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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24화 (124/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32)

    인천

    나는 잠시 단독 행동으로 돌아가야 할 때임을 인지했다.

    계획을 준비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연장선까지도 생각해 둬야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계획의 연장선을 위해 남몰래 혼자 움직여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김명호에게 두 가지를 요청했다. 하나는 롯데호텔과 서울역에서 관련 직종 기술자와 적당한 인력을 긁어모아 발전소에 배치할 것, 또 다른 하나는 남산타워를 확보할 것.

    시설의 보안 강화는 적당히 강화 철판이나 콘크리트 벽돌을 이용해 시설 외부를 개조하면 그만이지만, 이렇게 중요한 건물은 경비 인력을 상시 배치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거기에 차도식파 인원을 끌어다 쓰자니 이래저래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일손이 부족한 상황. 그것을 군필 대한민국 남성으로 대체하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확실히 적당한 보수를 내걸면 경비직을 맡아 줄 사람들이 제법 될 겁니다. 안 그래도 세상이 이 지경이라 제 몫의 물자를 구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그에 비해 시설 경비는 꿀직장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예, 그러니까 적당히 사람들을 구해 보죠. 하지만 완전히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으니까 차도식파에서 뽑은 인원들을 주기적으로 교체하면서 배치해 두죠.”

    “일종의 감독 역입니까?”

    “경비직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딴마음 품으면 안 되잖아요? 무엇보다 남산타워를 확보하기만 한다면 장거리 통신도 가능해질 테니 주기적인 보고를 받을 수도 있어요.”

    만약 주기적인 보고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발전소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의미이니 즉각 출동해서 처리하면 된다. 한 번에 두 마리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시설 운용법이다.

    “그럼 저희가 남산타워로 출발하기 전에 서울역과 롯데호텔에 들러서 발전소와 남산타워 경비직 모집 공고를 걸어 두겠습니다. 그런데 모집 인원은 대략 몇 명 정도로 생각해 두신 겁니까?”

    “발전소는 못해도 50명 이상, 남산타워는 20명 정도로 하죠.”

    “저희 쪽에서 단가를 후려친다고 해도 고정 지출이 생기는 건 조금 뼈아프군요. 이 건은 지저 도시에 돌아가서 도식이 형님께도 따로 보고하겠습니다.”

    “지상의 물자와 정보, 사람까지 곧 우리가 쓸어 담게 될 테니 그 정도 지출은 감안하라고 전해 주세요.”

    할 말을 끝마친 나는 스마트글라스 지도를 접어서 품속에 갈무리하고, 다시 장비를 챙겨 들었다.

    발전소를 성공적으로 재가동시켰고, 서울역과 롯데호텔이 위치한 지역에 시험 삼아 전력을 공급해 봤더니 성공했다. 정수 처리 시설도 머지않아 재가동될 테니 내가 하나하나 지휘하지 않아도 당분간은 문제없겠지.

    “저희 중 일부는 당분간 이곳을 지키며 서울역과 롯데호텔에서 사람부터 모을 생각입니다만, 한성 씨는 어쩌실 겁니까?”

    그는 내가 장비를 챙길 때부터 다시 단독 행동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딱히 알려 주지 못할 것도 없어서 지나가듯이 툭 던졌다.

    “제가 빚을 진 게 있어서 기업의 ‘사소한’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입장이거든요. 저도 그쪽 일이 끝나는 대로 지저 도시에 자가 복귀 할 테니, 명호 씨도 애들 데리고 남산타워 확보한 뒤 복귀하시면 돼요.”

