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선생님, 마정석 구해왔습니다.”
“어, 그래.”
자하르는 태운의 등장에 익숙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흐…. 요즘 안 온다고 생각하자마자….”
“또 지옥 시작이구만….”
자하르의 부하 연구원들은 태운의 등장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래도 휴가를 나갔다 온 덕분인지 눈빛은 조금 더 생생해진 것 같았다.
그래 봐야 동태와 생태 정도의 차이지만 말이다.
“일단 좀 쉬고 있어라. 오랜만이라 그런지 녀석들이 일에 적응을 못 하고 있거든.”
“네 알겠습니다.”
조금 시간을 날리게 되었지만 그들을 탓할 게 아니다.
애초에 자하르 제외 5명이라는 적은 인원으로는 정리가 가능한 정보량이 아니다.
마정석마다 편차가 있지만 보통 이곳에서의 1분이 마정석 안의 12시간쯤 된다.
‘헥티르의 마정석을 흡수할 때는 시간 배율이 더 빨랐지.’그때는 30시간에 1분 정도가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때 연구원들은 자신들이 말 그대로 갈려 나갔었다고 말했었다.
자하르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웬만한 악덕 기업에서 하는 것 이상의 노동량을 소화하고 있다.
그것이 익숙해져 있는 연구원들이 그렇게 말할 정도니 얼마나 심했는지 가늠도 쉽게 가지 않았다.
가끔은 미안해지기도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건 자하르인 것을.
‘몇몇은 이미 탈모가 심하게 온 거 같던데….’태운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연구원들의 모발에 안녕을 빌어주고 소파에 앉았다.
‘일단 생각을 정리해 보자.’
태운은 지금까지 일본 헌터계의 정보를 싸그리 모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다.
카츠라는 일본 최강의 헌터가 포함된 팀이 투입된 던전 안에서는 ‘무조건’ 1명의 헌터가 사망했다.
‘던전 안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명색이 일본 최강의 헌터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게다가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카츠는 아주 선량하고 정의감 넘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람이 힘을 가졌다면 어떠한 자세를 갖출까?
미디어에 드러난 성향대로라면 같은 헌터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들을 구하면서 한 명의 희생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카츠는… 미디어에 비춰지는 것 그대로의 사람은 아니겠네.’그리고 태운이 카츠에 대한 의심을 키우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사망자가 나오지 않도록 충분한 전력으로 도전한 던전에서도 사망자가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헌터 협회는 수사를 진행하지도 않았다.
A급 헌터가 좀 많을 뿐, 헌터 인력 자체는 부족한 편이라 인명 사고에는 철두철미한 일본 헌터 협회가 이런 일을 쉬쉬했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태운은 이런 점을 이상하게 보고 카츠의 행보를 찾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언론의 칭찬 이외의 기사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았다, 유명인이라면 한 번쯤은 나올 법한 가벼운 스캔들조차도 없었다.
‘완벽하거나… 아니면 카츠가 언론을 꽉 잡고 있거나 둘 중 하나지.’태운이 카츠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을 때 자하르가 다가와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태운은 자하르의 말을 듣고 마정석을 꺼내 들고 연구실로 돌아갔다.
“시작하기 전에 신호 한 번만 주고 시작하게.”
“네”
태운은 캡슐에 누워 신호를 주었고 그 즉시 마정석 흡수를 시작했다.
* * *
“음…?”
태운이 마정석 흡수를 시전하고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없었다.
비유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검은 공간에 내팽개쳐진 것 같았다.
‘헥티르처럼 감각이 제한된 상태인 건가…?’태운은 아무 몸에서나 사용할 수 없는 육감 대신 마력 실을 사방으로 길게 늘어뜨려 보았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은커녕 바닥을 제외한 그 무엇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때 태운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아수라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으십시오.]
태운은 그 순간 알아챘다.
‘오랜만이네. 스토리 없는 마정석 흡수.’
지금까지 스토리 없는 마정석 흡수는 딱 한 번뿐이었다.
그 자물쇠 임무를 내어준 마정석 말이다.
‘마법 파괴는 잘 쓰고 있지.’
태운은 이 마정석에서 얻을 보상도 마법 파괴 정도의 성능을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쩌저저적!
그 순간 검은 공간이 무너졌다.
검은 공간에서 벗어난 태운이 볼 수 있던 것은 부서진 세상이었다.
치이이익….
하늘은 푸르지 않고 먹구름만 가득했다.
지반이 무너져 바닥에선 용암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산도 바다도 찾아볼 수 없는 멸망한 세계였다.
“이게 우리 세상이 아니라 다행이네.”
태운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갑옷은 휘황찬란했고 들고 있는 검 또한 잘 만들어진 명검 같았다.
태운은 그렇게 자신이 빙의한 몸의 스탯을 알아보기 위해 상태창을 올려보았다.
하지만 상태창을 열지 않아도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빙의한 그 어떤 몸도 지금의 몸만큼 강력하지 않았다고.
이름 없는 영웅
LV:287
마나 총량: 10,439,023
체력(383) 근력(375) 민첩(348) 지력(327) 초감각(130) 마나 감응력(217) 강인함(154) 용기(73) 의지(98)
특성
상위 특성-용사(12개)
상위 특성-마나의 왕(5개)
죽지 않는 자(LV.M)
재생력(LV.M)
냉정(LV.M)
살인자(LV.M)
수라의 길(LV.M)
….
스킬
상급 성검술(LV.M)
열화(LV.M)
용사의 축복(LV.M)
제물(LV.M)
……
“와 미친….”
