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 먹는 헌터-120화 (120/379)

120화

“윽….”

태운은 던전 안에서 눈을 떴다.

주변에는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동료들이 보였고 김현우 헌터만 보이지 않았다.

‘김현우 헌터가 혼자 도망갔을 리는 없고…. 밖으로 나가서 지원을 불러오려고 나갔나 보네.’옆에 자라 있는 광란의 씨앗에서 나온 식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저것은 김현우 헌터가 이 자리를 떠나기 전에 뿌려놓고 자라게 해 놓은 것들일 것이다.

저 식물 사이로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몬스터들은 대부분 약해서 광란의 식물의 냄새를 피할 것이다.

큰 몬스터들은 광란의 식물에 닿는 순간 식물의 덩굴에 휘감겨 공격당할 것이다.

자연 목책을 만드는 데에는 광란의 씨앗만큼 훌륭한 소재도 없다.

‘다행히 다들 목숨은 붙어 있네.’

태운은 육감을 활성화해 다른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했다.

모두 검상을 깊게 입었을 뿐 죽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네.’

다들 공격에 맞기 직전에 본능적으로 최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움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출혈이 심해 목숨이 위험한 사람은 있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은 내가 회복해주면 되니까.’태운은 목숨이 위험한 사람들을 회복해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풀-썩.

“어…?”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그대로 몸이 굳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몸에 힘이 풀린 게 아니었다.

그냥 뇌에서 몸에 명령을 내리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몸이 움직이질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잠깐 생각을 해보니 답은 금방 나왔다.

‘사고 가속을 동시에 사용한 탓이겠지.’

1시간씩 텀을 주고 사용해도 머리에 큰 무리가 가는 스킬을 동시에 5개나 시전했는데 멀쩡하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그래도 지금 위험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들은 죽을 수도 있다.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래도 뇌가 작동한다는 뜻, 억지로 움직이려 한다면 움직이기는 할 것이다.

“끄으으윽!”

태운은 뇌가 움직이는 것을 거부했지만 그래도 움직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가장 가까이 있는 중상자에게 다가갔다.

그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았다.

터-업.

낑낑대고 있던 태운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이제 쉬어도 돼.”

“아….”

그 손의 주인은 지원 헌터들을 데리고 온 김현우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긴장이 풀려서일까?

태운은 겨우 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아 버리고 다시 기절했다.

* * *

“이놈은 던전만 들어갔다 하면 멀쩡하게 걸어 나오지를 못하냐.”

“그러게 말이다.”

태운은 익숙한 병원의 침대 위에서 정신을 차렸다.

언제나 그렇듯 옆에는 찬영과 서혜연이 있었다.

태운은 의사에게 상태를 확인받고 괜찮다는 의사의 판단에 찬영과 혜연과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쉬고 있었다.

“너희는 내가 기절만 하면 병원에서 사는 거 같다. 공부는 안 하냐?”

“이게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구찬영은 태운의 이마에 딱밤을 세게 때리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야,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아까 간호사 누나가 너무 기름진 건 안 된다고 했는데 솔직히 각성자 위장인데 빈속에 기름진 거 들어간다고 해서 문제 될 거 없잖아?”찬영이 음식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위장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상당한 공복감이 몰려왔다.

“혹시 나 며칠 동안 기절해 있었어?”

“일주일.”

“일주일?”

태운은 급하게 창영우에게 달아놓은 GPS를 찾았다.

다행히 창영우는 중국에 있었다.

1시간 정도만 더 기절해 있었으면 GPS는 사라지고 창영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은 중국에 있으니 괜찮지만…. 창공 길드에서 창영우를 계속 스파이로 사용하기 위해 다른 헌터들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어. 아니면 창영우가 GPS를 알아차렸을 가능성도 있으니까….’태운이 심각한 얼굴로 고심하고 있으니 찬영이 태운의 등짝을 쳤다.

“오늘은 고민하지 말고 쉬어. 던전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의사의 말로는 뇌의 충격이 엄청나다고 했어. 자칫하면… 뇌사 상태에 빠질 뻔했다고 하니까….”

“뇌, 뇌사라고…?”

그 당시에 엄청난 두통을 느끼며 기절을 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고통에 너무 둔감해져 있던 건가….’

고통은 신체의 위험을 알려주는 가장 원초적인 신호다.

태운은 위험 신호인 고통을 굉장히 자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태운이 마정석을 흡수하느라 매일 수십 번씩 느끼는 그 고통은 어느새 태운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일상이 되어 버린 그 고통에 의해 태운은 몸의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미치겠네.’

뇌사라는 말이 나온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며 자신의 정신 상태가 두려워졌다.

“일단 좀 쉬어. 앞으로 적어도 한 달 동안은 마법도 사용하지 말고 머리를 쓰지도 마.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멍때리고 있어.”

“알았어. 알았어.”

태운은 찬영의 잔소리를 새겨듣고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했다.

“일단 치킨, 피자부터 시키고 생각하자.”

각성자의 위장에 갑자기 기름진 게 들어간다고 탈이 나진 않으니까.

쉴 때 가장 중요한 건 먹고 싶은 걸 먹는 것이다.

이게 태운의 지론이었다.

* * *

“흐음….”

태운은 명운 헌터 아카데미에 들어간 후,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다.

