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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54화 (154/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61)

    2030년이 저물고 2031년이라는 새로운 해가 다가오기까지 딱 하루 남았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동해로 모여들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겠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젠가 밝은 태양이 떠오를 동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크리스마스를 건너뛰고 해돋이까지 즐기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런 추억팔이는 의미 없는 한탄에 불과했다. 무릇 인간이라면 한층 더 높은 경지, 더 밝은 미래를 꿈꿔야 하는 법.

    비록 동해 바다는 여전히 어두컴컴하고, 소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선박 점검 및 연료와 배터리 보급이 끝났습니다.”

    전고체 배터리가 상용화되면서 차량이나 전철은 대부분 전기화, 선박과 항공기는 연료와 전기를 모두 사용하는 하이브리드형으로 바뀌었다.

    비교적 최근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포항과 울산항의 배들은 대부분 최신 모델이었다. 포항과 울산의 바다 사나이나 해군 출신 남자들을 적당히 징집하면 배를 모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는 어선이나 고속정을 사용한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대대적인 출항 준비를 해.”

    대구의 50보병사단, 포항의 31보병사단, 아울러 울산의 패잔병들을 흡수했다. 거기에 100만이 넘는 민간인들까지 앞다투어 내 수족이 되길 자처하고 있으니 일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풀렸다.

    이들이 새파랗게 젊은 청년 한 명을 구세주라도 되는 양 받드는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했다.

    실제로 구세주가 맞기도 했거니와, 나는 스스로 받들어 모셔도 될 만한 유능한 인재라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거기에 다른 군벌 수괴처럼 무자비한 폭정과 독재를 하지도 않는다.

    실로 이상적인 지도자라고 오해(?)를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1차 랑데뷰 포인트는 부산항으로부터 대략 5km 이상 떨어진 미 해군 7함대 소속 구축함입니다.”

    “설마 미군이 그 난리를 겪을 동안 한국 앞바다에 남아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동감입니다. 게다가 마지막 무전은 명백한 SOS 요청이었습니다. 보아하니 부산에서 이들에게 최소한의 보급 상태만 유지하며 해상 경계를 일임했던 것 같습니다. 쌓인 게 많을 테니 보급만 해 준다면 미 해군 소속 최신예 구축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설령 전투력을 상실했다고 해도 부산 내부 정보만 얻을 수 있다면 충분한 이득입니다.”

    “그건 그래.”

    본격적인 출항을 위해 군인과 민간 작업자들이 함께 협동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이, 나는 도크 인근 테이블 위에 스마트글라스를 펼쳐 놓고 막바지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GPS는 여전히 먹통이라 선박의 위성항법 시스템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대신 중계 타워를 거친 무선 통신은 그럭저럭 잘 작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며칠간 부산과 전면전으로 맞붙는 것을 피하면서 울산항과 포항항을 동시에 돌리며 소극적인 정보 수집에 나섰다.

    우선 이쪽에서 무전은 일체 보내지 않는 대신 모든 무선 채널을 열어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려 했으며, 동시에 나를 포함한 몇몇 바다 사나이들이 고속정을 타고 바닷길을 살피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부산항의 경계가 삼엄하지 않다는 사실과 부산항으로부터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 웬 군함 한 척이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사실 그건 ‘있다’라고 표현하기보다는 그저 부유하고 있을 뿐인 조난선에 가까웠다.

    가까이 접근하자니 침입자로 오해받을까 봐 대략적인 위치와 상태만 확인해 두고 발걸음을 돌렸었다.

    “한국군과 미군은 탄약의 호환성이 높기 때문에 양이 넉넉한 탄약을 조금 넘겨준다면 빚을 지울 수 있을 겁니다.”

    “가장 흔하게 쓰이는 5.56mm 탄과 식료품, 의약품 그리고…… 방한용 의류 정도면 되겠군.”

    “목격 정보상 최신예 구축함으로 추정되니 내부 동력 기관이 소형 핵 원자로일 겁니다. 연료나 배터리는 따로 챙겨주지 않아도 문제없겠지요.”

    나는 부산항에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앞서, 미 해군과 접선하기 위한 매뉴얼과 반드시 챙겨야 할 품목을 즉석으로 만들었다.

