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헌터들의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는 빅포 스무 마리였다.
B급 던전에서도 종종 보이는 몬스터로 크게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굉장히 까다로웠다.
덩치가 큰 만큼 빠르게 처리하는 게 힘들었으니까.
“빨리 처리해! 뒤에서 쫓아오는 몬스터들이 도착하면 난전이 벌어진다!”난전은 던전 안에서 헌터들이 가장 기피하는 전투 형태다.
어느 정도 정형화된 전투 형태는 충분히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변수가 일어난다고 해도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도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난전이 벌어진다면 인명 피해는 피할 수 없게 된다.
“제가 가겠습니다.”
“내가 서포트하지.”
태운이 검을 꺼내 들자 심중현도 품에서 마법 보조 아티팩트를 꺼냈다.
‘마나 소모량을 절반 이하로 줄여주는 아티팩트인가.’심중현의 특성은 ‘공간 왜곡자’이다.
공간 왜곡자의 효과는 이름 그대로였다.
의지에 따라 공간을 왜곡하는 특성.
활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특성이었지만 엄청난 양의 마나 소모량과 괴랄한 사용 난이도 때문에 심중현도 헌터가 막 되었을 시기에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지금은 헌터 생활을 7년 이상 해오면서 얻은 경험과 마나 소모량을 줄여주는 보조 아티팩트를 활용해 그 특성을 백분 활용하고 있었다.
“두 발자국 달린 후 검을 휘둘러라.”
“예…? 거리가….”
“그냥 하란 대로 해.”
태운은 그냥 심중현이 시키는 대로 빠르게 두 발 나아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그러자 멀리 있던 빅포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오더니 검에 목을 내어줬다.
“어…?”
“헛짓하지 말고 또 휘둘러라!”
태운이 당황한 사이 심중현이 다시 한번 공격 명령을 했다.
태운은 또다시 허공에 검을 휘둘렀고 다시 빅포의 머리가 태운의 검으로 다가와 베어졌다.
‘이거 엄청난데…?’
태운은 그제야 이 현상의 비밀을 알아냈다.
심중현의 공간 왜곡으로 인해 태운의 몸이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공간을 뛰어넘었고 그래서 빅포가 눈앞으로 다가온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두 번째 공격은 약간 달랐다.
공간 왜곡으로 태운의 팔과 검의 길이를 늘리고 각도를 살짝 틀어 빅포의 목을 날려 버린 것이다.
‘약간 꼭두각시가 된 것 같지만… 굉장한데…?’지금은 단순히 심중현의 의도대로 전투가 흘러가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심중현과 완벽히 합을 맞출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 심중현과 페어를 짠다면 그 위력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심중현 씨! 제 움직임에 맞춰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 알아서 해봐라!”
태운은 서커스 공연 같은 움직임으로 빅포의 공격을 전부 피하고 빅포를 공격했다.
태운의 회피 동작은 너무나도 현란했기에 심중현이 손을 댈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공격에서는 심중현이 충분히 태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태운이 현란한 동작으로 적을 농락하며 회피한 직후 공격을 할 때 태운의 검이 살짝 잘못된 각도로 날아가거나 깊숙하지 않게 휘둘러질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현란한 동작 이후의 공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심중현이 있어서 그 문제는 바로 해결되었다.
심중현의 공간 왜곡으로 강태운의 검은 아무리 잘못된 방향으로 공격을 하더라도 정확하고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적의 목을 잘라냈으니까.
‘생각보다 더 유용한 특성이야.’
태운은 심중현과 합을 맞춰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느낌이… 살짝 부족해. 내가 심중현 헌터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어.’심중현 헌터의 공간 왜곡을 백분 활용하려면 지금보다 더 실력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되었다.
심중현 헌터의 공간 왜곡은 고작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슬슬 시작해야겠어….’
심중현과 태운의 협공으로 빅포의 수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 알리제는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없어지는 빅포의 수를 보고 다음으로 기회를 미뤄야 하나 생각했지만, 알리제의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뒤에서 쫓아오던 수인족
몬스터들이 속도를 높였다.
지금 시작하면 헌터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뒤의 몬스터들이 헌터들을 덮칠 것이다.
그럼 난전이 벌어질 것이고 그사이에 알리제와 원로들은 태운을 습격해 죽인다.
이것이 알리제의 작전이었다.
알리제는 이 작전을 시행하기에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지금이다.]
알리제는 원로들에게 신호를 보낸 순간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마기를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변장이 풀렸고 알리제는 원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악의를 터뜨려라!”
알리제의 그 말에 알리제와 접촉한 적이 있는 헌터들의 목덜미에 보랏빛 문신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괴로움을 호소했고 마기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원래는 자신이 직접 문신을 하나하나 새겨야 했지만 쟝에게 힘을 나눠 받고 마기를 소모해 자동으로 문신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알리제는 그 힘을 얻고 헌터들을 위로하는 척, 응원하는 척 다가가 그들에게 문신을 새겨두었고, 그 덕분에 던전 공략에 참여한 헌터의 절반 이상은 알리제의 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알리제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심중현 헌터님, 지금입니다.”
태운은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낮게 읊조렸고 심중현은 아무 말 없이 공간 왜곡을 펼쳤다.
서-걱.
심중현이 공간 왜곡을 펼친 순간, 알리제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기는 다루는 사람이 죽으면 소멸한다.”