지난 3년간 태운에게 쉬는 것은 사치였고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마법 수식을 짜며 공부에 집중했다.

“확실히 내가 뇌를 혹사시키긴 했어….”

3년 동안 잠도 줄여가며 공부를 하며 마법 수식도 짰고 마정석 흡수 능력을 얻은 후에도 하루에 수백 배의 시간 배율을 가진 마정석의 안에서 싸워왔다.

‘생각해 보니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네.’

태운은 생각을 접고 침대에 몸을 맡겼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긴 태운은 앞으로 어떻게 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뭐 하면서 쉬지….’

3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태운에겐 쉬는 것조차 어려운 과제처럼 느껴졌다.

“일단 그냥 잠이나 자자.”

할 짓 없이 시간을 때우기에는 자는 것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순식간이었다.

8시간 정도 자니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고 그 이상 침대에 누워 있으니 좀이 쑤셔서 참을 수가 없었다.

태운은 침대 옆에 있던 리모컨을 들어 뉴스를 틀었다.

요즘 뉴스에서는 항상 배반자들의 테러 이야기를 내보낸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자주 내보내는 거겠지.

‘요즘 따라 배반자 녀석들이 미쳐 날뛰고 있어.’인구 밀도가 높아 헌터 길드 사무소가 많은 서울은 그래도 초동 대처가 빨라 피해가 적지만 그렇지 않은 지방은 피해가 컸다.

물론 지방에도 길드의 사무소가 있고 협회의 헌터들도 상주해 있지만 배반자들의 게릴라전에 대응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배반자들의 목적은 어중이떠중이 30명을 보내 전부 죽어도 1명의 원로급 인재를 얻는 거니까.’연정아에게 들은 바로는 현재 배반자들은 전력의 질적 향상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100명이 넘는 전력을 한 번에 번화가에 투입시키는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배반자 녀석들이 지금까지 해온 행보들을 보면 녀석들이 단순히 전력 향상을 노리고 있는 것 같지만은 않은데…. 혹시 다른 목적이 있다거나…. 마르기가스가 말한 의식이라는 것도 연관이 있으려….’태운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쉬라니까 그것도 제대로 못 하네….”

매일 맹렬히 돌아가던 태운의 머리는 평소보다 훨씬 적은 양의 일을 하자 불안해진 나머지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쉽게 말하면 태운의 뇌가 노동의 양이 적어진 이 상황에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이다.

“후….”

태운은 지금 쉬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에 큰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약 8개월 후에 있을 A급 던전 공략, 태운은 공략이 시작되기 전에 최소한 허덕륜급의 힘은 얻고 싶었다.

그래야만 안정적으로 A급 던전을 공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태운이 있던 병실의 창문이 열렸다.

“뭐지? 분명 잠가놨던 거 같은데….”

투-욱.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창문을 통해 종이비행기가 날아들었다.

“여기 20층인데 무슨 종이비행기가 들어오냐….”태운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종이비행기를 들었다.

그리고 종이비행기를 펼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종이비행기를 가지고 놀던 아이가 20층까지 종이비행기를 날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종이비행기 안에는 태운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 대충은 알겠네.”안에서 잠겨 있는 창문을 아무 소리 없이 열어 종이비행기를 넣어줄 수 있고 뜬금없이 태운에게 호의를 보내는 그런 사람.

태운의 머릿속에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처칠 할아버지가 또 뭔갈 준비하셨나 보네.”태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종이비행기에 적힌 글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자네는 쉬지 않고 너무 빠르게 달려왔다네. 쉬는 것도 훈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푹 쉬게. 단순히 내 생각이지만 푹 쉬고 회복되었을 때 자네는 한층 성장해 있을걸세.’태운은 종이에 적혀 있는 말을 알아듣기는 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쉬는 것도 훈련의 일환이라고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푹 쉬고 회복됐을 때 성장해있을 거라고…?’태운은 ‘쉬는 것도 훈련의 일환이다’라는 말을 항상 겉만 번지르르한 말이라고 생각해왔다.

피로에 의해 운동 능력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항상 운동을 하고 뛰는 것이 제일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잠깐… 피로…?’

태운은 지금까지 피로는 신체의 피로로만 한정해서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태운을 쉬게 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인 피로다.

만약 정신적인 피로와 신체적인 피로가 똑같이 능력에 영향을 준다고 가정하면 태운의 두뇌 기능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태운은 그렇게 자신이 쉬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동기부여까지 되었다.

“근데… 머리를 굴리지 않으면 정신이 나갈 거 같은데….”하지만 동기부여가 되었다고는 하나 수년간 만들어진 습관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하늘을 보며 멍때리려 해도 구름을 보면 클라우드 마법의 수식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TV를 보면 그 안에 나오는 물체의 제조 공정이 떠올랐다.

태운은 결국에는 단순히 참는 것이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 차라리 이럴 거면 그냥 머리를 좀 쓰자!”태운의 뇌는 단순히 일을 원하고 있다.

따라서 최대한 뇌에 피로가 가지 않는 굉장히 쉬운 문제들을 주기적으로 풀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 일단 수능 수학 문제 먼저 가져와 볼까?”헌터가 아닌 평범한 학생들은 모르겠지만 마법사는 수능 수학 수준이 아닌 공과대학 시험 수준의 수식을 매일 같이 풀어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뛰어난 태운에게 수능 수학 문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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