    브라보에 비해 알파 소속 중장갑타격대원들은 항상 넉넉한 보급을 받고 타격 작전에 들어가기 때문에, 전장에서 군인들이 정확히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상륙 직전 그리고 상륙 후가 가장 걱정됩니다. 전 부대원이 안전하게 상륙한다면 재빨리 태세를 갖춰서 태풍처럼 휘몰아칠 수 있겠지만…….”

    나는 알파 대원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전쟁 역사상 상륙작전을 입안한 지휘관들은 모두 같은 걱정을 하지 않았을까? 상륙군은 언제나 상륙하기 직전, 상륙하고 난 직후가 가장 취약한 순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다행히 대한민국 해군 함대는 대부분 인천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부산은 따로 군함을 운용하고 있지 않았지만, 마치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 부산항 인근에 자주포와 기관포 진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기관포 진지가 예광탄을 쏴서 눈을 밝혀 주면 자주포들이 대략적인 감으로 때려 맞추듯 포격하는 방위 시스템을 구축해 둔 것이다.

    굉장히 구시대적인 발상이긴 하나, 군함이 없는 이쪽엔 생각 이상으로 치명적일 수 있다.

    “바로 그래서 미 해군과 먼저 접선하려는 거야. 바다에 둥둥 떠 있기만 했을 테니 함포를 쏘는 일은 없었을 거야.”

    미 해군에서 운용하고 있는 155mm 62구경장 스마트포탄은 기본적으로 GPS의 영향을 받지만, GPS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도 대비해 오토락온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무려 포탄이 스스로 착탄 지점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적 구조물이나 장갑차량을 향해 활공하여 그대로 때려 박는, 무지막지한 놈이다. 덕분에 전용 포탄을 만드느라 돈은 더럽게 많이 들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한국은 육군에서 비슷한 스마트 포탄을 개발해서 운용하고 있었지만, 미군과는 달리 GPS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그냥 폭발이 전부인 반병신 포탄이었다.

    ‘그놈의 K-방산비리는 파도 파도 끝이 없네.’

    한숨을 쉬면서도 A 플랜과 B 플랜의 구상도를 겹쳐서 교차 검증에 들어갔다.

    “대구의 KTX에 탑승한 별동대는 부산 군벌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까지 이동한 다음 신호를 보고 움직인다.”

    “반대로 작전 개시 후 1시간 이내에 신호를 받지 못하거나, 먼저 발각당할 경우 즉시 퇴각하는 것으로 정하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한쪽이 실패했으면 다른 한쪽이라도 살아야지.”

    그렇게 되면 내 꿈도 부산 앞바다에서 허무하게 가라앉는 꼴이지만, 나는 기꺼이 도박판에 판돈을 밀어 넣을 자신이 있었다.

    정면 승부로는 본전도 뽑지 못한다면 온갖 꼼수를 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의 밑천까지 탈탈 털어먹어야 한다. 내가 그럴 배짱과 기획력도 없는 놈이었다면 처음부터 일을 이렇게까지 벌리지 않았겠지.

    “화물 적재 완료, 군인 및 승조원 승선 완료! 최종 점검 후 출항 명령 내리시면 됩니다!”

    작업 현황을 실시간으로 보고받고 있던 또 다른 알파 대원 한 명이 이쪽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우리는 스마트글라스를 접고 각자의 장비를 챙겨 들었다.

    “저희는 대구로 돌아가서 곧장 출발하겠습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그래. 빨리빨리 끝내자.”

    지저 도시에서 나온 지 근 5일째 되는 날. 최소한 일주일째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상황을 살피고 싶었다.

    어쩌면 경상도 지역 안정화를 위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어느 한쪽이라도 소홀히 하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진짜 일하지 못해 죽은 백수 귀신이 들러붙었는지 사방에서 밀려드는 일감에 정신이 없다. 문제를 하나 해결하면 금세 두 개가 새로 튀어나오니, 어느덧 숨만 쉬어도 이마가 지끈거리는 느낌이다.

    이번 작전에서 화물선이나 크루저 같은 대형선은 일체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중소형 선박 위주로 죄다 긁어모아서 출항 준비에 나섰다.

