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오랜만이네.”
레일로프를 만난 지는 벌써 현실 시간으로 따져도 2년이 넘었다.
비록 대화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랬기에 더욱 반가운 마음이 컸다.
“지금 시점은… 아직 라온이랑 만나기 전 시점인가 보네.”태운은 과거 잭로프의 마정석에서 벨자하에게 들었던 내용을 더듬어보았다.
가도가 죽고 나라가 무너진 후 레일로프는 복수를 꿈꿨지만 어려운 현실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용병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었다.
라온을 만나고 용병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으니 아직 라온을 만나지 못한 것 같았다.
태운은 레일로프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전보다 더욱 다부져진 몸과 항상 깔끔하게 정돈해두었던 턱에는 덥수룩한 수염이 자리하고 있었다.
과거 한 나라의 장수였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소위 칼밥을 먹는 용병의 모습만 보였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끼익.
“저, 접니다. 레일로프 님.”
문을 열고 고개는 내민 사람은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소녀였다.
그녀는 얼굴을 붉힌 상태로 레일로프를 바라보았다.
“무, 무슨 일이지?”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태운은 당황해하며 말했지만 그 소녀는 방 안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레일로프 님이 오늘 밤 찾아오라고 하셨잖습니까.”수줍은 듯 말하는 소녀를 보며 태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레일로프 이 자식….”
과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강함만을 추구하던 레일로프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네?”
“아니야. 미안하네. 그때는 내가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랬던 것 같네. 돌아가게.”
“예? 하지만….”
“부탁이네.”
“…….”
그 소녀는 실망한 듯 다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참… 레일로프 이 자식 인기 많게 생겼다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30살이 넘어서 갓 성인이 된 꽃다운 나이의 여성을 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히려 여자가 아쉬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은 좀 놀라웠다.
“일단 좀 잘까.”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는 이 사람이 레일로프라는 것과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 중 일부뿐이었다.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조금 자고 내일 밖에 나가서 뭔가를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 밖에 나가서 주변을 좀 돌아봐야겠어.”태운은 그렇게 생각하고 잠이 들었다.
* * *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태운은 그동안 마을 안에서 잡다한 일을 해결해주고 간단한 보수를 받는 등 이 마을에서 머물렀다.
마을을 떠나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만류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레일로프가 용병처럼 변하긴 했지만 과거의 정의감이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레일로프가 이 마을에서 머물고 있을 때 도적 떼가 마을을 습격한 일이 있었다.
고작 15명으로 이루어진 도적 떼였지만 농사만 짓고 사는 사람들이 도적 떼를 물리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레일로프가 나타났고 도적 떼의 우두머리를 단칼에 베어 버리며 도적 떼를 몰아냈다.
그 이후, 이 마을 사람들에게 영웅처럼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레일로프는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마을로 떠나려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온갖 의뢰를 주고 보수를 주며 레일로프를 붙잡고 있었다.
“뭐… 언젠가는 나가야겠지.”
레일로프가 이런 작은 마을에서 봉변을 당할 일도 없고 원한을 살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어디로든 떠나야 일이 시작될 것 같아.’
태운은 오늘 밤에 마을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마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나갈 생각이었다.
태운은 여관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이 여관도 무료로 일주일이나 묵었다.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되었지만 정도 많이 들었고 받은 것도 많았다.
‘금화 하나면 되겠지.’
태운은 금화를 침대 옆 서랍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갑옷을 벗지 않고 침대에 앉아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해가 지고 달이 하늘에 높게 떴을 때 태운은 방문이 아닌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3층이긴 했지만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태운은 조용히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 앞으로 쭉 걸어갔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이미 마을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방금까지 머물렀던 이름 없는 마을을 도적 떼가 습격했습니다. 전에 나타났던 15명의 도적들이 우두머리를 잃고 도망간 후 큰 도적단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그 도적단에 들어가는 것을 조건으로 내놓은 정보가 바로 마을의 위치였습니다. 마을을 습격한 도적단을 막아내십시오.]
“뭐…?”
태운은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을 의심했다.
“하필 내가 나온 날에…! 아니, 잠깐….”
하필 태운이 마을을 나온 날에 도적들이 습격한 게 공교롭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운이 마을을 나왔기에 도적단이 마을을 습격한 것이었다.
레일로프는 웬만한 도적 떼 30명 정도는 혼자서도 가볍게 쓰러뜨릴 수 있다.
처음 작은 도적 떼가 습격했을 당시에 그 힘을 보였다면 도적단들은 레일로프가 마을에 있을 때 마을을 습격하는 것을 꺼렸을 것이다.
“이 개자식들….”
다시 습격해올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나도 평화로웠기에 그 사실을 망각해 버렸다.
‘아니,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거야.’
물론, 규모가 더 커져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겠지만 레일로프가 나가면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을 입구에 목책을 세우고 마을 창고에 농기구가 아니라 창 같은 게 보이기 시작한 것도….’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레일로프도, 태운도 조금만 신경 쓰고 있었다면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자의 입장에 서 있는 태운과 레일로프는 약자가 가지는 공포감에 공감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무심하게 마을을 나와 버린 것이다.
“하이 부스트.”
태운은 레일로프의 몸에 하이 부스트를 사용하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 * *
“습격이다! 아이들과 여자들은 모두 촌장님의 집으로 숨고 남자들은 모두 창고에서 창칼을 꺼내!”싸울 수 있는 마을의 남자들은 고작 15명에 불과했지만 도적단의 수는 그의 3~4배에 달했다.
