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레일로프가 라온의 말을 전하자 갑자기 세 명 모두 조용해졌다.
“참… 라온답구나.”
“아휴… 40 먹은 아줌마가 주책은….”
“마흔이요…? 아….”
각성자는 신체의 노화가 일반인에 비해 굉장히 느리다.
방금 레일로프의 마정석 안에서 라온을 만났을 때 라온의 나이는 34살이었다.
하지만 외견상으로는 나이가 많아봐야 20대 초중반인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지금 태운의 눈앞에 있는 레일로프도 사실 마흔이 넘었다.
그런데 많아봐야 30대 초반으로 보이니 각성자의 신체 노화 속도가 상당히 느린 것이 체감되었다.
“그나저나 라온은 어떻게 연락을 취한 거지?”“들어보니까 마정석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마법을 더욱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제 존재가 느껴졌고 연락을 시도해봤다고 합니다. 자세한 건 본인도 모른다고 하더군요.”“강태운, 자네는 잘 모르겠나? 자네는 머리가 좋지 않나.”“음… 이 공간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이 공간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요.”태운도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정확히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흰색의 텅 빈 공간.
그것 말고는 태운이 이 공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없었으니까.
그때, 레일로프가 라온의 요구에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라온이 널 내 몸으로 들여보내라고 했는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뭐 아는 게 있나?”
“그러게요. 딱히 아는 방법이 없는데….”
그때, 태운의 눈 앞에 한 가지 알림이 떠올랐다.
[4개의 마정석이 하나의 세계로 융합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4개의 마정석 중 ‘테렌 왕국의 마지막 명장, 가도의 마정석’과 ‘세라오니의 수호 기사, 레일로프’의 마정석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음 마정석은 ‘최초의 화염 마법사 라온의 마정석’입니다.]
[‘상급 특별한 마정석’을 손에 넣으면 ‘최초의 화염 마법사, 라온의 마정석’으로 변화합니다.]
[4번째 ‘악몽에 시달리는 마검사, 잭’의 마정석까지 흡수하는 데 성공하면 ‘새로운 세상으로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미 클리어한 마정석의 주인이 허락하면 다른 인물의 마정석에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 라온은 이걸 어떻게 안 거지….”
“음? 무슨 말인가?”
태운은 가도와 레일로프에게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자 가도와 레일로프는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표정은 오히려 어두워졌다.
그 이유는 바로 잭의 마정석이 가지고 있는 이름 때문이었다.
“악몽에 시달리는 마검사….”
“젠장….”
태운은 가도의 마정석을 흡수할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잭은 헤온 왕국에 동생들을 납치당해 가도를 배신하려 했었다.
태운은 그 때문에 수십 번이나 죽어가며 가도와의 동기화율을 높이고 가도의 기억을 열람해 그것으로 잭을 설득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별 다를 건 없었다.
가도는 잭의 기습을 흘려내었고 잭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다음 날 잭의 동생들은 머리만 잘려 잭에게 보내져 왔다.
그것에 분노한 잭은 가도를 따라 헤온 제국의 병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잭은 레일로프보다도 매서운 기세로 헤온 제국의 대군을 학살했고 테렌 왕국이 세라오니를 사수하는 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잭의 한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5년 뒤, 헤온 제국의 마법 병단에 의해 테렌 왕국이 무너지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 잭이 홀로 헤온 제국의 수도로 향했다는 소문만이 들릴 뿐이었다.
아마 복수를 위해 떠난 것이 아닐까.
레일로프와 가도는 그렇게 추측할 뿐이었다.
“후… 힘들겠구나.”
가도는 알고 있다.
잭과 똑같은 길을 걸어왔으니까.
가도가 잭을 거둬들인 이유도 자신의 과거가 그에게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과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클 것이다.
“부탁하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나서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구나. 제발 부탁이네. 잭의 한을 풀어주게.”가도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는 잭의 고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헤온 제국의 계략에 빠져 은인을 배신했지만 돌아온 것은 동생들의 시신이뿐이었다.
그때의 그 허탈감과 허망함.
세상에 대한 배신감에 분노까지 느꼈었다.
복수까지 성공했지만 남은 것은 텅 비어 버린 가슴뿐이었다.
만약 가도가 헤온 제국을 멸망시키겠다는 복수심을 원동력으로 일어서지 않았더라면.
테렌 왕국에 와서 인생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면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잭의 옆에는 그를 잡아줄 사람이 없었을 게야. 부탁일세. 후회와 원망으로 가득 찬 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게.”가도는 태운에게 간절하게 부탁했다.
가도가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부탁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태운은 가도의 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잭은 당신에게만 소중한 게 아닙니다.”
“뭐라….”
“고작 1년도 되지 않는 순간이었지만 잭은 제 제자였고 부하였습니다. 그건 레일로프와 라온도 마찬가지입니다.”태운이 몇 살이나 많은 라온과 레일로프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는 이유였다.
“잭은 저에게도 소중한 제자입니다. 부탁하지 않으셔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자네….”
고작 1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 당시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알려준 사람이 바로 잭, 레일로프, 라온이었다.
태운에게는 마치 가족과 다름없는 사이였다.
“고맙네.”
“……?”
