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
2,000명의 병사들과 10,000명의 병사들이 사활을 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슨 힘이…!”
“흐아압!”
하지만 전투의 승패는 단순히 숫자로 정해지지는 않았다.
헤온 제국군의 선봉장인 세릴은 이상하게 돌아가는 전황을 보며 부관을 윽박질렀다.
“우리의 수가 더 많은데 왜 밀리는 것이냐!”
“적들의 기세가 상상 이상입니다!”
젊은 패기와 뛰어난 무력으로 헤온 제국군의 선봉에 서게 된 젊은 장군 세릴.
그는 스스로 젊은 나이에 많은 전장을 오가며 충분한 경험을 쌓아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릴은 지금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병사들의 수준도 우리가 높을 터…. 우리가 숫자도 많고 저들이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기습을 당하긴 했지만 대처도 빨랐다. 그런데 어째서 저들이 우리 병사들을 밀어내고 있는 거지?’헤온 제국군의 선봉대는 헤온 제국의 북쪽 국경에서 이민족을 상대하던 베테랑 병사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칼 대신 농기구를 들고 있던 대부분의 펜달 왕국군의 병사들보다 훨씬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달 왕국군은 헤온 제국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잭의 특성 ‘전장의 오라’의 효과로 전투력이 크게 상승한 병사들은 헤온 제국군과의 힘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았다.
잭의 특성인 전장의 오라의 대상이 된 사람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완전 탈진하게 되지만 그동안 자신의 한계를 넘은 힘을 낼 수 있게 된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탈진이라는 높은 리스크를 가졌지만 반대로 일반인도 각성자 수준의 완력을 가지게 된다는 큰 장점을 가지기도 했다.
“끄아악!”
“적들을 밀어내라! 이곳을 꼭 사수해야 한다!”
“괴… 괴물들!”
아무리 전장을 많이 겪은 베테랑 병사들이라고 해도 그들의 대부분이 각성을 하지 못한 일반인이다.
잭의 버프로 각성자 수준의 완력을 가지게 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멍청한 놈들!”
세릴은 답답한 마음에 직접 전선에 뛰어들었다.
촤악!
“적들의 수는 우리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너희들이 그러고도 대 헤온 제국의 병사라고 할 수 있는가!”세릴은 벨자하의 마법 학교에서도 나름 상위권의 성적을 보인 후 전장에 나서 공적을 세운, 능력 있는 각성자이다.
단순히 각성자 수준의 완력을 가진 병사들이 교육까지 받은 진짜 각성자인 세릴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세릴 님이 참전하셨다! 모두 돌격!”
세릴의 참전으로 기울어져 가던 판세가 다시 뒤집혔고 헤온 제국군도 다시 기세를 되찾았다.
“끄아아악!”
각성자 수준의 완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그들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아니다.
그들도 어쨌든 창에 찔리고 칼에 베이면 죽는다.
세릴의 참전으로 기세가 오른 헤온 제국군은 동귀어진을 해서라도 펜달 왕국군을 죽이기 시작했다.
‘저놈이 적장인가?’
세릴은 병사들을 베어 넘기며 병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백은의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를 발견했다.
팔 하나가 없는 것과 두 명의 무관에게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전투력이 그렇게 강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세릴의 착각일 뿐이었다.
“가일! 페온! 날 따라와라!”
“예!”
세릴은 자신의 부관 둘을 데리고 병사들을 뚫으며 백은의 갑옷을 입은 기사에게 달려갔다.
“헤온 제국군의 선봉장인가?”
“펜달 왕국의 기사로군.”
세릴은 말 위에서 잭을 보며 말했다.
“병사들에게 특별한 힘을 쥐여주는 능력이 있나 보군. 하지만 지휘관이라 함은 문무를 겸비해야 하는 법.”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세릴은 눈앞에 있는 외팔의 기사를 명백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어 자신의 부관에게 보호를 받고 있는 모습이 지휘관의 자격도 없는 무능한 귀족들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네놈은 벨자하와 관련이 있나?”
“내 스승님의 이름을 어째서 찾는 거지?”
“스승? 벨자하의 제자인가?”
“그렇다.”
물론, 벨자하가 세릴을 직접 가르친 적은 없었지만 헤온 제국 마법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대부분 자신이 벨자하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적장은 되도록 생포하라는 말이 있었지만… 벨자하의 제자라면 그럴 수 없겠군.”
“무슨 말을 하는….”
“넌 벨자하의 제자이기 때문에 죽는 거다.”잭의 옆에 있던 부관 둘은 레일로프와 엘레한드로의 제자였던 케일과 제빈이었다.
태운은 케일과 제빈의 실전 경험을 길러주기 위해 전선 중 비교적 안전한 잭의 옆에 배치해두었다.
즉, 둘이 잭을 지켜주던 것이 아니라 잭이 둘을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저놈 옆에 있는 두 명은 너희에게 맡기마.”
“알겠습니다!”
잭은 벨자하에게 오른팔을 빼앗기고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었다.
복수는커녕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갇혀 있었다.
그런 그곳에서 자신을 끌어내 준 사람이 바로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던 가도였다.
가도는 벨자하를 향한 복수심, 그리고 절망과 분노를 양분 삼아 잭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삶의 소소한 행복을 알려주며 절망과 분노가 아닌 행복을 양분으로 삼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다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의 가장 큰 원동력이 벨자하를 향한 복수심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벨자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철저히 부숴 버리고 이 세상에서 벨자하의 흔적을 모두 지워 버릴 때까지 이 복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의 시작은 벨자하의 제자를 모조리 죽이는 것부터다.
