군의 선두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헤온 제국군은 더욱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후….”
태운의 형세는 마치 거대한 해일의 앞에 선 작은 나비와도 같았다.
해일에 휩쓸리면 온몸이 갈가리 찢어져 파편이 되어 버릴 것 같은 작은 존재였다.
하지만 태운 스스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태운은 스스로를 해일의 기세를 늦출 거대한 방파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죽일 수 있으면서도 마나를 적게 사용하며 가장 공격 범위가 넓은 마법.”태운은 그런 마법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화폭.”
태운은 화폭을 개량해 위력을 높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폭발력을 높이고 퍼져 나가는 마나 파편의 수를 늘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과거에는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수준의 힘이었다면 지금은 총알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화폭, 복제, 파괴, 관통.”
태운은 10개의 메테리얼을 만들어 화폭을 사용하고 복제해 마흔 개의 화폭을 시전했다.
화폭 하나당 수백 개의 마법 파편, 10,000개가 넘는 파편이 적들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헤온 제국군에 있던 마법병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적이 마법을 사용한다!”
“방벽을 생성해라!”
태운의 마나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 마법병들은 전부 방벽을 생성했고 화폭은 방벽에 막혀 버릴 것 같았다.
“어림도 없지.”
하지만 태운은 적들이 방벽을 세울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번에 부숴 버릴 방법도 가지고 있었다.
“마법 파괴.”
태운의 눈이 붉게 타올랐고 태운의 시선에 닿는 마법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퍼퍼퍼퍼퍽!
마나 파편은 전방에서 달려오던 병사들의 몸을 관통해 나가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내 다리! 으아아악!!!”
“으아악!!!”
“밟지 마! 으아악!”
마나 파편에 맞은 병사들은 대부분이 즉사했고 죽지 않은 병사들도 부상을 입고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한 번에 만 명에 가까운 숫자의 병사들이 무력화되었다.
부상을 당해 쓰러진 병사들은 뒤이어 달려오던 병사들에 의해 밟히고 눌려 내장이 터져 죽기도 했다.
“무슨….”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태운의 등 뒤에 서 있던 펜달 왕국의 병사들은 제대로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운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작은 준비됐고… 이제 불을 붙일 차례지.”마나를 매개로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마법.
과거 태운이 처음으로 던전에 들어갔을 때 화폭을 사용하고 김현우 헌터가 연계해서 사용했던 그 마법을 태운이 개량한 것이다.
“마나 체인 익스플로전.”
병사들의 몸이나 바닥에 꽂힌 마나 파편.
태운은 그 마나 파편 중 하나에 마치 라이터로 불을 붙이듯 마법을 사용했다.
펑.
처음은 하나의 작은 폭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폭발이 다른 마나 파편에 옮겨붙고 그 폭발로 인해 다른 마나 파편이 폭발했다.
퍼퍼퍼퍼펑!
넓은 골짜기의 입구가 거대한 폭발로 가득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퍼퍼퍼퍼펑!
폭발은 잦아들 기세가 보이지 않았고 마법병들이 폭발을 막기 위해 생성한 메테리얼에도 폭발이 옮아 피해가 더욱 커졌다.
“끄아아악!!!”
“어… 내 다리….”
“눈이… 눈이 안 보여….”
마치 지옥을 보는 것 같았다.
다리가 잘린 채로 앉아서 없어진 자신의 다리를 보고만 있는 병사.
눈이 실명되어 허공에 손을 휘두르고 있는 병사.
전우의 시신을 끌어안고 죽음을 맞이한 병사.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건 전쟁이니까.’
측은함은 느꼈지만 미안함은 느끼지 않았다.
전장이란 죽이지 않으면 죽는 그런 곳이었으니까.
한참이나 계속된 폭발이 잦아들 때쯤 태운의 눈앞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용서받을 수 없는 대량의 살업(殺業)을 저질렀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여 본체에서 스킬 ‘그림자의 기술’을 불러옵니다.]
[조건 ‘용서받을 수 없는 살업’을 충족하여 스킬 ‘그림자의 기술’이 특성 ‘그림자 폭군’으로 변화합니다.]
[특성 ‘그림자 폭군’의 효과로 그림자 야수와 그림자 괴수를 소환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잘됐네.’
태운은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을 보고 웃었다.
그림자 폭군의 효과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자의 기술이 무슨 스킬인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림자 야수, 그림자 괴수 소환.”
태운이 지금 이 전장에서 죽인 사람의 수는 수만 명이다.
그 덕분에 그림자에 생명 에너지가 가득했고 태운은 그것으로 그림자 야수와 그림자 괴수를 소환했다.
그러자 태운의 등 뒤에 과거에 보았던 곰 같은 덩치의 범처럼 생긴 그림자 야수 수천 마리와 수십 미터의 키를 가진 용처럼 생긴 괴수 10마리가 생성되었다.
“괴… 괴물이다!!!”
“으아아아!”