“싸울 수 있는 남자가 적은 시기에 이런 일이….”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남자아이들의 수가 10명, 성년 이상의 남자는 30명이 넘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과거의 일어난 전쟁에 끌려가 대부분 죽고 말았다.
그때, 꼬마였던 남자들이 자라 지금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막을 수 있다! 어떻게든 막아!”
일주일 동안 창을 찌르고 검을 휘두르는 연습을 해왔다.
하지만 고작 일주일 동안 스승도 없이 대충 휘두른 경험이 싸울 때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푸욱!
가장 용감하게 달려든 마을의 남자는 도적들의 칼에 복부가 꿰뚫렸다.
“커, 커억….”
그는 자신이 죽더라도 한 명을 데려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찌른 도적의 목에 창을 찔러넣었다.
“컥!”
“개, 개 같은 새끼들….”
목에 창이 박힌 도적은 그대로 절명했고.
푸푸푸푹!
그 후, 용감한 마을의 남자는 최후를 맞이했다.
뒤따라오던 도적들의 칼에 온몸이 고슴도치가 되어 숨통이 끊어졌다.
“오지 마라!”
마을 사람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새참을 먹으며 밭을 갈던 친구의 죽음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으니까.
어차피 조금만 더 버티면 여관에서 쉬고 있던 레일로프 님이 와서 구해주실 테니까.
“레일로프 님이 여관에 안 계십니다!”
여관에 레일로프를 데리러 갔던 꼬마의 보고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희망을 품고 있었다.
“뭐…?”
“레일로프 님이 안 계십니다! 금화 하나를 남겨두고 떠나셨어요!”그 말은 죽기 살기로 버티던 마을 남자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때, 도적들의 조롱이 시작되었다.
“그놈의 이름이 레일로프였나? 그놈은 마을을 떠난 지 벌써 30분이 지났어! 이 마을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지도 못할걸?”“크하하하하! 멍청하기는. 마을에서 가장 예쁜 처자를 데리고 와서 바쳐봐라! 혹시 알아? 우리가 깊은 아량을 베풀어 살려줄지?”“네가? 사람 죽이는 걸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놈이 살려준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도적들의 조롱에 마을 남자들은 점점 더 전의를 잃어갔다.
“우린 모두 끝이야….”
“이대로….”
“기사셨던 아버지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기만 하셨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마을 남자들은 몸을 벌벌 떨며 눈물을 흘렸다.
“야! 이놈 봐라! 아빠 찾는다!”
“크흐흐흐… 겁쟁이 자식들! 어떻게 놀아줄까?”그때, 17살밖에 되지 않은, 싸울 수 있는 마을 남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케일이 입을 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레일로프 님이 떠나실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요! 언제까지고 그 사람에게 의지할 생각이 아니었잖습니까!”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물론, 도적단들까지 말을 멈췄다.
“레일로프 님이 마을을 떠난다고 하셨을 때, 도적단이 돌아올 거라는 말을 왜 안 했습니까! 레일로프 님에게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다고 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끼리 버텨야 한다고, 우리끼리 이겨내야 한다고 목책을 세우고 창을 만든 이유가 이렇게 도적단 앞에서 질질 짜려고 한 것이었습니까?”
“케일….”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케일의 말에, 목소리에 마력이 실려 있었다는 사실을.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우자구요! 그 뜻이 죽음이어도, 능욕 끝에 목이 베어지는 것이어도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안 싸우면 누가 이길 수 있냔 말입니다!”그 말이 끝나자 케일의 몸에서 마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케일은 검을 들고 가장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도적들은 검을 들고 케일에게 말했다.
“어린놈의 자식이 말 한번 기똥차게 하는구나. 그 목을 꿰뚫어주마!”
“죽여!”
케일은 검을 배운 적도, 마나를 다루는 것을 배운 적도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세상이 느려지는 듯한 고양감, 그것을 느끼며 도적이 휘두르는 검의 빈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촤-악!
그 순간, 도적의 복부가 반으로 갈라져 내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뒤이어 오던 도적이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카가가각!
서걱!
케일은 검을 비스듬히 세워 공격을 빗겨내고 도적의 목을 베었다.
“저 자식… 머릿수로 밀어!”
“““우오오오!”””
좁은 입구,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케일이 각성을 하긴 했어도 아직 풋내기에 불과했다.
계속해서 달려오는 도적단을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촤악!
케일은 가장 먼저 다가오는 도적을 베어 넘기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순간, 세상이 느리게 느껴지는 듯한 고양감은 사라졌고 도적이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젠장…!”
죽음을 예감한 순간.
푸-욱!
“돼, 됐다!”
마을의 청년이 케일을 공격하던 도적의 목을 찔러 단숨에 죽여 버렸고 방금까지만 해도 벌벌 떨고 있던 마을 남자들은 다시 창을 굳게 잡고 마을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덤벼라!”
마을 청년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도적들을 막아서자 도적들은 잠시 멈칫했다.
“고작 15명이야! 죽여!”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그렇게 말한 순간.
서-걱!
누군가가 날아와 도적단 우두머리의 목을 베었다.
“다들 수고했다.”
레일로프가 도적단 우두머리의 목을 들고 50여 명의 도적 떼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