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97화 (97/211)
  • 엘리트(3)

    중장갑수색대가 일을 끝마치면 언제나 뒷처리를 했던, 필요하면 해당 지역에 즉각적인 화력지원까지 해주었던 중장갑타격대를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나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미리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렇게 이목을 받고 있으니 꼭 청문회에 불려나온 기분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추리나 해볼까. 사태가 터지자마자 정부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알고 즉시 최전방에 있는 부대들을 순회하면서 중장갑보병들 규합하고 서울로 내려왔겠지. 그 과정에서 반발하는 부사관이나 장교, 장성 계급은 모조리 제압했거나...죽였을 것 같고."

    "이럴 때 감탄사로 '브라보'라고 하면 웃어줄 거냐?"

    "그건 내 '알 파' 아냐."

    방금 웃은 새끼는 앞으로 나오시오.

    "브라보(중장갑수색대)는 내가 전역한 것을 마지막으로 해체했는데, 알파(중장갑타격대)는 지금까지 남아있었던 모양이지?"

    "정확히는 우리도 올해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지. 실제로 우리가 마지막 기수였으니까. 그러던 중에 흑야 사태가 터졌고, 네 추리대로 주변 부대를 순회하던 중에 장성 계급중 하나 잡아서 족쳐보니 이런 정보가 나오더라고. 기존의 중장갑타격대를 해체해서 수방사 예하로 재편하고 지저 도시에 집어넣을 계획이었다고."

    하지만 알파는 아직 해체되지 않았고, 수방사 예하로 재편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저 도시에 입주할 수 없었다.

    아마도 정부는 지저 도시에서 제 2의 삶을 시작하는 김에, 지상에 남겨두었던 찝찝한 중장갑수색대와 타격대에 대한 문제가 알아서 사라지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탈세를 비롯한 온갖 범죄에 연루된 기업인과 그 친인척들도 지저 도시에 입주하면서 면죄부를 받았으니, 정부도 지상에서 저지른 일에 대한 면죄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우리의 상급자는 대통령, 혹은 유사시에 대통령 권한대행 뿐이지만 흑야 사태가 발발하면서 둘 다 사라졌다. 그러니까 상급자 없이 멋대로 하고 있다, 이런 거냐?"

    "멋대로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라고 말해야지."

    내 비아냥을 대놓고 꼬집는 옆자리의 이름모를 병신에게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주었다.

    내가 궁극적으로 중장갑타격대에 들어가지 않고 중장갑수색대에 합류한 이유는 비단 심사관들의 평가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놈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엘리트 정신이 묘하게 거슬려서, 꼭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서 중장갑타격대에 들어가길 거부했다.

    오죽하면 심리상담에선 다른 천애고아 출신들과 비슷한 처지처럼 보이게끔 가족들과는 완전히 연을 끊었으며, 현재는 혼자 살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덕분에 나는 박한화의 아들이었음에도 천애고아나 사정이 어려운 후보들과 함께 중장갑수색대에 편입되었다.

    브라보는 항상 알파보다 앞서나간다는 구호도 이 엘리트 주의에 절어있는 놈들을 비꼬기 위한 구호였다.

    딱히 이들과 원한을 산 건 아니지만, 그냥 성격적으로 맞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싫어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래그래. 잘나신 알파들끼리 서울역을 떡하니 차지하고, 어찌어찌 잘 굴려먹고 있는 것 같으니까 내가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네. 그럼 이대로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즐기면 되지, 왜 애먼 사람을 잡아오고 난리들이야?"

    "이런 시대에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잖아? 브라보 원을 알파로 편입시킨다, 그림도 좋고 실제로 효율도 좋은 일인데 안 하는 게 이상하지."

    여유롭게 사제 담배를 피고 있는 이곳의 우두머리, 알파 원이 그리 말하자 다른 알파들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자신들의 앞기수에게 나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모양인데, 유감스럽지만 나는 더이상 군에 관여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알파고 브라보고 지랄이고 나는 그냥 지저 도시와 지상을 오가며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게 목표였다.

    더이상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섰을 때, 비로소 나를 억압하고 있던 모든 통제와 부자유로부터 해방될 테니까.

    한 마디로 여기서 소꿉놀이나 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는 의미다.

    "앞서 말했지만 브라보는 이미 해체됐어. 너희들이 원하는 브라보 원도 없고. 난 그냥 일개 밀수범일 뿐이야."

