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53화 (153/211)

딥 인사이드 아웃 (160)

대구, 포항, 울산의 통합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유가 된 민간인들은 기존에 군인들이 사용하고 있던 군수물자를 이용해 스스로 무장하였으며, 자발적인 예비군으로 활동하면서 지역 안정화에 적극 협조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는 일일이 설명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로 간략하게 요약한다.

군인 장교들 상당수가 죽어 나갔으며, 상황 파악도 못 하고 결사 항전을 택한 병사들 역시 상당수 죽어 나갔다.

사실 이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라 31보병사단 군인들은 굉장히 억울할 것이다.

대구가 고작 하루 만에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지도 못했거니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울산을 상대로 파죽지세를 이어 나가고 있었는데 대뜸 본진을 털렸으니까.

울산은 화력과 경험적인 측면에서 31보병사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기에 전멸 직전까지 내몰렸고, 그 31보병사단은 다시 내가 이끄는 예비군에 의해 와해되었다.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던 31보병사단의 힘이 빠진 틈을 타 그들의 보급을 끊고 후방 기습을 가했으니, 사실상 거저먹은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쉽게 이길 수 있었던 거지.’

피비린내와 화약이 진동하는 전장 한복판에 선 나는 한창 전후 처리가 진행되고 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순히 투항한 군인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도심으로 압송된 후, 범죄 여부에 따라 적절한 처분을 받고 내 휘하에 들어올 것이다. 민간인들 입장에선 군인들을 믿을 수가 없으니 내게 넘겨 버리기로 한 것이다.

자신들을 핍박하고 모든 것을 독점하던 절대 갑의 군인들은 믿을 수 없지만, 자신들을 해방해 준 나라면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좋은 현상이다.

‘포로가 된 군인들을 대구로 이송한 다음 재편하면 2개 여단 병력 정도는 확보할 수 있겠어.’

대구와 울산, 포항의 ‘군인’들만 모았을 때 나오는 병력이 2개 여단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대한민국 군대 기준으로 여단급 부대부터 독립적인 작전이 가능한 부대로 취급한다.

비록 50보병사단과 31보병사단 그리고 훈련병과 훈련부사관으로 짬뽕이 된 2개 여단급일지언정 순수한 머릿수는 무시할 수 없다.

다행히 내게는 이들 모두를 무장시킬 수 있는 충분한 무기가 있고, 이들을 운용할 수 있는 물자 또한 확보한 상태다. 게다가 경상남도의 위쪽을 통째로 집어삼켰으니 지리적 이점도 가지고 있다.

지금 당장 김해·부산을 통합해서 지배하고 있는 김선후 중장(참모차장)을 치자니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단기 급속 훈련 커리큘럼부터 짜야겠군.”

질겅질겅 씹고 있던 껌을 퉤 뱉고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을 내뿜고 있는 부산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울산에서 바로 남하하면 부산이지만 지금 쳐들어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안다.

울산과 포항 군벌이 싸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접경지에 방어 병력을 배치시켜 뒀겠지. 우리가 기세를 몰아 쉬지 않고 부산까지 남하하길 기다리고 있을 터.

매복과 기습으로 포항과 울산을 집어삼킨 내가 정작 부산의 매복에 걸려 줄 이유는 없었기에 미련 없이 회군을 택했다.

김해·부산은 모든 것이 완벽한 천혜의 요새다.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북쪽으로는 산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방어에 매우 용이하고, 바다에서 지속적인 어업 활동으로 식량을 확보할 수 있다. 거기에 월성 원전 못지않은 고리 원전이 있으니 도심의 전력 공급에도 차질이 없다.

짜증 나는 점은 김해로 우회해서 치고 들어가자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데다 반드시 강을 넘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고, 울산을 통해 접근하자니 산 인근마다 지상군의 매복이 우려된다.

기껏해야 2개 여단, 그것도 짬뽕이나 다름없는 혼잡한 부대를 이끌고 어떻게 저 천혜의 요새를 공략할 수 있을까?

‘하늘을 날거나 바다로 침투하지 않는 한 어림도 없…… 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포항과 울산에 존재하는 조선소들을 떠올렸다. 포항과 울산 그리고 부산은 전형적인 바다 사나이들의 항구도시다. 직접 배를 만들어 보거나 몰아 본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 터.

