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조금은 반격할 걸 그랬군. 약한 것 때문에 알아챌 줄이야.”
“역시….”
정일준은 아무렇지 않게 케이지 반대편에 서서 태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일준은 기사단장이 되기 전에도 기사단 내 최강이었고 그랬기에 기사단장이 되었다.
그런 사람이 고작 유령포가 없다고 이렇게 밀리는 건 말이 안 된다.
“깜빡 속았어.”
정일준은 그동안 계속 유령포에 의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 한 번, 던전 공략 당시를 제외하면 자신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연정아와의 경기 당시에도 자신의 힘을 숨기기 위해 영가를 주로 사용하며 이겼다.
태운은 당황하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겨우 이 정도였으면 찬영이가 질 리가 없잖아.’태운은 찬영의 실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태운은 아티팩트에 의존하는 사람이 찬영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정확했다.
“속공, 16연격.”
‘사고 가속!’
카가가각!
정일준은 순식간에 태운에게 달려와 총 16번 검을 휘둘렀다.
태운은 깜짝 놀라 사고 가속을 사용해 정일준의 공격을 하나하나 막아냈다.
‘이 속도에…. 내 자세를 보고 막기 힘든 검로로 검을 휘둘렀어….’엄청난 동체 시력과 센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실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 어마어마한 속도의 공격에 유령포의 공격까지 같이 날아오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
태운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정일준의 공격에 더욱 집중했다.
공격을 허용한다면 거기서부터 주도권을 빼앗기고 바로 패배라고 생각했으니까.
카가가각!
정일준과 강태운의 검이 매섭게 부딪치며 날카로운 마찰음이 크게 울려 퍼졌다.
듣기 싫은 듯 귀를 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멍하니 감상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 와중에 길드 스카우터들은 침을 삼키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소속도, 추구하는 방향도 달랐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우리 길드로 끌어들인다.’
[아아! 화려한 공방이 이어지던 순간 정일준 선수의 유령포가 변화합니다!]
‘이건…. 시저를 한 번에 보내 버린 그 기술이다.’태운은 솔리드 아머를 4겹으로 씌우고 몸통에 5겹의 하이 프로텍트를 전개했다.
위력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없으나 시저를 단번에 KO 시켰으니 상당한 위력을 지녔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를 하는 것이다.
“유령각.”
유령포는 거대한 뿔의 모양으로 변해 태운에게 날아왔다.
쿠-웅!
유령각이 태운의 하이 프로텍트와 격돌했다.
쩌저저적!
태운의 방어막은 속수무책으로 부서졌지만 유령각은 막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크윽….”
태운은 방어막을 뚫느라 아주 조금 느려진 유령각을 겨우 피해냈다.
‘저게 무슨 사기템이야….’
방금 공방으로 알아냈다.
현재 자신의 힘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하다.
‘나도 공격해서 유령각을 파괴해 버리는 수밖에 없어.’정일준은 유령각을 회수하고 다시 공격을 준비했다.
‘그래도 유령각을 사용할 때는 본신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해…. 유령포와는 달리 컨트롤이 어려운 건가.’태운은 유령각을 주시하면서 마법을 준비했다.
‘유령각을 타격할 수 있는 정확도와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위력을 가진 마법이….’태운이 지금까지 주로 사용한 고위력의 마법은 대부분 광역 마법이었다.
하지만 태운이 이론으로 만들어두고 주로 사용하지 않았던 마법 중에는 그 조건에 정확히 부합하는 마법도 있었다.
“호밍 미사일.”
본래 태운이 설계한 호밍 미사일은 정확도에 힘을 주었던 마법이었다.
그 어떤 적도 공격할 수 있게 말이다.
설계를 그렇게 했기에 당연히 공격력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태운은 이런 마법의 위력을 끌어올릴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태운이 시전한 호밍 미사일은 정확히 유령각으로 날아갔다.
여전히 위력이 약해 유령각을 부술 수 없다.
‘오버 서플라이.’
태운은 호밍 미사일에 오버 서플라이를 사용해 마나를 계속 주입했다.
호밍 미사일은 마나를 먹어 치우고 빠르게 위력을 키워냈다.
파-앙!
결국, 유령각은 파괴되어 영가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곤 바로 사고 가속을 사용했다.
‘크윽….’
짧은 시간 안에 다시 사용한 탓에 두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파괴되며 흩어진 유령각의 잔해들, 그것들이 정일준의 시야를 가리고 있을 때를 노린다.
“오버 부스트.”
태운은 지금 최대한 데미지를 줘서 승기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지금의 판단을 이끌어낸 것이다.
태운의 신체는 아직 오버 부스트의 반동을 감당하지 못한다.
과거 레오의 몸으로 사용했을 때는 레오의 몸이 완성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에 한 번 견디고 난 후에도 정상적으로 싸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버 부스트를 사용하고 나면 몸이 삐걱거릴 것이다.
최대한 지금 승부를 봐야 한다.
‘하이딩 포스.’
오버 부스트로 인해 폭주하는 마나 때문에 위치와 의도를 읽힐 가능성이 있다.
태운은 하이딩 포스로 몸 밖으로 느껴질 수 있는 마나의 기척을 지웠다.
마나 블레이드도 사용할까 했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고 기껏 지운 마나의 기척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베기 직전에 검에 마나를 주입해 절삭력을 높인다. 그거면 충분해.’태운은 빨려 들어가는 유령각의 잔해들에 몸을 숨기며 정일준에게 접근했다.