가도의 마정석 속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르는 레일로프는 의아해했지만 말이다.
“그래. 지금은 시간에 제한이 없는 것 같으니… 회포를 풀어보자꾸나.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해보면서 말이야.”“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다시 만나니 좋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가도는 뭔가 많이 바뀐 레일로프의 모습에 조금 어색해하는 것 같았지만 조금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색함은 금방 사라졌다.
오히려 과거 딱딱한 모습이 사라지고 융통성 있는 모습으로 변한 레일로프의 모습에 만족스럽기까지 한 것 같았다.
“그래…. 10년 만에 만나서 둘이 결혼까지 했다니… 잭의 소식은 들은 적이 없나?”“예… 10년 동안 용병으로 살면서 정보라면 국가 기관에도 밀리지 않는 조직들과 교류하며 잭의 정보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잭의 행방은 찾지 못했습니다.”
“흠… 그렇군.”
가도는 굉장히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잭에 대한 정보를 조금 알고 있다면 라온의 마정석을 흡수할 때도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잭으로 의심되는 인물이 몇몇이 있었습니다.”그 말에 가도는 기대를 품고 말했다.
“그게 누구지?”
“그렇게 기대하실 건 없습니다. 그냥 추측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그들에게 모두 제 이름이 담긴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은커녕 암살자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한번 이야기해 보거라.”
레일로프의 이야기는 이랬다.
레일로프는 과거 한 왕국의 장수였던 자가 스스로 마법을 깨우쳐 산 하나를 통째로 점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레일로프는 그 즉시 정보를 수집, 판매하는 흑묘대라는 조직으로 달려가 그의 위치 정보를 구입해 바로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암살자였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편지를 보내거나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과장되거나 허황된 소문일 뿐이었고 잭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흠… 아쉽구나.”
“그래도 살아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가도와 레일로프는 잭을 떠올리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실제 역사에서는 라온을 어떻게 알게 된 거죠? 제가 마정석을 흡수할 때는 마법 교육 기관을 만든 답시고 홍보하고 다닐 때 절 견제하던 귀족이 고용한 암살자였는데….”
“아, 맞아. 그랬었지.”
가도는 과거의 기억을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 그랬었지.”
태운은 마정석 안에서 역사가 바뀌었을 때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작용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의 인연인 라온이 태운이 마정석을 흡수할 당시 나타나지 않자 그런 사건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라온은 헤온 제국에서 고용했던 마법사였다.”
“네?”
“내가 게릴라전을 전개해 반년에 걸쳐 헤온 제국군을 각개격파하고 있을 때 헤온 제국은 라온을 고용했다. 라온은 헤온 제국군 사이에 숨어 게릴라 부대를 요격했고 그 탓에 지쳐 있던 병사들이 더욱 힘들어졌지.”
“그랬겠군요….”
게릴라 작전은 적은 수의 병사로 치고 빠지는 전략인데 마법사의 요격으로 인해 병사들의 손실이 커진다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미끼를 던졌지. 라온이 혼자 부대 밖으로 나올 수 있게끔 말이야.”
“오호….”
“그 후, 나와 레일로프, 잭이 라온을 제압했고 감옥에 가뒀다. 라온이 없어지자 3개월 정도가 지나고 헤온 제국을 물리칠 수 있었지.”다시 생각해봐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10배가 넘는 병력 차이를 이겨내고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니까.
게다가 세라오니의 병사들은 절반 이상이 농부들이었기에 전투 실력이 별로 뛰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헤온 제국의 병사들은 모두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정규군이었기에 힘의 차이는 더욱 컸을 것이다.
더군다나 게릴라전을 벌이며 헤온 제국군에서 지원군이 나왔지만 테렌 왕국은 군량미만 지원해주고 병사들은 지원해주지 않았다.
테렌 왕국은 세라오니를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가도는 해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랬더니 그 병력 차이를 어떻게 이겼느냐고 나에게 묻더군. 대충 설명해주었더니 감명을 받았다면서 부하로 받아달라고 했다. 그래서 받아주었지.”
“그게 끝…입니까?”
“그렇다만.”
“쓰읍… 뭔가 많이 빠진 것 같은데요.”
“그게 맞아. 나랑 잭도 반대를 엄청 했었으니까.”아군에 막심한 피해를 입힌 적군의 마법사가 귀화를 청한다고 바로 받아준다니.
보통 쿨한 게 아니었다.
“보통은 조금 의심해보고 그러지 않나요?”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네. 그래서 받은 거야.”가도는 당연한 듯이 말했지만 레일로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저나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던 둘이 만나서 결혼까지 했다니…. 세상 참 신기하구나.”“그때는… 뭐, 상황이 어쩔 수 없었잖아요. 라온이가 제 병사들을 한두 명 죽였습니까.”레일로프는 가도의 밑에 있을 당시 라온과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의 의견 충돌이 잦았고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도 있었다.
그때, 가도가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 이 정도면 옛날이야기는 다 한 것 같네.”레일로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태운도 일어나며 마정석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과 동시에 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마정석 흡수를 진행하시겠습니까?]
태운은 긍정의 의미가 담긴 사인을 보냈고 천천히 태운의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라지던 도중 태운은 가도와 레일로프에게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라온도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태운은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