    “이번 지상 작전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이미 지저 도시에 필요한 물자는 충분히 확보했으니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작전 중에 물자가 더 필요하다면 서울역에서 공수하세요. 내가 따로 확보한 물자가 아직 그쪽에 많이 남아 있으니까 내 이름 대고 내달라고 하면 내줄 거예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따뜻한 난방 설비가 가동되어서 안쪽은 시설 내부는 굉장히 따뜻했지만, 다시 칼날처럼 전신을 후벼 파는 추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따스함 속에 너무 익숙해져 있으면 냉혹함 앞에서 버틸 수 없기에, 나는 군말 없이 방한복과 머플러를 몸에 둘렀다. 마지막으로 방한 고글과 마스크까지 착용하니 몸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체스 기사는 체스판 위에서 말이 움직이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몇 수 앞을 내다보기 마련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으니까. 상대를 짓밟고 위로 올라갈 수 없으니까.

    자신의 뇌에 부하가 온다는 걸 알면서도 체스 말 하나를 신중하게 옮기고, 그 찰나의 순간에도 갖가지 계책을 마련한다.

    나는 서울과 지저 도시라는 2개의 체스 판을 바쁘게 오가며 쉴 새 없이 말들을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은 체스 기사인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

    짓밟고 올라가야 할 상대도 많고, 거머쥐어야 할 보수(황금)도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다.

    자신은 그저 말을 움직이게 하는 책사에 불과하다며 방관자이길 자처하는 멍청한 사람들과 달리, 나는 언제든지 자기 자신을 말로 활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보수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어 보지 않은 놈들이 뭘 알겠느냐마는.

    “시설에서 빨리 나오길 잘했네.”

    후끈하게 달아올랐던 열기가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팍 식어 버렸다. 아마 ‘조금만 더’ 하면서 계속 뭉그적대고 있었다면 이 추위에 더 큰 반동을 느꼈을 것이다.

    추위와 어둠 속에서 혼자 움직이는 건 익숙했다.

    처음 땅굴에 기어 들어갈 때는 언제나 분대원들과 함께였지만, 막상 땅굴에서 기어 나올 때는 언제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어둠과 추위를 기억하고 있었다. 고독함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 허무감.

    공허 속에 홀로 남겨졌을 때의 그 기분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빛을 갈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나는 땅굴의 어둠 속이 아니라, 지상의 햇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니까.

    스마트폰으로 지도 어플을 켜서 확인해 보니 목적지는 이곳에서 제법 멀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더럽게 멀었다.

    “설마 나한테 인천항에서 화물 하나를 가져와 달라고 할 줄이야.”

    아니, 물론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유일한 전력수도복합발전소를 확보하게 도와줬으니 미래그룹에게는 큰 빚을 진 것이 맞다.

    하지만 지상의 정확한 상황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인천행을 명령할 것이라곤 나도 예상 못 했던 일이다. 거기서 한술 더 떠 화물까지 빼내 오라니.

    침투, 공작, 정보 수집에 최적화된 중장갑수색대 출신이란 걸 알고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로 중요한 화물이라서 내게 맡긴 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배낭 안에 들어 있는 고효율 배터리팩의 무게를 느끼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상에 있는 차량이나 바이크는 대부분 추위 때문에 방전되었을 테니, 아예 전기차를 찾아서 운용하랍시고 하나 받아 왔던 것이다.

    반포동 아파트단지 지하 주차장을 대충 뒤져 보니 전기차와 바이크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교체할 배터리팩도 있고, 운전도 할 줄 안다.

    유일한 고민은 차량을 타고 신속하게 움직일지, 바이크를 타고 은밀하게 움직일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강북 지역이야 차도식파와 서울역, 롯데호텔 패거리가 대부분 도로 정리를 했기 때문에 차량을 타고 다녀도 문제없지만, 강남 지역은 꽉 막힌 도로 천지일 것이다.

    차량을 타면 추위와 적의 기습으로부터 안전하겠지만 소음과 부피 때문에 반대로 적에게 발각당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막힌 도로를 빙빙 돌아 우회하는 것이 강제되는 건 덤이고.