알리제가 죽자 목덜미에 문신이 새겨져 마기에 잠식될 뻔했던 헌터들은 모두 해방되었다.
“현우 형, 허덕륜 선생님, 나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알겠다.”
김현우와 허덕륜은 태운의 오더를 듣고 잠깐 멀리 떨어져 마기를 터뜨리고 공격을 하려 했던 원로들을 전부 파악했다.
알리제가 죽은 것을 보고 재빠르게 다시 마기를 수습하고 변장을 한 녀석도 있었지만, 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푸-욱!
김현우 헌터가 원로의 등 뒤로 단검을 찔러넣었다.
“이 개 같은….”
김현우의 정의의 파동은 이미 만전의 상태였고 이제 그의 힘은 웬만한 A급 헌터 이상이다.
이제 쩌리 원로 따위는 김현우의 상대가 아니다.
쾅!
허덕륜에게 걸린 원로는 더욱 잔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허덕륜의 주먹에 안면을 가격당한 원로는 머리가 반쯤 무너져 내렸다.
“이런 젠장!”
그쯤 되자 칠죄신교의 원로들은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기로 몬스터의 어그로를 풀고 수인족
몬스터 쪽으로 도망쳐! 한 명이라도 살아가야 한다!”가장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원로 하나가 오더를 내렸고 원로들은 엄청난 속도로 헌터들의 사이에서 빠져나와 수인족
몬스터들이 뛰어오고 있는 방향으로 도망쳤다.
마기를 남김없이 사용해 자신의 몸을 감싸면 몬스터의 옆을 지나가도 몬스터에게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원로들은 그렇게 도망치면 헌터들이 자신들을 쫓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이런….”
태운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예측할 수는 없다.
애초에 마기에 그런 활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도 못했으니까.
‘젠장…. 연정아에게 마기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물어볼 걸 그랬어.’태운은 앞과 뒤를 번갈아 보다가 소리쳤다.
“심중현 헌터님! 절 빅포 무리 사이로 보내주세요!”가까워지는 몬스터 무리를 보며 태운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도망가는 것을 선택했다.
도망치는 원로들을 죽이겠다고 헌터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후….”
태운은 에테르를 돌검에 조심스럽게 주입한 후 빅포 무리 사이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 공격에 빅포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었다.
‘몰랐는데 에테르를 사용하는 게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심하네….’태운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소리쳤다.
“빅포들을 전부 처리했습니다! 앞으로 도망칩시다!”
“하지만 원로들이….”
“원로들을 잡자고 모두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크윽….”
헌터들은 태운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도망가는 것을 선택했다.
“먼저 가세요!”
잠깐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낙오된 헌터들을 챙기기 위해 태운이 후열로 돌아갔을 때, 시력을 강화하고 수인족
몬스터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때, 태운은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 * *
“알리제! 이 개자식! 좋은 작전이 생각났다고 뻗댈 때부터 이럴 줄 알았어!”“대원로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는 거냐.”
“서울 작전이 성공했기를 빌어라. 안 그러면 우린 죽은 목숨이니까.”
“하필 전대섭이 서울에 있을 줄이야….”
“괜찮다. 전대섭이 있어 봐야 거기는 원로 100명이 파견됐다.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어.”원로들은 도망치면서 실없는 소리들을 내뱉었다.
헌터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곧 몬스터들과 만난다. 마기를 몸에 씌워라.”원로들은 거대한 수인족
몬스터 무리를 앞에 두고 마기를 몸에 뒤집어씌웠다.
이렇게 하면 몬스터들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그랬었다.
“어…?”
퍼-억!
가장 먼저 앞서나가던 원로가 수인족
몬스터의 앞발에 맞아 옆으로 날아갔다.
“뭐야! 이놈들 왜 이래!”
“으아악!!! 살려줘!”
원로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몸에 마기를 둘렀는데도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받자 원로들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이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끄아아악!!!”
원로들은 몸에 마기를 두르느라 이미 마기를 모두 소모한 상태다.
마기의 회복 속도가 마나보다 훨씬 빠르다고는 하지만 몇 초 만에 회복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그리고 마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원로는 B급 헌터보다도 약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몸길이가 2M가 넘는 거대한 수인족
몬스터 수백 마리를 당해낼 재간이 없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끄아악!!!”
“씨발! 씨이발!”
원로들은 산 채로 몬스터들에게 잡아먹혔고 그 비명이 멎을 때쯤에는 모든 원로들이 죽어 있었다.
그리고 태운은 그 모습을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 아니, 잠깐… 원로들은 마기로 몬스터의 어그로를 풀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태운은 그때 원로가 한 말이 단순히 허세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그런 허세를 부려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뭐지…?’
태운은 그렇게 생각하고 부상자를 회복시킨 뒤 대피시켰다.
모든 부상자들의 수습이 끝났을 때 태운은 몬스터 무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리고 예상치도 못한 광경을 보았다.
“왜… 해산하는 거지…?”
방금까지 헌터들을 죽일 듯이 쫓아오던 녀석들이 해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빅포의 피 냄새를 맡은 일부는 여전히 이쪽으로 오고 있었지만 9할 이상은 모두 흩어져 따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마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이.
‘이 던전… 도대체 의도가 뭐야?’
태운은 스스로 생각하고도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던전 자체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추측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