태운의 그림자 야수와 괴수들은 같은 편인 펜달 왕국군까지 위협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그 괴물들이 태운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헬켄은 소리쳐서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저 괴물들은 태운 자작의 명령을 듣는다! 겁먹을 것 없다!”헬켄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고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하나둘 진정하기 시작했다.
‘참… 눈치도 빠르시군.’
태운은 헬켄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그림자 야수와 괴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헤온 제국군을 섬멸해라.”
그러자 태운의 뒤에서 얌전히 서 있던 그림자 괴수 10마리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림자 야수들이 달려들기 시작했고 그림자 괴수들도 헤온 제국군을 향해 날아들었다.
“으아아아!”
“끄아악! 밟지 마!”
“도망쳐!”
“저걸 무슨 수로 상대하라는 거야!”
병사들은 괴수를 보더니 그대로 뒤를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밟고 뭉개며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그때, 대군의 후미에서 마차를 타고 있던 벨자하는 전선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모… 모르겠습니다. 엄청 커다란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는 것만….”“연쇄 폭발? 함정은 모두 파괴했다고 하지 않았나! 적들이 폭발 마법을 대량으로 쏟아부을 정도로 마법병이 많은 것도 아닐 텐데!”
“그것이….”
그때, 마차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으아아악!!!”
“기습이다!”
“벨자하 공작님을 지켜라!”
벨자하가 있던 대군의 후미에 누군가가 기습을 가했다.
“이런 개 같은 자식들이… 날 뭐로 보고….”벨자하는 대륙 최강의 마법사다.
게다가 벨자하는 자신의 가장 뛰어난 제자들을 항상 자신의 옆에 데리고 다닌다.
그러니 이딴 기습에 당할 거라고 생각한 녀석의 낯짝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비켜라!”
벨자하는 마차의 문을 열고 나와 기습을 감행한 녀석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다.
다만 한 명은 여자이고 두 명이 남자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고작… 3명에 이렇게 고전을 하고 있었다고…? 이 멍청한 것들….”벨자하는 기습한 자객들과 싸우고 있던 수십 명의 병사들을 마력으로 짓눌러 터뜨려 버렸다.
“쓸모없는 놈들은 내 옆에 있는 것부터가 죄악이다. 죽음으로 그 죄악을 씻어라.”벨자하는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 끔찍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벨자하.”
“날 아나?”
벨자하는 시큰둥하게 대꾸하고는 자신이 죽인 병사들의 시신을 흔적도 없이 불태웠다.
그러고는 벨자하는 복면을 쓰고 있는 세 명의 인상착의를 확인해 보았다.
그때, 벨자하는 뭔가 특이한 점을 깨달았다.
“외팔…? 설마… 네놈 가도냐?”
“복면 같은 건 필요도 없었나 보군.”
기습을 가한 펜달 왕국군의 자객들은 일제히 복면을 벗었다.
“그래… 가도, 레일로프, 라온이로구나. 왜 잭은 없지? 그 녀석은 죽은 건가?”
“곧 만나게 될 거다.”
“크흐흑…. 팔 하나 잘렸다고 죽어 버리다니…. 너무나도 나약하고 한심한 녀석이 아닐 수가 없구나….”벨자하는 잭이 죽은 줄 알고 잭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잭…. 재능이 조금 있기에 제자로 삼아주려 했더니 거절하고 실험체가 된 녀석이 아니었나.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하다니….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던 내 안목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니까….”“실컷 떠들어라. 곧 네놈은 우리 앞에 무릎을 꿇을 테니.”가도가 검을 뽑아 들고 벨자하에게 달려들었다.
“얘들아.”
챙!
그러자 마차 뒤에서 벨자하의 제자 수십 명이 나타나 가도의 앞을 가로막았다.
“녀석들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기른 제자들이다. 마나 회로가 닫혀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는 네놈은 한 명을 상대하기도 벅찰 거다.”그들 하나하나가 모두 한 도시의 최강자라고 불릴 정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그냥 상대하려면 조금 뻐근하겠어.”하지만 태운에게 마법을 배우고 엄청난 성장을 이룬 가도에게는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가도! 늙더니 허세만 가득해졌구나!”
벨자하는 여전히 가도를 무시하고 있었다.
벨자하가 아는 그는 마법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고 나이도 많이 먹었으니까.
결정적으로 팔도 잘리지 않았는가.
지금 벨자하가 가장 경계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라온이었다.
젊은 나이에 마법을 스스로 깨우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바로 라온이었으니까.
하지만 벨자하의 판단은 아주 어긋나 있었다.
지금 벨자하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사람은 바로 가도였으니까.
“스틸 바디.”
가도는 자신의 잘린 오른팔을 재구성하고 그 팔을 거대한 칼날 형태로 바꾸었다.
서걱!
그러고는 벨자하의 제자들을 단번에 모조리 베어 버렸다.
가도는 벨자하의 제자들을 죽이고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제자는 별 볼 일 없는데…. 이젠 네놈 실력이나 보고 싶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