    반대로 바이크를 타면 추위와 적의 기습에 굉장히 취약해지겠지만, 소음과 부피를 최소화하면서 비교적 편하게 질주할 수 있다. 꽉 막힌 도로도 바이크 정도면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으니까.

    “박씨 가문의 위대한 선조님들 제게 도움을 주세요……!”

    동전 하나를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전기 차, 뒷면이 나오면 전기 바이크를 타기로 결심하고 동전을 던졌다.

    조상님들은 이 잘난 후손을 위해 올바른 답을 제시해 주실 거야! 왜냐하면 내가 잘난 것이 곧 조상님들이 잘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떨어진 동전은 놀랍게도 뒷면이었다.

    고생 좀 하는 대신 완벽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조상님들의 위대한 선택이 지금 막 내 운명을 결정지은 것이다.

    “사실 저도 바이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상님들. 후손이 더 잘난 거 아시죠?”

    전기 바이크의 배터리팩을 교체하고, 바이크에 탑승하자 묵직한 승차감이 나를 반겨 주었다. 역시 사람은 스쿠터가 아니라 바이크를 타야 폼이 산다는 걸 새삼 다시 한 번 느꼈다.

    “아아, 이것은 미래테크의 기술력이 들어간 고효율 배터리팩이다. 성능이 구린 바이크에 날개를 달아 주지.”

    한 번 충전하면 무려 재충전 없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수 있다는 전기 바이크 전용 고효율 배터리팩이다. 인간으로 치면 한 알만 먹어도 일주일 내내 배부른 미래형 영양 캡슐을 처박은 셈이다.

    다행히 오랫동안 지하에 처박혀 있기만 했을 뿐이라 배터리가 방전된 게 전부였던 바이크는 성공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야투경으로 전방을 주시하면 되기 때문에 쓸데없이 밝기만 한 헤드라이트는 꺼 버렸다.

    최신예 기술의 정수를 마음껏 누리면서 지하 주차장을 박차고 나온 순간, 폭풍처럼 불어닥치는 한파에 나는 박씨 가문 일대를 저주했다.

    *    *    *

    “이번에 밀수꾼에게 일 하나를 맡겼다지?”

    “예, 아버지.”

    “그 밀수꾼이 박한화의 아들이란 건 알고 맡긴 게냐?”

    “예,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집안과는 엮이지 않는 게 좋다고 그리도 당부했거늘…….”

    “박한화와 박한성은 미묘하게 닮은 것 같으면서도 서로 극과 극을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지나치게 유능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과정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 닮았지만, 서로 추구하는 바가 명확하게 다릅니다.”

    “그놈이 제 아비에게 속아 디그러쉬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이번 일을 맡긴 겁니다. 은원 관계를 확실히 하는 박한성이라면 우리가 내준 만큼 일 처리는 확실하게 할 겁니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아버지 말씀대로 박한화의 끄나풀이었다는 결론이 되는 겁니다.”

    백발에 주름진 얼굴을 가지고 있는 노인은 비록 세월의 풍파를 이겨 내지 못한 것처럼 보였으나, 날카로운 안광만큼은 아직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흉흉했다.

    그가 바로 미래그룹의 지배자이자 디그러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남자, 이진혁 본부장의 아버지이자 대한민국 재계의 거인이라 불리는 이진호 총수였다.

    “하필 그날 일이 터지는 바람에 인천항에서 미처 챙겨 오지 못한 물건입니다. 이제라도 챙겨 올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그것이 디그러쉬에 흘러 들어가기라도 하면 우린 또 하나의 패를 잃는 거다. 지저 도시 프로젝트의 알맹이를 빼앗겼던 것처럼!”

    “저 역시 기업인이기에 인생에 승부수를 던져야 할 시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시기가 지금 찾아왔고, 따라서 승부수를 던진 것뿐입니다.”

