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태운은 내일부터 시작될 훈련을 예고하고 갑자기 궁금한 게 라온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바인트로를 처음 봤을 때 그 정도로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내가 처음 왔을 때는 정말 심각했어. 그게 벌써 2년 전이네.”“2년 전? 그때는 아직 발로렌 남작이 살아 있을 때 아닌가?”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때는 발로렌 남작이 살아있었지. 그런데 나는 발로렌 남작에게 가지 않았어.”“왜지? 바로 갔다면 바인트로는 지금보다 더 번성했을 텐데.”“물론 그랬겠지. 그런데 발로렌 남작은 우리에게는 도움이 안 돼.”
“그게 무슨 뜻이지?”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레일로프는 실제 역사에서 벨자하에게 죽었어.”태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겔릭의 마정석을 흡수하면서 둘의 아들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때도 우리는 이 바인트로를 거점으로 삼아 힘을 길렀었어. 물론, 발로렌 남작을 도와 일을 했을 때도 바인트로는 크게 번성했지. 내가 발로렌 남작을 도운 덕인지 발로렌 남작은 지금 역사보다 더 오래 살았어.”
“음….”
발로렌이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버릴 정도로 모자란 사람은 아니다.
“발로렌 남작을 도우면서 나와 레일로프의 정보가 자연스럽게 벨자하의 귀에 들어갔고 벨자하는 바로 설산을 넘어 이곳으로 왔지. 하지만 우리도 대비는 해놨지. 발로렌 남작의 바인트로는 나와 레일로프의 도움으로 엄청난 속도로 번성했고 주변 영지 5개를 흡수해서 병력까지 잘 모아놓은 상태였거든. 바로 옆에 이민족이 있어서 변경백으로 임명받을 수 있어 병력을 많이 모을 수 있기도 했거든.”“영지 5개에 변경백…. 그 정도면 기반도 없이 급하게 설산을 넘어온 벨자하 정도는 상대할 만했겠는데.”맞는 말이었다.
그 거친 설산을 자력으로 넘어올 수 있는 사람은 벨자하와 그의 제자 정도.
거기에 벨자하가 커버해준다면 병사 1~200명 정도는 추가로 넘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벨자하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라온과 레일로프를 모두 견제하면서 수천 명의 병사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온도 태운의 말에 긍정했다.
“충분히 막을 만했지. 애초에 그걸 상정하고 바인트로를 키운 거니까. 하지만 발로렌은 우릴 버렸어.”
“뭐라고…?”
“벨자하의 등장은 이 대륙의 큰 파란을 일으켰고 그 중심에는 나와 레일로프가 있었어. 발로렌은 더 이상의 변화를 바라지 않았어. 자신의 영지에 사는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는데 그것을 깨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
“…….”
발로렌은 두려웠던 것이다.
쉽게 얻어낸 이 풍요로움이 그만큼 쉽게 없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벨자하가 노리는 게 우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발로렌은 우리를 내쳤어. 매일 도망치다가 결국에는 죽고 말았지.”항상 감정을 잘 컨트롤하던 그녀의 얼굴이 부정적으로 일그러졌다.
‘벨자하에게 죽은 기억을… 떠올린 거겠지.’태운은 라온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어떤 생각을 하며 죽었는지도 알고 있다.
“헬켄은 발로렌과 달라. 녀석은 야망이 있거든. 벨자하는 녀석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될 거고 헬켄은 절대 녀석을 가만히 두지 않겠지.”태운도 라온의 생각과 같았다.
헬켄은 아직 실리보다 명분을 더 챙기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헬켄은 대담한 야심가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헬켄은 자신의 앞을 막는 벨자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할 말이 다 끝났으면 이제 다들 돌아가서 쉬거라.”무거워진 분위기에 가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레일로프는 어디 있지?”
“아, 레일로프 형님은 알레한드로와 같이 헬켄에게 갔습니다. 헬켄이 형님의 실력이 궁금하다고 해서….”라온의 물음에 잭이 대답했다.