빠르게 접근한 태운을 발견하지 못한 정일준은 유령각의 회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영가가 유령 잔해를 회수하는 데 걸리는 속도는 1~2초, 지금까지 보아온 태운의 속도로는 접근하지도 못할 시간이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오버 부스트를 보여주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비교적 좁은 케이지 안에서는 0.1초의 시간 계산이나 5cm의 거리 조절의 실수만으로도 승패가 갈릴 수 있다.
게다가 정일준은 태운이 검을 쓰는 모습을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것도 바로 직전의 경기인 찬영과의 경기뿐, 그는 태운의 검술 실력을 파악할 시간이 없었다.
그 정보의 차이가 승패를 가르게 될 것이다.
‘지금!’
태운은 정일준과의 거리가 한 발걸음으로 좁혀지자 검에 마나를 주입해 날을 세웠다.
그 순간, 태운의 검이 날카롭게 변하며 정일준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촥! 촥!
태운은 정일준의 몸통을 크게 두 번 베었고 정일준은 무엇에 베이는지도 모른 채 당했다.
하지만 정일준이 위험을 느끼고 뒤로 크게 물러나 검이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
이번 공격으로 확실한 타격을 주고 싶었던 태운에게는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크윽….’
태운은 오버 부스트의 반동이 오기 전에 한 번의 공격이라도 더 맞추기 위해 정일준에게 따라붙었다.
쾅!
검과 검이 맞붙어서 날 수 없는 큰 소리가 났고, 태운과 달리 무게 중심이 뒤로 쏠려있던 정일준은 뒤로 날아갔다.
촤자자자작!
태운은 정일준을 따라가 연신 공격을 퍼부었다.
그 속도는 공진영의 신속과 정일준의 속공을 뛰어넘어 마스터에 있는 공전하의 초속공과 비슷했다.
“크윽….”
정일준은 유령포를 회복해 태운의 공격을 막아보려 했지만, 태운의 공격은 유령포를 찢어 버렸다.
‘이런 놈이 왜…. 스타지에르에 있던 거야…?’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던 정일준의 생각에 잡념이 생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보다 아래일 거라고 생각했고 던전을 같이 들어간 날에는 자신과 동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자신보다 강했고 지금도 강해지고 있었다.
“으아아아!!!”
태운은 끊어질 것 같은 팔 근육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동시에 마정석의 마나를 흡수해 마법도 사용했다.
촤악! 푹!
검에 베이고, 마법에 관통당하고, 정일준은 케이지의 구석에 박힌 채 태운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전황은 확실히 태운에게로 기운 상황, 하지만 정일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서-걱.
“유령검, 속공.”
태운의 동작이 크게 움직일 때, 정일준은 왼팔을 내어주고 유령검을 소환, 남은 오른팔로 태운을 공격했다.
촤자자자작!
정일준은 단 한 번만 공격했지만 태운은 유령검 탓에 꽤 많은 데미지를 입었다.
“크윽….”
마지막 공격 한 번이었다.
그것만 성공했다면 승리였다.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됐어.’
하지만 정일준도 몸이 이미 엉망진창인 상태, 최후의 수를 준비했다.
“유령각, 유령기사.”
“인페르노, 폭풍, 블레이드, 다중소환.”
정일준의 주변에 십여 기의 유령 기사가 나타나 유령각을 하나씩 장착했다.
태운도 최후의 수를 사용했다.
성공한 적은 있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공격.
어차피 이것 말고는 저 유령 기사를 파괴할 자신이 없었다.
“랜스 차지.”
“지옥의 칼날 폭풍.”
십여 기의 유령 기사가 태운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고,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칼날 폭풍이 유령 기사를 박살 내기 위해 날아갔다.
하지만 태운도 정일준도 이 공격으로 승패를 가르려 하지 않았다.
이 큰 공격은 상대방의 방어 수단을 없애기 위한 것일 뿐, 마무리는 자신의 손으로 해야 했다.
“속공, 72연격.”
“마나 블레이드.”
유령 기사와 태운의 마법이 충돌한 순간 둘이 바닥에서 발을 떼었다.
‘오버 서플라이.’
태운은 오버 부스트의 지속 시간이 끝나가는 것을 느끼고 오버 서플라이로 마나를 공급했다.
팔다리의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덮쳐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 정도 고통은 수없이 느껴봤으니까.
그 순간, 유령 기사와 태운의 마법이 동시에 파괴되었고 두 사람의 시야에는 서로가 보였다.
쾅!
둘은 크게 격돌했고 승패가 갈렸다.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 서 있던 사람은, 강태운이었다.
[저, 정일준 선수 다운! 일어나지 못합니다!]
[강태운 선수의 승리입니다!]
[개인 토너먼트의 우승자는 강태운 선수입니다! 동시에 최종 우승도 강태운 선수가 속한 언더독입니다!]
“크흐….”
태운은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확인한 후, 오버 부스트를 풀고 바닥에 퍼졌다.
“팩 인 디바인 포스.”
태운은 경기가 끝나고 바로 치료 마법을 사용했다.
치료 마법은 경기 중에는 허용되지 않기에 사용하지 못했지만, 경기가 끝났으니 뭘 사용해도 괜찮았다.
“빨리 움직여!”
태운 측 의료진이 급하게 경기장으로 달려왔지만, 태연히 일어나는 태운을 보며 벙쪘다.
“음…. 일단 내려와서 진료부터 받으시죠.”
“네.”
의료진은 간단한 진단을 시작했지만,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태운은 즉시 대기실로 돌아갔다.
오늘은 그동안 노력해준 언더독 멤버들과의 시간을 가져야 하니까.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