잭은 자세를 숙이고 검을 쥐고 있는 왼팔을 뒤로 당겼다.
한팔로 검을 쥐고 적을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형적인 자세였다.
“그게 무슨 자세냐. 검의 이해조차 없는….”
“닥쳐라.”
잭이 신체의 결함을 안고 나름대로 싸워가기 위해 만든 전투 자세다.
세릴이 어떤 삶을 살아왔든, 그것을 매도할 자격은 없었다.
푸-욱!
“커… 커억….”
세릴이 말 위에서 전투를 준비하려는 순간 잭의 검이 세릴의 목을 관통했다.
“전장에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오로지 방심에서 기인한 패배였다.
잭과의 힘의 차이도 분명했지만 세릴의 패인은 바로 방심이었다.
“끄… 꺼어….”
세릴이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잭은 신경 쓰지 않고 검을 세릴의 목에 박힌 채로 옆으로 베어 버렸다.
목의 절반이 잘려 버린 세릴은 그대로 즉사했다.
“세릴 님!”
“장군!”
가일과 페온은 순식간에 죽어 버린 자신의 상관을 보고 경악했다.
눈앞의 상대가 자신들의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잭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의 상대는 따로 있었으니까.
“내가 저 덩치 큰 사람 맡을게.”
“케일, 네가? 괜찮겠냐?”
“나 모르냐. 걱정하지 말고 옆 사람이나 맡아.”케일은 덩치가 큰 가일을 맡기로 했고 제빈은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페온을 상대하기로 정했다.
“전장에 서는 건 처음인데… 긴장되네.”
“그러게 말이다.”
제빈과 케일은 태운의 특훈을 받으며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실전에서 그 힘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처음이라고는 하나 목숨을 건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걸 망설일 만큼 무르지는 않았다.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예, 칭찬 감사합니다. 샛노랗게 늙은 놈아.”가일이 케일에게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며 윽박지르자 케일은 아무렇지 않게 피해냈다.
매우 빠르고 강력한 마법이었지만 케일의 특성인 ‘혜안’과 스킬 ‘집중력 강화’ 덕분에 아주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사고 가속.’
케일은 가일의 대검을 피해내고 사고 가속을 사용했다.
가일은 다시 검을 휘두르기 위해 검을 회수하고 있었다.
‘뻔히 보여.’
케일은 검을 회수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가일의 허벅지에 검을 꽂아 넣었다.
“크윽! 이 자식이….”
가일은 검을 버리고 케일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이 개 같은 자식이….”
“윈드 커터.”
촤악!
케일은 머리채를 붙잡힌 상태로 마법을 사용했고 가일은 손목을 베여 케일을 놓치고 말았다.
“후….”
케일은 헝클어진 머리를 그대로 두고 검에 마나를 주입했다.
“이런….”
검을 놓아 버린 가일에게는 케일의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피하기에는 케일이 가일이라는 거대한 표적을 놓칠 리가 없었다.
부-웅!
케일이 검을 휘두르자 공기를 찢어 버리는 소리가 들렸고.
촤-악!
그와 동시에 가일의 몸도 반으로 갈라졌다.
“뭐… 별거 아니네.”
케일도 잭과 라온 정도가 아닐 뿐 재능이 넘쳐나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한창 습득력이 좋을 나이에 강태운이라는 좋은 스승을 만났으니 그 성장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빈, 너는 아직 안 끝났어?”
“나도 방금 끝난 참이야.”
케일이 전투를 끝내고 제빈을 바라봤을 때 제빈은 마침 적의 몸에서 단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제빈의 상대였던 페온은 온몸에 구멍이 난 채로 죽어 있었다.
“참… 너도 무섭다.”
“반 토막 낸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잭은 케일과 제빈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태운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케일과 제빈의 검술 교관이었던 사람은 바로 잭이었으니까.
“이제 슬슬 전투를 끝낼 때가 된 것 같구나.”선봉장의 죽음은 적들의 사기가 완전히 꺾여 버릴 만한 일이다.
“세릴은 죽었다! 항복하지 않는 자들에겐 죽음뿐!”케일은 잭의 말을 듣고 세릴의 목을 들고 외쳤다.
세릴의 죽음을 확인한 병사들은 하나같이 전의를 잃었고 대부분이 항복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그렇게 헤온 제국 선봉대와 펜달 왕국 복병의 첫 번째 전투는 30분도 지나지 않아 끝나고 말았다.
* * *
“잭 자작님의 군대에서 승전보를 보내왔습니다.”“그렇군. 최대한 빨리 복귀하라고 신호를 보내게.”태운은 잭의 승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작 1만 명으로는 잭의 버프를 받은 병사들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이제 관건은 이곳이다.’
가장 넓고 큰 이 길은 헤온 제국의 입장에서도 꼭 차지해야 할 중요한 길이었다.
적들의 본대는 반드시 이곳을 지날 것이다.
“설치해두었던 마법 함정들이 순차적으로 해제되고 있습니다!”
“역시….”
태운은 혹시 몰라 설치해두었던 함정이 천천히 해제되어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한숨을 내쉬었다.
‘충분히 할 수 있다.’
가도도 가능하다고 한 일이었고 태운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그 작전을 실행하려고 하니 불안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적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군 전투 준비!”
약 80만 명.
적들이 엄청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
엄청난 수의 적들을 보고 펜달 왕국군은 본능적으로 위축되었다.
이것을 먼저 해결해야만 승산이 있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잊게 만들 만큼 인상적인 힘을 보여주면 된다.
“가보겠습니다.”
“다치지 말거라.”
태운은 검을 들고 펜달 왕국군의 선두로 나섰다.
그리고 말했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지금은 나 혼자 싸울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