태운은 그의 상태창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인간을 초월한 수준의 마나양과 스테이터스, 읽기 힘들 정도로 많은 특성과 스킬들까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한 세계를 등에 짊어진 자의 힘인가.’태운은 자신도 이만큼은 아니더라도 이것의 절반만큼은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태운의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태운은 보지도 않고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잡아냈다.
그러고는 눈을 돌려 공격을 한 것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우아아아아아!!!]
녀석은 빨간 피부에 6개의 팔과 3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본 적 없는 괴물이었지만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수라로구나.’
태운은 녀석의 명치에 주먹을 내질렀다.
퍼-엉!
그러자 녀석은 잡힌 팔을 제외한 5개의 팔로 가슴을 보호했고 녀석의 팔 중 하나가 터져나갔다.
[용사아아아!!!]
녀석은 고통이라는 감각과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오로지 분노와 전투라는 것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부웅- 쾅! 부웅- 쾅! 부웅- 쾅!
아수라는 주먹을 내지르며 태운을 압박했고 태운이 그 공격을 피하자 아수라는 죄 없는 바닥만 가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운은 아수라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쳐 주었다.
아수라와 똑같은 공격을 단순히 반대 방향으로 바꾸어서 말이다.
퍽! 퍽! 퍽!
태운의 공격에 녀석의 팔이 속절없이 터져나갔고 어느새 녀석의 팔은 하나만 남아있게 되었다.
[우오오오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도망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퍼억!
“크윽….”
아수라는 결국 태운의 안면에 공격을 꽂아 넣는 데 성공했고 아수라는 태운의 카운터 공격에 머리가 날아가며 사망했다.
“아수라도 상당히 능력치가 뛰어났나 보네.”모든 기본 능력치가 300이 넘는 영웅의 속도에 반응했다는 것과 공격을 한 번이라도 버텼다는 것, 그리고 주먹 한 방에 확실한 데미지를 줬다는 것만 봐도 아수라도 능력치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 땅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일 텐데 약한 게 이상한 거지.’태운은 아수라의 사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근데… 좀 싱거운데?”
아수라와의 ‘전쟁’이라기에 좀 더 치열한 전투를 기대했었다.
몇 번이나 실패할 것 같은 그런 전투 말이다.
그때, 태운의 눈앞에 또 다른 아수라가 나타났다.
아니, ‘아수라들’이 나타났다.
방금 싸웠던 녀석과 똑같이 생긴 녀석들 수백 명이 태운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 이래야지….”
태운은 기대감에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빙의한 몸과의 동기화 탓에 생긴 감정의 변화가 아니었다.
오로지 태운만의 감정이었다.
그때, 수백 명의 아수라 사이에 단 한 명의 거대한 아수라가 걸어 나왔다.
태운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녀석이 진짜 아수라고, 나머지는 녀석의 부하든, 분신일 거라고.
태운은 성검을 뽑아 들고 진짜 아수라에게 달려들었다.
쾅!
엄청난 속도와 엄청난 근력, 그 둘로 만들어진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의 공격을 아수라는 단 한 손으로 막아내었다.
[네놈의 용사 놀이는 끝났다.]
아수라는 태운의 몸통을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그냥 날아간 수준이 아니었다.
내동댕이쳐진 곳에 마치 운석이 떨어진 듯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겨났고 물수제비 치듯 날아가 방금 쓰러뜨린 가짜 아수라의 옆에 쓰러졌다.
“크윽….”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한 용사가 이렇게나 무력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방금이 용사의 전력은 아니었다.
태운은 방금 쓰러뜨린 아수라를 제물로 올려보냈다.
[지금까지 쌓은 제물의 수: 9803]
태운은 그중 3개의 제물을 사용해 성검에 축복을 내렸다.
[달려들어라.]
진짜 아수라의 말에 가짜들은 태운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서걱-!
태운이 단 한 번 휘두르자 축복과 함께 검기가 쏘아져 나가 아수라들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녀석들은 검기에 베이자마자 천천히 타들어 갔고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와 동시에 제물의 수가 올라갔다.
[우오오오오!!!]
녀석들은 태운의 퇴로를 막고 빠르게 달려들었다.
퍼퍼퍼퍽!
태운은 아수라가 몸으로 만들어낸 벽에 가로막혀 자리를 옮기지 못했고 아수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들이 태운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든 순간.
“열화, 용사의 축복”
태운의 몸에서 흰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팔이 터져나가는 고통도 무시하던 아수라들은 흰 불꽃에 닿자마자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태운에게서 물러났다.
신성력이 담긴 불꽃은 아수라에게 굉장히 치명적인 듯했다.
태운은 흰 불꽃을 몸에 두르고 아수라들에게 달려들었다.
이 불꽃을 몸에 두르면 아수라들이 조금은 겁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태운의 기대와는 달리 아수라들은 주춤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태운에게 달려들었다.
쾅!
한 아수라는 태운에게 3개의 팔을 잘리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3개의 팔로 태운을 가격했다.
“크윽…!”
태운은 그대로 날아갔고 다른 아수라는 순식간에 태운보다 높이 뛰어올라 6개의 팔을 모두 사용해 태운을 내리쳤다.
콰-앙!
태운은 바닥에 처박혔고 태운을 공격한 아수라들은 손이 죄다 녹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수라들은 태운을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태운은 그들의 광기에 가까운 공격성에 혀를 내둘렀다.
“진짜… 말 그대로 아수라였네.”
하지만 전혀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치고받는 싸움이 어떤 결말로 끝나게 될지가 궁금했다.
‘나도 잠깐 본분을 잊고 아수라가 되어보자.’태운은 성검에 다시 축복을 불어넣고 아수라들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