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하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몇 번을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그냥 포기해. 하급 마정석으로 바꿔줄 테니 이걸로 해라.”옆에서 지켜보던 자하르가 못 봐주겠다는 듯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하급 마정석을 태운에게 던졌다.
“하…. 알겠어요.”
태운은 손에 있던 상급 마정석 대신 자하르가 던져준 하급 마정석을 손에 쥐고 시뮬레이션 기계에 누웠다.
“아빠! 깨지면 어떡하려고 막 던져?”
“잘 잡았잖나. 그것보다 왜 흡수를 못 했는지 원인이나 찾아.”태운의 생각한 원인은 단순했다.
그냥 자신의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이었다.
마정석이 원하는 수준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그 때문에 마정석이 미션 자체를 내어주지 않은 것이다.
“마정석 흡수.”
태운의 정신이 다시금 끊어졌다.
* * *
“여긴….”
태운은 정신이 끊어졌다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주변을 살폈다.
황량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있고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땅도 있었던 전과 달리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도, 딛고 서 있을 곳도 없다.
발에 닿는 감각이 아니,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추락하는 느낌은 없었다.
중력이 없는 곳인가?
그때 눈앞에 알람이 떠올랐다.
[마법을 디스펠 하라 (0/1,000)]
그 말과 함께 눈앞에 엄청난 양의 자물쇠가 나타났다.
눈대중으로 세어봤으나 족히 1,000개는 되어 보였다.
“전부 디스펠하라는 건가?”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태운은 바로 자물쇠 중 하나로 다가갔다.
“하아….”
척 봐도 매우 고난이도의 디스펠 수식을 가지고 있는 마법이 걸려 있다.
혹시나 해서 옆에 있는 자물쇠의 마법 수식도 확인해 보았지만 당연히 같은 게 아니었다.
“하… 빌어먹을.”
나름 특기라고 할 수 있는 마법 디스펠 영역이지만 사실 엄청 머리 아픈 분야다.
결과치와 수식을 만든 요소들만 가지고 초기 수식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니까.
수리 능력을 제외하고 마법수식에 관한 지식과 추리 능력까지 필요한 게 디스펠이었다.
이 자물쇠에 걸려 있는 마법은 초기 수식마저도 불수능의 수리영역 문제 30번을 방불케 하는 난이도를 가지고 있었다.
전대섭이 6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태운이 50초 만에 풀어 버렸던 그 문제보다 훨씬 어려웠다.
능력자의 향상된 계산 능력이 없었다면 하나에 4~50분은 족히 걸릴 문제.
이것을 어떤 지성체가 계획했다면 그는 희대의 변태 자식임이 분명했다.
“뭐, 별수 있나. 디스펠.”
태운의 눈앞에 수십 개의 수가 떠올랐다.
“현실이었으면 머리가 어떻게 됐을 것 같은데.”잠깐의 투덜거림 끝에 태운은 수의 세계로 섞여들어 갔다.
약 10~20분에 하나씩 풀려나가는 자물쇠.
여전히 수백 개가 남았지만 진전해나간다는 것에 있어 태운은 만족감을 느낀다.
약 70시간이 경과했지만, 이 신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식욕이나 수면욕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눈이 충혈되고 심장 박동이 빠르고 강해지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피곤한 것을 지나 나른해진다.
주륵.
150시간이 지나고 태운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통각을 차단해 버린 것일지도.
200시간이 지나자.
“흐아학! 흐어… 허….”
집중력의 한계를 맞이한 태운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때 그동안 뒤로 넘겨왔던 피로가 격류처럼 몰아쳤다.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두통과 온 관절을 두들기는 관절통에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씨… 이거 클리어 보상 안 좋기만 해봐라….”다행히 실패할 일 없이 안전하게 한 번에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두 번 할 생각을 하면 시뮬레이션이고 나발이고 그냥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자하르 그 양반, 일반인 맞아?”
능력자로 각성한 태운조차도 뇌에 피로가 극에 달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일반인인 자하르가 수일 밤낮을 새고 연구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고도 정신이 멀쩡하다고 했으니 능력자로 각성했는지 검사 한번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대로 약 10시간 정도 누워 있으니 반쯤 나가 있던 정신이 돌아와 다시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약 50시간이 더 지나 드디어 마지막 자물쇠에 손이 갔다.
“드디어 마지막이네…. 진짜 개 힘들었다. 그나저나 이것도 다 보고 있으려나?”물론 엘레나 모로조바가 직접 디스펠 수식을 구성할 필요는 없지만 태운이 느끼는 피로와 고통은 전부 공유하고 있다.