‘대한민국 군함은 대부분 인천으로 집결해서 흑연교의 손에 넘어갔지만 일반적인 화물선이나 어선은 동해에 상당수 남아 있을 거다. 여건만 되면 충분히 배를 띄울 수 있어.’

얼마 전에 검은 비가 쏟아져 내리면서 지구와 태양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검은 장막이 아주 살짝 옅어졌고, 그 결과 평균 기온이 조금이지만 올랐다. 그리고 남부 지방은 원래 따뜻하기 때문에 바다가 얼지 않았다.

실제로 서울에선 추위와 눈보라 때문에 개고생을 하던 나도 남부 지방에선 날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이건 해상 침투 각이다.

‘GPS는 여전히 먹통이라 레이더는 의미 없고, 아직도 세상은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열상 감지 장비나 조명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다. 해상 침투 하기 딱 좋은 환경이군.’

실제로 중장갑수색대와 중장갑타격대가 변변찮은 열상 감지 장비도 없는 북한의 연안에 몇 번이나 침투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단기 급속 훈련 커리큘럼을 짤 일도 없어졌으니 승부를 결정짓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    *    *

“보고드립니다. 19시 기준으로 울산 일대를 장악한 신원 불명의 군부대는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월성 원전 인근까지 후퇴했습니다.”

“호오.”

한국 군인에겐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시가를 입에 물고 있던 남자, 육본의 전 2인자이자 지금은 김해와 부산을 통합한 명실상부 군 1인자인 김선후 중장이 눈빛을 번뜩였다.

“상당한 병력이라고 들었는데 결국 남하하지 않은 건가? 그 기세를 몰아 남하했더라면 부산의 머리채를 휘어잡을 수 있었을 텐데.”

“적 지휘관이 꽤나 신중한 타입이 아닐까 합니다.”

“아니, 신중한 놈이라면 애초에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하루 만에 대구를 함락시키고,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휘몰아쳐서 포항과 울산을 이간질, 결국 포항의 후방을 치면서 단번에 3개의 군벌을 끝장냈다. 그런 놈이 정말로 신중한 타입일 것 같나? 로또 1등 당첨보다 낮은 확률에 서슴없이 도박수를 던지는 미친놈이야.”

“하지만 대구와 포항, 울산까지 장악했으면서 부산으로 남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이끄는 새로운 군벌의 한계를 깨달았거나,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군. 새로운 군벌 수장으로 등극한 놈이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십만이 넘는 민간인 노동력과 군사력을 확보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숨 고르기에 들어간다고? 마음만 먹으면 수십만 민간인 중 예비역만 징집해도 군단급 병력은 가볍게 준비할 수 있어.”

대구와 포항, 울산에 쌓여 있는 군수물자를 전부 징발하면 실제로 군단급 병력을 무장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특히 포항은 2개월간 쉬지 않고 공장을 돌렸으니 쌓인 물자가 상당할 것이다.

그에 비해 김해·부산은 지리적으로는 천혜의 요새이긴 하지만 바꿔 말하면 지켜야 할 곳이 너무 많은 고도비만 환자이기도 했다.

김해를 공격받으면 공장을 잃게 되고, 부산을 공격받으면 기껏 안정시킨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이쪽도 군사력을 동원해 막겠지만, 강 대 강 싸움은 언제나 주변 피해가 큰 법이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김해·부산을 정면에서 공격하면 병력 손실이나 인프라 손실이 상당하겠지만, 그래도 이쪽에 유의미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런데도 진격하지 않았다라…….’

김선후 중장은 시가렛 끝을 적당히 잘라 내고 온더락 글라스에 양주를 조금 채워 넣었다.

대구가 먼저 포항과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것과 달리, 김선후 중장은 처음부터 울산과 대구에 정기적으로 프락치를 파견했다.

포항은 울산이라는 방파제가 있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대구와 울산은 김해·부산으로 곧장 찔러 들어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견한 프락치들이 최근에 놀랄 만한 소식을 가지고 복귀했다.

―대구 1일 만에 수방사 예하 소속으로 추정되는 중장갑보병 2개 소대에 의해 기습 허용, 군벌 붕괴. KTX를 운용해 서울에서부터 남하해온 것을 확인.