    최근 검은 비가 내린 뒤에 평균 기온이 어느 정도 올라간 점, 기본적으로 평균 기온이 높은 남부 지방이라는 점. 그리고 동해 바다 일대에 존재하는 모든 항구가 사실상 부동항(얼지 않는 항구)이라는 점이 이번 작전을 가능케 했다.

    바다의 상태를 살필 겸 바닷길을 익히기 위해 시범 운항까지 해 봤겠다,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중소형 선박으로 구성된 대선단이 항구에서 뛰쳐나와 빙 돌아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부산 군벌에게 들키지 않고 미 해군과 먼저 접선한 뒤, 그들의 조력을 받으며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벌일 계획이다.

    난 만국 공통 상륙작전 총알받이인 해병대가 아니라 수색대 소속이지만, 같은 땅개라는 점이 나의 피를 들끓게 했다.

    가능하다면 먼 미래에 교육부 장관을 매수해서 이 상륙작전을 꼭 교과서에 등재시킬 것이다.

    *    *    *

    “급보입니다! 현재 본함으로부터 북북서 방향에서 일제히 남하를 시도하고 있는 대형 선단을 관측병이 포착, 상대측 선단에서 발광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발광 신호의 내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존 함장은 다급한 기색으로 캐물었다. 오퍼레이터가 움찔하긴 했지만 곧 전달받은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보고했다.

    “본 선단은 대한민국 서울의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중장갑보병대가 대구와 포항, 울산을 무력 점거하여 동원한 선단이다. 귀함의 구조 요청을 받고 보급 및 상륙작전을 속행하기 위해 접선 중이다.”

    “……말도 안 되는군! 얼마 남지 않은 기동함대도 김해 앞바다에 처박혀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마당에, 대체 포항과 울산에서 어떻게 그만한 선단이 튀어나올 수 있단 말인가?!”

    “송구스럽지만 전달받은 내용은 이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답신 내용을 요청하고자…….”

    “내가 직접 가지!”

    부관을 동행한 존 함장은 관측병이 서 있는 탐조등 근처까지 가서 직접 키패드를 조작했다.

    상대가 굳이 단거리 무전이 아니라 발광 신호 같은 번거로운 방식을 이용해서 연락을 취했다는 건 부산 군벌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즉 부산 측에 들키지 않고 이쪽과 몰래 접선하여 보급을 해 주는 대신 다른 무언가를 요구할 작정인 게 뻔히 보였으니, 함장인 그가 직접 교신에 응하는 건 당연했다.

    ―본함은 미 7함대 소속 USS 피니셔다. 무전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도청의 위험이 있다. 본 선단의 추측이 맞다면 귀함은 부산에서 지속적으로 보급을 받아 왔을 것이다. 함 내 보안 상황이 취약해져 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없나?

    존 함장은 잠시 흠칫했지만 곧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김해 앞바다에 자리 잡은 기동함대와 여러 번 접선하거나, 보급이라는 명목으로 외부인의 승선을 허가한 적이 수차례 있기 때문이다.

    이쪽을 바다 한복판에 둥둥 띄워 놓고서 허수아비처럼 부려 먹고 있는 부산 군벌의 악독함을 떠올려 보면 보안 문제를 걱정하는 상대방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본함의 보안 문제를 인정한다. 용건이 무엇인가?

    ―귀함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보급하겠다. 단 최소한의 정비가 끝나는 대로 부산 상륙작전에 도움을 주길 바란다.

    ―통합한 군벌을 이용해 부산을 칠 생각인가?

    ―그렇다.

    ―보급 문제만 해결된다면 포격 지원 및 부산항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여 기관포 사격을 해 줄 수 있다. 또한 김해에서 나오는 전 대한민국 기동함대 소속 소규모 함정들의 접근을 저지해 줄 수 있다.

    ―알았다. 곧 접선하겠다.

    그렇게 탐조등을 이용한 발광 신호까지 완전히 침묵해 버린 양측은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바다 한복판에서 은밀하게 접선했다.

    거친 물살과 살갗을 에는 듯한 겨울 바다의 맹추위에도 한쪽은 드디어 보급다운 보급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른 한쪽은 포격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쌍수를 들고 서로를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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