자하르는 이미 평범이라 불릴 정도의 수준은 벗어났으니 이것을 그대로 보고 있었을지 모르나 엘레나는 다를 것이다.
이미 한참 전에 나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틀이나 못 잔 상태에서 이걸 하고 있으니까.
“휴….”
마지막 자물쇠가 부서지듯 흩어졌다.
디스펠이 완료된 것이다.
“…? 안 끝나네.”
마지막 자물쇠가 디스펠되고서도 한참을 기다렸지만 미션이 클리어 되었다는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목표한 수를 채우지 못한 건가?”
마법을 만들어서 디스펠 해야 하나?
그 생각을 마치자마자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마법을 디스펠하라. (999/1,000)]
“한 개가 부족하다고? 아무리 봐도 자물쇠는 없는….”퍼-엉!
“어…?”
털썩.
등 뒤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도 가까운 거리에서.
태운의 몸이 힘을 잃고 바닥에 처박혔다.
“씨…발….”
세상에 이런 변태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사람을 미치기 직전까지 몰아넣고는 죽이다니.
그리고 다시 하게 한다니.
푸쉬익….
마정석 흡수에 실패하자 시뮬레이션 기계가 비활성화되었다.
“으아아아아아!!!!”
“태운아 왜 그래!”
“아…아… 으아아아아!!! 씨… 이게… 아아아아!!!”그때 엘레나도 시뮬레이션 기계에서 뛰쳐나왔다.
“아아아!!! 이게 뭐야!!! 야, 강태운! 너 왜 실패한 거야!!!”옆 방에서 영상을 정리하던 연구원 한 명이 달려와 소리쳤다.
“둘 다 잡아요! 안 그러면 기계 다 때려 부술지도 몰라요!”
* * *
“하…하… 후….”
“이제 좀 진정이 되나?”
태운과 엘레나는 특수 제작된 대 헌터용 쇠사슬에 묶여 약 10분 동안 소리를 질러댔다.
거의 250시간 동안 피를 쏟으면서 디스펠을 했었다.
그게 허사가 되었다는 것과 함께 ‘다시’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거, 좀 다시 하면 되지 뭘 그리 소리를 질러대나? 처음에 뭐라 했지? 몇 번을 실패하던 다시 하면 된다면서?”엄청난 속도로 가속되는 사고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지만 무려 250시간이다.
현실로도 약 1시간 정도는 지나있었고 태운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들은 전부 연구원이 보고 있었다.
“선생님 그건 좀….”
그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동안 찬영과 혜연도 태운이 그 안에서 뭘 했는지 설명 들었기에 전부 태운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태운아… 괜찮아?”
“…마지막은 그 마법을 디스펠하는 거였나?”
“뭐?”
혜연이 태운을 위로해주자, 그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면서 일어났다.
“선생님, 이거 좀 풀어주세요. 시뮬레이션 기계 준비해주시고요.”사실 순간 하기 싫다고 생각했었다.
까먹고 있었다.
2년 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자신이 왜 이렇게 아득바득 기어 올라왔는지.
겨우 이런 일로 의지가 꺾일 뻔했던 자기 자신이 한없이 혐오스러워졌다.
“미친놈이냐. 너?”
근육을 파괴하는 훈련법을 보고도 잠잠했던 찬영도 이번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었다면 정말로 미쳐 버렸을 것 같았으니까.
주변으로부터 강해지는 것에 미쳐있는 사람 같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던 그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듣고 거기 있던 사람들은 엘레나를 포함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 자하르는 예외였다.
이번엔 자하르가 열쇠를 가져와 자물쇠를 풀고 직접 자신이 시뮬레이션 기계에 들어갔다.
“태운, 준비됐나?”
“당연하죠.”
그러면서 자하르는 동시에 엘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곤하면 자고 있거라.”
* * *
태운은 쉬지 않고 4번이나 더 도전했으나 등에서 일어나는 폭발을 바로 디스펠하지 못해 전부 실패해버렸다.
하지만 얻은 것이 없진 않았다.
폭발 마법이 대상 지정 마법이라는 것, 위력, 폭발의 매개체, 시전 방식 등등.
여러 요소를 알아냈고 영상들을 돌려보면서 마법 수식들을 직접 만들어보면서 디스펠 수식을 만들어 외웠다.