온더락 글라스에 들어 있는 양주를 살살 흔들어 공기 중으로 술의 풍미를 흩뿌리면서 김선후 중장은 다양한 가능성들을 늘어놓았다.

KTX가 복구되어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수방사 예하 부대나 최전방 부대 소속인 것이 틀림없는 중장갑보병의 존재도 확실하게 확인되었다.

자연스럽게 국군 주도하에 서울 탈환 작전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부정했다.

‘KTX를 이용해 남부 지방으로 파견한 것이 중장갑보병 2개 소대뿐이라는 점, 중장갑보병 2개 소대를 이끄는 인물이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군벌들을 해체시킨 점 그리고 전투에 거침이 없다는 점. 남부 지방의 상황을 모르는 국군사령부나 정부가 내릴 만한 명령이 아니다. 중장갑보병 2개 소대의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봐야겠지. 그렇다는 건 서울역을 포함한 극히 일부 지역만 복구되었다는 뜻이군.’

거기까지 상황을 유추해 보니 김선후 중장은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피식 웃었다.

여전히 정부와 수방사는 지저 도시에 처박혀 있으며, 자신처럼 버려진 어느 들개부대가 병력을 규합해서 서울 어딘가에 거점을 마련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다 우연찮게 KTX를 복구하게 되면서 남부 지방의 상황을 알아볼 겸 내려왔지만, 남부 지방에 형성된 군벌들을 보고 같잖은 오지랖을 부린 것이다.

“웃기는 놈이군.”

“……예?”

“남부 지방의 상황도 모르는 놈이 대뜸 이곳에 나타나서 군벌들을 차례차례 깨부수고 민간인들을 해방하고 있지 않나. 이미 폭삭 망해 버린 세상에 진정한 해방 따윈 없는데도 불구하고.”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우리는 착착 계획을 진행하고 있지.”

자리에서 일어선 김선후 중장은 인트라넷으로 연결된 PC에 때마침 도착한 보고서 파일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멍청한 미군 놈들 덕분에 데이터는 착실하게 쌓이고 있어. 귀찮은 윤리나 도덕성을 따지지 않고 ‘놈들’을 연구한 덕분에, 우리만이 어떻게 이 부자유한 세상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 해답에 도달하기 직전이라고.”

육본에서 함께 도망쳐 나온 준장 계급의 이철희를 향해 김선후 중장은 동네 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이 사태에서 그런 신박한 돌파구를 찾아낼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나 김선후가 아니고서야 절대로 알아내지 못했겠지.”

껄껄 웃어 젖힌 그는 연구소장이 보낸 보고서 파일을 삭제하고 의자 등받이에 육중한 몸을 기댔다.

갑작스럽게 등장해서 앞마당을 미친 듯이 파헤치기 시작한 들개 한 마리가 거슬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김해·부산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부유하고, 군사력 또한 막강하다. 사태 초기에 인천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피난민이 몰린 건 다름 아닌 부산이었으니까.

들개가 어쩌다 운 좋게 무능한 군벌들을 쓸어버린 건 그리 중요치 않다. 앞마당에서 사납게 짖을 뿐인 들개가 튼튼한 벽과 문을 돌파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타 군벌은 대부분 사태 초기에 괴물들에게 시달리며 중요한 장비를 상당수 잃어버렸지만, 김해·부산에는 전차와 장갑차만 해도 단일 화력으로 서울을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다.’

낙동강을 건너오는 것은 고사하고 육로로 인한 침입도 손쉽게 저지당할 터. 자신은 그저 평소처럼 이 끝장난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며 주지육림을 즐기면 그만이다.

그것이 유능하고 강대한 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만전을 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준장, 전 부대에 ‘검은 비’의 보급량을 늘리도록.”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부 병사들은 미약하지만 중독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게 없으면 어떻게 부산을 지킬 수 있겠나? 멋대로 앞마당을 어지럽힌 들개를 쫓아내려면 이쪽도 몽둥이를 들어야 하는 법이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태 초기부터 세상 지천에 널려 있던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에서 고농도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검은 보석의 가치를 찾아낸 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유일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김선후는 온더락 글라스를 다시 한 번 흔들었다. 고급 양주의 부드럽고 알싸한 향이 그의 코를 간질였다.

서울? 까짓거 경상도를 통합하고 나면 놈들이 복구한 KTX를 역이용해 단숨에 침공해서 손에 넣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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