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음… 더 하실 이야기 없으십니까?”
“뭔가 더 바라는 것이 있나?”
“아, 아닙니다.”
태운의 예상과는 살짝 다른 대화의 흐름에 당황했다.
‘원래는 특별 승급에 관해서 이야기하러 왔을 때 나에게 또 다른 제안을 했었는데….’다른 나라로 이민 가지 않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을 조건으로 온갖 혜택을 약속했었다.
‘그중 길드 창설에 있어서 굉장히 유리한 항목도 있어서 바로 승낙했었지.’하지만 지금은 그런 제안은 하지 않았다.
‘아직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아서 그런 건가?’사실 19살에 지금 정도의 성취를 얻은 사람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애초에 A급 헌터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하는 태운이 과거로 돌아와 그 기억을 토대로 빠르게 성장한 것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출발부터가 다른 것이다.
‘딱히 그 제안이 아쉽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현실과 상당히 달라서 조심스럽긴 하네.’태운은 성급하게 이현에게 바로 특별 승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을 조금이지만 후회했다.
‘회귀의 이점이 사라진 셈이니까.’
회귀의 이점은 간단하지만 강력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태운의 행동 때문에 사건이 뒤틀렸고 이제부터의 미래는 태운이 알고 있지 못하는 미래다.
‘오히려 좋아.’
그렇다고는 하나 그게 안 좋은 방향으로만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건 분명하다.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태운이 모르는 사건이고 겪어보지 못한 사건일수록 이곳의 태운은 현실의 태운과 더욱 다르게 성장하게 될 테니까.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뒷말 나오지 않게 충분히 강한 상대로 부탁드립니다.”“마스터 등급에서 최하위들로만 구성해도 뒷말 같은 건 나오지 않을 거네만.”
“그럼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래, 기대하고 있겠네.”
태운은 교장실 밖으로 나갔다.
“마스터 등급이라….”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마스터 등급의 교육 커리큘럼은 공개되지 않았지. 사실 있는지도 모르지.’마스터 등급은 익스퍼트나 챌린저 등급처럼 교육을 하기 위해 만든 등급이 아니다.
알려진 건 딱 하나다.
마스터 등급의 학생들은 실전 경험을 키우기 위해 파견을 자주 나간다는 것.
‘그 덕분에 명운 헌터 아카데미의 위상이 높아짐과 동시에 돈도 꽤 많이 벌지.’물론 80% 정도의 돈은 파견 나간 학생이 받고 중계 수수료로 20%만 명운 헌터 아카데미가 가지지만 말이다.
명운 헌터 아카데미가 지원하는 대부분의 서비스는 기업의 투자와 그 중계 수수료로 이뤄진다.
‘파견 나가서 받는 돈이 상당하다고 들었는데… 연봉으로 따지면 분명히 억 단위겠지.’마스터 등급의 학생들은 대부분 23~25살이다.
그 나이에 억대 연봉을 받는 것은 그들의 능력을 생각해봐도 많은 금액이다.
‘명운 헌터 아카데미의 마스터 등급 학생이라는 건 그만한 브랜드 가치가 있지.’명운 헌터 아카데미에는 수많은 파견 의뢰가 들어온다.
한국 헌터 길드는 물론 타 국가의 헌터 길드, 헌터 협회에서도 파견 의뢰를 보낸다.
그 내용에는 던전 공략에 참여하는 것도 있고 칠죄신교의 테러에 대응하는 데 도움을 달라는 내용도 있다.
그런 수많은 일 중 명운 헌터 아카데미가 절대 받지 않는 의뢰가 하나 있었다.
‘필연적으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
전쟁이나 칠죄신교 잔당 소탕 작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지.’그 과정에서 명운 헌터 아카데미의 학생이 죽기도 한다.
의뢰 수주와 파견은 전대섭이 전담해 적절한 전력을 파견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개개인의 실수까지는 막을 수 없는 법.
죽는 일을 완전히 방지할 수는 없었다.
“일단 마스터 등급에 올라가서 생각해 보자.”태운이 교장실을 나와 교실로 돌아오자마자 특별 승급전의 일정이 잡혔다.
정확히 3일 후 11시 경기 시작이다.
상대는 조강현, 이설아, 공전하였다.
공교롭게도 세 명 모두 태운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조강현은 헌터가 되고 나서도 만났었지.’
조강현은 거인화라는 파괴력이 상당히 높은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런 특징을 활용해 공격이면 공격, 방어면 방어까지 다양하게 활용해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바로 조강현이었다.
‘가장 거슬리는 건… 역시 이설아지.’
이설아는 설녀라고 불리며 아카데미 최강의 얼음 마법사라고 인정받고 있다.
그녀의 특성은 확실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얼음 마법에 관련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얼음 마법이 발현되면 그 주변에 있는 적들은 죄다 움직임이 둔해지고 결국에는 얼어붙는다.
‘가장 성가신 특징은… 이설아의 광범위 공격은 피아를 식별한다는 거지.’이설아의 얼음 공격을 스스로 아군을 비껴간다.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태운도 그런 컨트롤은 할 수 없다.
적을 맞추는 동시에 마나를 컨트롤해 공격 방향을 왜곡해서 아군 주변에만 빈 공간을 만든다?
그런 컨트롤은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신기에 가깝다.
‘이설아가 그런 컨트롤을 하는 건 아닐 거야. 다른 방법을 쓰는 거겠지.’마지막은 공전하다.
