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깃발 빼앗기가 시작한 지 3분! 현재 모든 팀이 팀의 깃발을 어디에 꽂을지 위치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깃발 빼앗기가 시작되면 팀장은 15개의 스폰 포인트 중 하나를 정해 팀원 전부를 소환시킨다.
그 후 15분 내에 원하는 장소에 팀 깃발을 꽂으면 그 반경 10m가 팀의 영역이 되는데, 그곳에서 해당 팀의 구성원은 깃발로부터 마나를 공급받는다.
반대로 다른 팀의 영역에 들어가면 깃발에 마나를 빼앗긴다.
깃발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면 공급받는 마나의 양이 늘어나고 상대에게서 빼앗는 양의 마나도 늘어난다.
즉, 팀 영역 내에서 비슷한 전력 간의 전투가 벌어지면 아군 영역에서 싸우는 팀이 굉장히 유리해진다는 것이다.
[아아! 지금 기사단과 백화 팀의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깃발을 꽂는 위치는 매우 중요했고 소위 명당이라 불리는 좋은 위치에 깃발을 꽂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왜 하필 기사단이야…! 도망쳐!”
기사단과 마주친 백화 길드는 기사단의 엠블럼이 박힌 사람을 보자마자 뒤를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단은 그들을 그냥 놔줄 생각이 일절 없었다.
“정성현, 가서 묶어둬라.”
“오케이.”
파치-칙!
정성현은 기사단장인 정일준의 명령을 듣고 바로 특성 뇌전을 발했다.
그 후 5초도 지나지 않은 때, 정성현은 도망가는 백화 팀원들을 따라잡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런 미친….”
그들도 모두 각성자로 아무리 늦어도 100m를 10초 안으로 달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순식간에 따라잡은 정성현의 속도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어딜 가.”
파치치치치칙!
정성현은 몸에서 전기를 뽑아내고 그것으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릴 마주친 순간 너희는 이미 리타이어야.”백화 팀의 뒤에는 이미 기사단의 다른 멤버들이 바짝 붙어있었다.
[아, 백화 팀!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입니다!]
“정성현, 수고했다. 구찬영, 세인, 정성현, 김민준은 마나를 아껴라. 나머지는 모두 공격해.”정일준은 주요 전투원을 두 개조로 나눠 번갈아가며 전투에 투입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그렇게만 해도 충분한 전력을 낼 수 있고 마나와 체력의 소모로 위험에 처하는 경우도 막을 수 있다는 데에서 장점이 있다.
정일준은 백화 팀의 활로를 전부 차단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체력 소모는 자제하도록.”
“개 같은 거…. 아! 모르겠다!”
푸-욱!
도망칠 수 없게 된 백화 팀의 팀장은 그 자리에서 그냥 깃발을 꽂아 버렸다.
그러자 하나였던 깃발이 10개로 나뉘었고 그곳이 백화 팀의 영역으로 선포됐다.
그 증거로 깃발이 꽂힌 곳을 중심으로 천천히 흰색으로 아우라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탈락하느니 기사단의 멤버와 인상적으로 싸우는 모습이라도 보이기 위한 결정이었다.
‘여기에 깃발 꽂아놓고 마나 회복으로 이득을 보면서 몇 명만 도망치게 하면…. 팀 리타이어는 피할 수 있다.’적어도 꼴지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한 선택이었지만 정일준은 그의 생각보다 더 과감한 사람이었다.
푹-.
“어…?”
정일준의 바로 아래에서 시작된 연한 파란색의 기운이 빠르게 퍼져나가 10m 반경을 채웠다.
기사단도 깃발을 꽂고 이곳을 영역으로 정한 것이다.
“아니…. 뭔….”
이 종목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영역 위치 선정을 이렇게 해버린다고?
특히나 여기는 명당도 아니고 오히려 모두에게 동향을 읽힐 수 있는 지대가 낮은 평야 지역이었다.
지금 정일준이 한 행동은 고작 마주친 팀 하나 잡겠다고 명치를 훤히 드러내는 꼴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의 정일준은 자신이 있었다.
명치를 훤히 드러내고 모두의 공격을 받으면서 점수를 지킬 수 있다는 자신 말이다.
[기사단! 과감한 선택입니다!]
[네, 하지만 좋은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백화의 깃발과 백화 팀원 14명을 리타이어시키면 최대 570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수를 잘 지키면서 깃발 몇 개만 빼앗으면 1등을 할 확률이 매우 높아지죠.]
중계진도 그의 선택에 감탄했지만 그게 쉬운 작전이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기사단이 깃발을 꽂은 곳은 그냥 지대가 낮은 곳도 아니고 다른 팀이 깃발을 무조건 꽂을 정도로 좋은 명당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그곳에서 깃발을 지켜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기사단이 백화 팀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단은 침착하게, 깃발을 빼앗기보다는 적들을 공격하는 데에 주력했다.
깃발을 6개 빼앗는 순간 그들의 점수는 0점이 되고 모두 탈락해 리타이어 점수를 얻지 못하게 되니까.
“깃발은 천천히 빼앗는다. 남은 적이 5명이 되면 그때부터 깃발에 손을 댄다.”정일준의 지휘는 정확했고 기사단원들은 그 지휘를 정확하게 따랐다.
그리고 그 일체성에서 나오는 힘은 매우 강했다.
백화의 멤버들은 창처럼 찔러오는 그들의 공격에 한 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때 언더독의 멤버들은 강유도 상공에 보이는 점수판을 보면서 걷고 있었다.
“기사단 점수가 오르는데?”
“누가 기사단이랑 마주쳤나 보네요. 일이 안 좋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담담하네?”
지금 상황만 보면 기사단이 깃발 빼앗기 우승에 한발 다가간 것으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태운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는 않았다.