“경우의 수는 13개입니다. 집에는 오늘 안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그냥 한 번에 다 끝내 버리죠.”한번 할 때마다 약 1시간 정도 걸리는지라 벌써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알겠네. 그런데 혹시 마나만 있다면 일반인도 마법을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나?”계속 디스펠을 하는 태운을 보면서 마법 수식을 여러 개 본 자하르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마나가 있다면 이미 일반인이 아니죠.”
“허허, 그렇구만. 그럼 한 번에 끝냈으면 좋겠구먼.”“이젠 저도 모르겠네요. 13번째에 끝나도 기분이 나쁠 거 같지는 않아요.”“내가 힘들어서 그런다. 이놈아. 휴…. 나이는 나이인가 보구나.”엘레나는 이미 곯아떨어졌고 다른 연구원은 자하르가 퀭한 눈으로 모니터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눈을 피하기 바쁘다.
한번 잘못 걸리면 정신병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뮬레이션 기계에서 잠깐 나올 때마다 둘은 좀비처럼 살기 가득한 눈으로 돌아다녔으니까.
“버틸 수 있으시겠어요?”
“이놈아, 그래도 앞으로 10번은 거뜬하다.”
역시 이 사람은 일반인은 아닌 것 같다.
각성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권유라도 해야 하는 건가?
“시작하죠. 전 이제 시뮬레이션 기계에 들어가서 안 나올 겁니다.”
“그래라. 나도 그럴 테니까.”
* * *
자하르와의 마정석 흡수 이후 일주일이 지나 드디어 태운의 특별 승급을 건 대련이 시작되었다.
대기하고 있는 익스퍼트 등급의 학생은 3명이었다.
태운은 이들을 전부 이겨야만 익스퍼트 등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상대는 각각 브론즈 A급, 실버 B급, 골드 A급의 학생들이었다.
전부 스타지에르나 챌린저 등급의 학생들에게는 느낄 수 없는 압력이 있었다.
‘아마…. 실버 한 명이 무투 쪽이고 나머지 두 명이 마법 쪽이었지?’
“첫 경기 시작! 선수 입장!”
“와아아아!!!”
이 대련은 나름 크게 벌어졌다.
사실 특별 승급 대상자의 전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그 대상자가 희대의 열등생인 강태운이었으니까.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에게 동기부여를 한다는 의의를 내세웠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재밌을 것 같다는 이유로 참관을 결정했다.
“스타지에르가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 실버까지는 어찌어찌 이겨도 골드에서 무너질 거다.”
“저거 스타지에르 3년째라며?”
“야, 그래도 이번 시험 올 만점이라잖아? 그것도 만점 기준에 최소 서너 배는 넘겼고.”“스타지에르 만점 기준은 익스퍼트 브론즈인 나도 3배 이상 넘겨.”“교사를 이겼다며? 타격 횟수로만? 에이, 뭐야. 그럼 나도 이길 수 있겠다.”“내기? 에라이 모르겠다. 난 역베팅한다. 올라온다에 걸게.”시끄러운 와중이었지만 자신에 관한 이야기들은 귀에 속속 박히듯이 들려왔다.
슬프게도 이게 학생 대부분의 여론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전부는 아니었다.
태운을 옹호하는 학생들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개중에는 혜연과 찬영도 있었다.
태운은 그들에게 슬쩍 손을 흔들어주고 마정석의 마나를 저장하며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일주일 전, 집에 있던 돈으로 하급 마정석을 잔뜩 사서 흡수한 덕에 스탯이 전체적으로 5씩 올랐다.
그 때문에 이제는 하급 마정석으로도 스탯이 잘 오르지 않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는 마정석 대신 돈으로 받기 시작해 주머니 사정이 두둑해졌다.
겨우 3일 만에 무려 수백 단위의 돈을 벌어들였으니까.
다른 긍정적인 일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자하르가 한동안 한국에 거주하기로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태운이 실험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매우 많은 금전과 ‘특별한’ 마정석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자하르는 특별한 마정석을 약 200개나 가지고 있다고 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아마 모두 태운의 차지가 될 것이다.
참고로 수많은 디스펠을 하는 임무를 주었던 마정석을 흡수하고 얻은 보상은 바로 마법 파괴 스킬이었다.
마법 파괴(LV.1)[S]
주변의 중급 LV.3 이하의 마법을 전부 파괴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재사용 대기시간이 꽤 길었지만, 성능은 확실했다.
[총 20,000의 마나를 저장합니다.]
처음 상대는 브론즈 A급의 마법 사용자였다.
이름은 신동연.
“경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