공전하는 태운이 세 명 중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홍대 테러 사건 당시에도 옆에 있었고 칠죄신교 잔당을 처리하러 갔을 때 벌어진 강원도 던전 사건 당시에도 같이 있었다.
‘공전하는 발도술사라고 불리지.’
발도는 한계가 분명한 기술이다.
대부분 주요 검술을 따로 두고 부수적으로 가끔 활용하는 것이 발도다.
하지만 공전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마나 운용법으로 발도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더 빠르고 더 강력하고 더 위협적이게.
오로지 그것만을 추구한 게 공전하의 발도술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공전하는 발도술의 한계를 지우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들 하지.’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노력의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인지 아직 보여준 것은 없었다.
아마 이번 승급전에서 그의 진짜 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기대되는데?’
과거로 돌아와 첫 번째 대련이다.
게다가 상대도 훌륭하다.
승부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즐겁지 않겠는가.
“아, 못 참겠다.”
이대로 가만히 있지 못할 것 같았다.
몸을 움직여야만 할 것 같았다.
태운이 지하 훈련장으로 가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순간
“얘들아, 다음 수업 체육관이야.”
“또 허덕륜 선생님 수업이야?”
“하… 그 쌤 진짜 개 빡센데….”
“저번에 그 야구공 피하기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우연히도 바로 10분 뒤 체육 시간이었다.
‘지하 훈련장에 갈 필요도 없겠네.’
갑자기 몸이 달아올라서 그런 것뿐, 태운은 다시는 수업 도중에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한 달이나 무단 결석을 했으니 교사들이 태운을 좋게 볼 리가 없을 터. 그러니 몸을 사리려는 것이다.
2차 각성의 부작용으로 기절했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무단 결석은 무단 결석이다.
애초에 태운을 안 좋게 보던 사람들이 많았으니 이번 일을 계기로 태운에게 눈치를 주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카데미에 제대로 나오지도 않을 거면서 왜 계속 다니느냐고 말이지…. 그럴 바엔 자퇴하라는 말도 들었어.’이번 일은 태운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용히 혼나고 나와야 했다.
태운은 곧 그들의 높은 콧대를 제대로 짓밟아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체육관에 가볼까?”
태운은 교실 옆에 있는 탈의실로 가서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태운은 수업도 들으면서 겸사겸사 자신의 힘을 아카데미에 소문도 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강해진 최악의 열등생.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으니까.
현실에서야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진 못했지만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닐 테니까.
‘게다가 허덕륜 선생님도 한번 봬야지.’
강력계 교사라고 불리던 시절의 허덕륜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그 돌멩이는 현실의 허덕륜과 똑같지만 말이다.
* * *
허덕륜은 브론즈 C급 학생들을 모두 모아놓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늘의 수업은 그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나와의 대련에서 1분 동안 버티는 것이다.”
“네에?”
“선생님 잠깐만요!”
“버티는 것의 기준은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된다.”
“아니, 쌤?”
이게 바로 허덕륜이 강력계 교사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실전 경험을 기른다며 이런 식으로 학생들을 굴리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힘 조절 잘할 테니까. 크게 다칠 일은 없을 거다.”
“제발….”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다 허덕륜이 날리는 야구공에 맞아 기절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 치가 떨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1번 강기현부터 나와라.”
“네….”
강기현은 반항도 하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 끌려 나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은 모양새였다.
“전력을 다해 보거라. 그렇지 않으면 절대 상대도 안 될 테니 말이다.”
“흐….”
강기현은 공격 자세를 잡았지만 아주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어깨가 너무 올라와 있어. 긴장했네. 주먹 위치도 저게 아니지.’전투 자세가 어떻게 저렇게 빈틈이 많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과는 뻔했다.
한 번의 공격도 피하거나 막지 못하고 그대로 KO.
바로 녹다운당하고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하지만 다음도 그리 다른 건 없었다.
긴장한 상태로 전투에 임했고 제대로 공격에 나서보지도 못하고 KO 당했다.
“후….”
허덕륜도 심란한 것 같았다.
‘브론즈 C반의 학생들을 가르칠 때마다 저런 표정을 지으시곤 했지.’브론즈 C반의 학생들은 재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몸치에 노력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자세를 알려줘도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고 따라 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노력을 하지 않는 녀석들을 두드려 패다 보면 한두 명 정도는 맞기 싫어서 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
그 결과 허덕륜은 매년 30명 중 5명 정도를 사람으로 만들어 브론즈 탈출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허덕륜의 훈련 방식은 입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덕륜이 훈련 방식을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브론즈 C반의 학생이 실버로 올라가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끄억….”
그 이후로 두 명이 더 쓰러져 5번인 강태운의 차례가 왔다.
허덕륜은 강태운이 앞으로 나오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태운은 노력도 하지 않는 브론즈 C반의 학생 중 가장 가르칠 맛이 나는 학생이지 않았을까.
태운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태운이 강해지기 시작했을 때, 훈련의 성과를 얻었을 때, 마치 자신의 일처럼 좋아하던 허덕륜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선생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태운은 그 표정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대련 시간 5분으로 바꿔주세요. 5분 버티겠습니다.”태운은 거기에 한 가지 더 부탁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주세요.”
A급 중의 A급, 사실은 전 세계 5위 안에 드는 실력자인 허덕륜의 전력을 한번 맛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