“다른 대책을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냐?”
“지금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것보다 나중에 생각하는 게 나아.”
“으흠…. 그런가.”
태운은 연정아의 물음에 가볍게 대답해주고 묵묵히 걸었다.
지금은 기사단보다 더 급한 안건이 있었으니까.
“슬슬 도착입니다. 제가 말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공격하지 마세요.”
“누굴…?”
터-엉!
태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방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포박탄.”
그것을 대비하고 있던 태운은 그 공격을 가볍게 방어하고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퍼-엉!
“크윽….”
공격이 날아온 곳에서 포박탄의 폭발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잠깐, 공격을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무력 충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국내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거구와 중후한 목소리, 앞에 선 것만으로 사람의 기세를 반감시키는 위압감.
그런 선수는 강유도 내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웃기시네요, 시저 씨. 그쪽이 먼저 공격한 거 아닙니까?”바로 시저와 적사단이었다.
“일단 말이나 한번 들어보죠.”
* * *
[드디어 기사단과 백화의 전투가 마무리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기사단은 조금의 피해도 없이 상대방을 모두 리타이어시켰습니다. 덕분에 570점을 얻고 870점으로 선두를 달리게 되었습니다.]
중계진과 옵저버들이 기사단에 집중하고 있을 때 적사단과 언더독의 밀담이 이뤄지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그냥, 여기 자리가 좋아 보여서요.”
태운은 사실 이곳에 오면 적사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목적지를 여기로 정했다.
‘적사단은 2차 예선 당시 처음에 많은 팀의 공격을 받으면서 한곳에 계속 머물러 있었지.’매 분기마다 지형이 바뀌는 강유도의 특징상 예선에서 지리를 익히고 그 정보를 단체전에서 활용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적사단은 예선 당시 연합에 공격을 당했기에 돌아다니면서 지형을 탐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시저가 그 상황에서 명당 하나 찾지 않을 만큼 무능하진 않다.
‘싸우던 장소 그 주변에 있는 명당을 기억해뒀겠지.’그리고 적사단이 싸우던 곳에서 보이는 명당은 단 한 곳이었다.
바로 태운이 적사단과 연합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던 그 언덕.
그곳이 지금 언더독과 적사단이 노리고 있는 장소다.
“하필 만나도 저 녀석들을….”
“케빈, 조용히 해라.”
적사단 멤버 중 한 명이 구시렁거리다 시저에게 한 소리 듣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적사단 멤버 중 언더독을 좋게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 갔다.
“단장! 그냥 싸우면….”
“조용!”
적사단의 멤버들은 강태운, 공진영, 홍유리, 김기열 정도만 견제하면 나머지는 별거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강태운과 공진영은 강하기로 유명하기도 했고 홍유리와 김기열은 보여준 게 있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랭킹도 낮고 유명하지도 않았다.
탈락하지 않은 적사단의 멤버들은 전부 골드 B등급 이상의 학생들이고 언더독의 멤버들 몇몇을 제외하고 모두 실버 등급에 속해 있다.
적사단 멤버들의 입장에서는 해볼 만한 싸움이고 하고 싶은 싸움인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도 있겠지만….
“여기서 싸워봤자 득 되는 건 하나도 없어.”“먼저 공격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그건 사과하지.”
시저는 태운의 날이 선 말에도 바로 숙이고 들어왔다.
태운은 거기서 확신할 수 있었다.
적사단과 동맹을 맺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우리끼리 여기서 싸워봤자 이득도 없을 것 같고…. 이 자리 양보할 생각도 없잖아요?”확신이 들자 태운은 슬슬 떡밥을 던지기 시작했다.
“양보는 못 하겠다만.”
“그럴 줄 알았습니다. 우리도 여기 자리가 굉장히 탐나서요.”
“정말 양보 못 하겠다는 건가?”
처-억.
시저는 대검을 들어 올리며 위협했지만 이미 시저의 속내를 알아챈 태운에게는 조금의 압박도 주지 못했다.
‘시저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싸움을 최대한 피하고 싶을 것이다.’시저에게는 명운전 성적이 매우 중요했고 지금 언더독과 싸우는 건 성적에 큰 악영향을 줄 테니까.
“되도 않는 협박하지 마시고…. 일단….”
푸욱!
태운의 등에 메고 있던 깃발을 꺼내 땅에 박았다.
“우리 자리는 여깁니다.”
그와 동시에 언더독의 영역 선포가 되었고 보라색 아우라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본 시저는 빠득, 이를 갈았다.
“네놈이 기어이…!”
그동안 명운전의 성적을 위해 참아왔던 화가 천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언더독 또한 적사단과 싸워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터.
그럼에도 싸우려 드는 언더독의 행동에 화가 났다.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까.
“시저! 이대로 꼬리 말고 갈 건 아니잖아!”
옆에서 적사단의 간부이자 시저의 동기인 셀이 참다못해 시저에게 한마디 했다.
이미 폭발하기 직전인 시저는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이미 깃발을 빼 들었다.
“안 그래도 할 생각이었다…!”
푸-욱!
시저가 깃발을 꽂았고 그곳에는 붉은색의 아우라가 피어오르는 영역이 생겼다.
“적사단에게 싸움을 건 걸 후회하게 해주마.”채채채챙!
적사단의 멤버들은 모두 검을 뽑았다.
시저의 말 한마디면 바로 달려들 준비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때 들려온 태운의 목소리는 적사단의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럼 거기는 적사단 자리 하시죠.”
“뭐…?”
태운은 천천히 적사단과 언더독, 각각의 영역의 교집합으로 나아갔다.
“적사단에게 동맹을 요청합니다. 어떡할래요?”아무리 자존심 높은 적사단이라도 이런 상황에선 거절할 수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