“간만에 보는 애인인데 다른 사람이랑 있는 게 조금 마음에 안 들긴 하네. 뭐, 별수 없지.”라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잭, 실력을 보고 싶다고 했던 거면 연병장에 있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거기 가봐야겠네.”
라온이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태운도 일어났다.
“나도 가볼게.”
“연병장에?”
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로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보고 싶고….”태운은 레일로프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고 싶었다.
역사 개변으로 인해 실제 역사보다는 강해졌을 것이고 태운이 알고 있던 것보다는 약해졌을 테니까.
“그리고 내 실력도 헬켄에게 보여줘야지. 참, 다들 내가 내 몸으로 싸우는 건 본 적 없지 않나? 다들 같이 연병장에 나가자. 가도 님도 가죠?”“그래, 아군의 전력을 잘 파악하는 것도 훈련의 일환이니까.”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그렇게 모두 일어나 연병장으로 향했다.
연병장은 영주의 저택에서 크게 멀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연병장에 도착했을 때 모두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굉장히 의외의 광경이었다.
“후우… 다시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목검을 들고 헬켄을 두들겨 패고 있는 레일로프였다.
“형님…?”
“그래, 이래야 내 남자지.”
잭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고 라온은 대충 예상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온몸에 멍이 들어 있는 헬켄을 보다 못한 알레한드로가 둘의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를 시도했다.
“영주님! 오늘은 이 정도로…. 레일로프 님도 조금은 살살….”“알레한드로, 물러서거라. 내가 원하는 일이다.”헬켄은 다시 일어났다.
“계속 부탁드립니다.”
헬켄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이미 몸은 한계에 부딪힌 것 같았다.
‘그나저나 헬켄도 검술에 조예가 있는 걸로 아는데 고작 한 시간 만에 이 정도로 몰아붙이다니….’용병 생활을 하는 동안 레일로프의 실력이 태운의 예상보다 더욱 많이 성장한 것 같았다.
‘열정이 있는 건 좋지만… 이 이상은 만용이야.’태운은 천천히 걸어가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휴식도 훈련의 일환입니다.”
“아, 강태운 님…. 여긴 어쩐 일로….”
“레일로프의 실력을 보고 싶어서 왔는데 영주님이 얻어맞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아… 자신의 몸도 지키지 못하면 그 무엇도 이룰 수 없을 거라는 말이 떠올라서 말이죠. 레일로프 님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헬켄은 생각보다 무모하면서도 바보 같은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건 나쁘지 않아.’
옆에서 브레이크를 걸어줄 사람만 있다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는 요소다.
“자고로 훈련이라 함은 자신의 한계를 천천히 늘리는 일입니다. 한 번에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한다면 부러지게 됩니다.”
“…그렇군요. 한 말씀 배웠습니다.”
헬켄은 태운의 말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레일로프는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범인의 기준을 잘 모르거든요.”
“범인의 기준….”
레일로프는 천재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잭, 라온도 모두 천재다.
천재이기 때문에 뛰어난 실력을 가질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 천재성 때문에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없었다.
천재에게는 당연한 일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알려줘야만 하는 일이고, 천재는 너무나도 쉽게 체득한 기술이 범인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기술일 수 있으니까.
“지금 하는 일이 자신의 불안함을 죽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실력의 향상을 위해 하는 일이라면 지금은 쉬고 내일부터 제가 다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헬켄은 태운의 말에 설득되어 목검을 내려놓았다.
“옆에서 보고 계시죠. 레일로프, 아직 움직일 수 있겠지?”
“물론이다.”
레일로프는 헬켄과 한 시간 넘게 대련을 하고 있었지만 헬켄을 상대로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뭐… 제 실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와닿지 않으실 겁니다.”헬켄은 말하지 않았지만 태운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겉보기로는 고작 20대 초반에 불과하다.