    이진호의 노성에도 이진혁이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대한민국 재계를 휘어잡고 있는 미래그룹 총수 앞에서 그 어떤 인물이 이리도 대범하고 멀쩡하게 버틸 수 있겠는가. 호랑이 아래에선 역시 호랑이가 나오는 법이라고 총수의 측근이 생각했다.

    “그래, 네 승부수가 성공한다면 우리에게 큰 이득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일을 두고 설레발을 치는 것도 뭣하니 그 부분은 이만 넘어가겠다. 디그러쉬의 지저 도시 외부 탐사 프로젝트에 대해선 얼마나 알아보고, 또 대처했느냐?”

    “로봇견, 통칭 도지의 성능 및 AI 개선 작업이 발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머지않아 하늘의 드론에도 지지 않는 지상의 로봇견이 등장할 겁니다. 그리고 디그러쉬의 수상쩍은 외부 탐사 프로젝트에는 이미 저희 측 정보원들을 다수 심어 두었습니다. 탐사대가 얼마 전에 출발했으니, 정보 수집에는 차질이 없을 겁니다.”

    “클클…… 그 미치광이 놈들이 대체 이 한반도 아래에서 뭘 그리도 열심히 찾고 있는 건지.”

    “인류 문명의 발전이 아닌, 기술의 발전에만 미쳐 있는 집단입니다. 아마 이번에 찾고 있는 것도 디그러쉬의 기술 발전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말대로, 디그러쉬는 전 인류에게 다양한 기술을 보급했지만 그 사용 범위는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땅굴을 안전하게 파고, 안전한 건물을 짓고, 그에 필요한 새로운 금속 제련법을 확보하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이들이 땅굴을 파게 만들었다.

    본래 드넓은 우주로 도약할 예정이었던 인류는 유인 달 탐사에 성공하고, 복합형 거대 우주 공항을 건설한 뒤로 더 이상 우주에 미련을 갖지 않게 되었다.

    화성 탐사에 대한 논란이 잠시 불길처럼 번졌지만, 그조차도 지저 도시 프로젝트에 금세 밀려 버렸다.

    인류는 우주로 도약하는 대신 땅굴로 파고드는 것을 택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디그러쉬에 의해서.

    한동안 깊게 우려낸 차의 향을 음미하던 이진호는 꽤 충격적인 정보를 무덤덤하게 털어놓았다.

    “저들끼리 ‘무명’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이 도시에도 한 명 들어온 것이 확인되었다.”

    “지저 도시마다 최소 한 명씩은 배치되었다던 디그러쉬의 실질적 지배자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좀처럼 놈에 대한 정보를 캐낼 수가 없더군. 정치권에 있는 연줄을 죄다 동원해 봤지만 그 존재가 이곳에 있다는 걸 확인한 것이 전부였다.”

    미래그룹 총수조차 그 존재의 유무를 파악하는 것이 고작인 존재.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높은 가치를 자랑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약 네가 거래하고 있는 그 밀수꾼이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다음번은 그 ‘무명’을 타깃으로 잡아 주도록 해라.”

    “박한성은 그에 걸맞은 대가를 약속하지 않으면 일하지 않을 겁니다. 박한화가 미래의 보수를 생각하며 분골쇄신하는 타입이라면, 그는 눈앞의 보수를 위해 분골쇄신하는 타입입니다.”

    “오히려 욕망이 확실한 놈일수록 일 처리도 깔끔한 편이지. 그렇다면 충분한 대가를 주는 것도 아깝지 않다. 설령 미래그룹의 기둥을 뽑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이진혁 또한 ‘무명’에 대한 것이 궁금했기에, 내심 박한성에게 맡긴 화물 운송 작전이 성공하길 바랐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중장갑수색대의 마지막 일원이라고 했던가. 미래그룹의 기둥을 뽑아 갈 만한 가치를 증명해 보였으면 좋겠군.”

    이진호는 머지않아 자신 앞에 유능하면서도 뱀 같은 아들이 아닌, 진짜 호랑이가 협상을 위해 앉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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