가도와 라온이 극찬할 정도의 성취를 이루기에는 어린 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레일로프, 선수는 양보하겠다.”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지금 내 몸이 어느 정도로 따라줄지 감을 잡지 못했어.’태운은 자신의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강태운
LV: 40
마나 총량: 75,000
체력(50) 근력(50) 민첩(50) 유연성(20) 지력(90) 마나친화력(20) 용기(20) 재생력(10)
특성
상위 특성-명장(3개)
수호신(LV.1)
파괴자(LV.1)
회피의 귀재(LV.1)
스킬
상급 마법(LV.M)
웨폰 마스터리(LV.M)[S]
마법 파괴(LV.3)[S]
고정(LV.3)[S]
오버 서플라이(LV.3)[S]
육감(LV.3)[S]
더블링(LV.1)[S]
직감(LV.3)
원래 자신의 몸보다 한참이나 떨어진 스테이터스와 70% 정도가 사라진 특성과 스킬.
이것이 실제 전투 상황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줄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들어가지.”
예상보다 뛰어난 레일로프의 실력과 약해진 자신의 몸.
그 사이의 차이를 잘 가늠해야 한다.
레일로프의 목검이 태운의 목을 노리고 쇄도했다.
‘호오….’
과거에 태운이 가도의 마정석 안에서 레일로프를 가르쳤을 때, 레일로프는 굉장히 강했다.
하지만 이번 역사에서 레일로프는 태운에게 배운 기간이 며칠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정도 기간이면 마나를 다루는 방법과 기본적인 신체 강화 마법의 수식만 알려줬을 것이다.
그 때문에 레일로프의 실력이 조금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면 내가 제대로 알려줬을 때랑 별로 차이가 안 나는데?’태운은 보호 마법을 걸어놓은 팔로 레일로프의 목검을 막아냈다.
‘이 정도 충격량이면 신체 강화 마법도 고효율도 사용하고 있는 것 같고.’방금 한 합을 나눈 것만으로도 태운은 레일로프의 실력을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럼… 천천히….’
신체 관련 스탯만큼은 레일로프가 앞선다.
하지만 태운은 그 스탯 차이를 역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하이 부스트.’
태운은 왼팔에서 하체에 이르는 근육만 강화했다.
그리고 왼팔로 레일로프의 몸통을 노리고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크읍…!”
마나가 넘쳐났다면 전신의 근육을 강화했겠지만 지금 태운이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은 고작 75,000.
마나를 최대한 아껴야만 했다.
‘직접적인 공격을 하는 왼팔과 그 충격을 받아내는 코어근, 하체의 근육, 그리고 그것을 이어주는 근육만 강화한다.’조금 복잡했지만 이렇게 하면 전신의 근육을 한 번에 강화했을 때만큼의 공격력을 낼 수 있다.
“후우….”
레일로프는 태운의 공격을 받아내고 그 힘으로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달려들었다.
‘다음은 마법.’
태운은 메테리얼을 13개 생성했다.
그러자 그중 두 개의 메테리얼이 사라졌다.
‘마나 친화력 스탯이 줄어들어서 그런 건가….’태운은 어느새 달려들어 공격을 시도하고 있는 레일로프를 보면서 메테리얼을 하나 사용해 다리를 강화하고 뒤로 물러났다.
후-웅!
레일로프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태운은 그 틈을 노렸다.
‘배리어 자벨린.’
태운은 메테리얼 10개를 모두 사용해 레일로프에게 배리어로 만들어진 투창을 쏘아냈다.
푸푸푸푹!
“맙소사….”
“허… 우리는 강태운의 실력을 조금도 알아보지 못했구나.”투창은 레일로프에게 날아갔지만 조금도 스치지 않았다.
대신 레일로프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 땅에 박혔고 땅에 박힌 투창은 레일로프의 몸을 구속했다.
“아직 몸풀기밖에 안 됐는데…. 다른 분 없나요?”하지만 아직 태운은 자신의 실력을 절반도 보여주지 못했다.
“다음은 내가 해도 되겠지?”
전투 불능 상태가 된 레일로프를 대신해 잭이 나섰다.
“간만에 실력이나 한번 보자.”
잭은 태운을 마주 보고 목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