    "그 일개 밀수범이라는 작자가 흑연교와 대판 싸워서 연달아 승리하고, 지상에 자신만의 거점을 하나둘씩 구축하고, 머릿속에는 누구도 모르는 '진실'을 품고 있나?"

    나는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뽑아들까 하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아마 세 명 정도 머리를 날렸을 즈음에 내 머리도 날아갈 거다.

    "우리도 조사 많이 했어. 지난 한달 동안 국정원과 관련된 시설을 비롯해서 청와대까지 이 잡듯이 뒤졌거든."

    "그래서 경복궁역 주변이 어수선했구만."

    "그것도 우리가 한차례 '정리'한 거야. 우리가 나서기 전엔 서울 중구와 중량구에 괴물들이 득시글거렸으니까."

    "확실히 중량구와 중구에는 나이트워커가 많았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수가 적었지."

    "...작명 센스 존나 구리네."

    죽일까 마스터?

    안 돼 참아 내 안의 박한성.

    나의 신들린 작명 센스를 모욕한 알파 원, 최진석 병장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 당장 답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까 네 방식대로 가자고. 네가 롯데호텔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와도 일 하나 진행해줬으면 해. 먼저 우리랑 함께 해보고, 그 다음에 합류를 거절할지 말지 결정해도 늦지 않으니까."

    "보상은?"

    이놈들과 함께 하는 건 싫지만 일 하나 같이 하자고 하니 그에 준하는 대가도 준비되어 있겠지.

    최진석은 씨익 웃으며 내가 사진 한 장을 넘겼다.

    사진 속에는 63빌딩이 있었다.

    "이곳의 지하에 보관되어 있는 물자들중 통크게 30%를 떼주지."

    "에누리 없이?"

    "에누리 없이."

    나는 문득 에누리를 논하기 전에, 63빌딩에 대체 뭐가 있길래 알파들이 눈독을 들이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알기로 63빌딩에는 옥상에 최신예 기상관측설비를 제외하면 특별할 건 없는 것 같은데 굳이 여길 노리는 이유가 있냐?"

    "지난 한달 동안 안전하게 보관된 물자들이 한가득 쌓여있지."

    "한달 동안 안전하게 보관되어있다고 말하는 근거는?"

    "63빌딩 소유주인 모 그룹 CEO가 지저 도시로 입주하기 전에 내부 인원을 모두 빼내고 긴급 재난 대피 시스템을 작동시켰다더군. 창문과 입구마다 방호벽이 내려오는 서울역과 비슷한 방호 시스템인데, 63빌딩을 남주긴 아까웠던 모양이야."

    "정작 본인은 훨씬 더 안전한 지저 도시로 입주하게 되었으니 훗날의 보험 삼아 방호 시스템을 작동시켜서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만 해뒀다?"

    최진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미래 그룹도 본사의 서버에 보관된 기밀 자료나 시제품을 도둑맞지 않도록 도난 방지 시스템을 작동시켜두고 지저 도시에 내려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있는 사람들이 더한다고, 지상에 남겨질 본인들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꼼꼼하게 뒤처리까지 한다는 점이 참 대단했다.

    "그런데 방호 시스템이 작동한 상태에서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다면, 다시 전력을 공급하지 않는 이상 문을 열고 닫는 건 불가능할 텐데?"

    "잠긴 문이나 격벽을 뚫고 침투해서 내부를 조사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네 전문이잖아. 브라보 원."

    "......"

    그렇기는 하지. 정확히는 그랬었지.

    "그러니까 나더러 너희 애들 몇 명 데리고 가서 방호 시스템을 뚫고 빌딩 내부를 조사해서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물자들을 확보해달라?"

    "이해가 빠르네. 가능하겠지?"

    "미친 놈인가? 당연히 안 되지."

    내가 대놓고 어깃장을 놓자 최진석은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게 필요한 것을 요구해보라고 했다.

    "일단 두터운 방호 시스템, 그러니까 방호벽을 뚫을 만한 폭약이나 설비가 필요해. 당연히 63빌딩 인근은 너희 구역이 아니니까 청소도 안 되어있을 테고, 소음에 몰려드는 나이트워커들이 많겠지. 그거 다 감당하려면 최소 1개 중대 화력은 필요한데, 그렇게 치고박고 싸우면 더 많은 놈들이 몰려오겠지? 거기서 화력 부족의 딜레마에 빠지는 거라고."

    중간에 또 작명 센스가 구리다는 불평을 들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63빌딩 공략이 어째서 불가능한지를 설명했다.

    롯데호텔 공방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주변에 나이트워커들의 수가 적거나, 누군가가 나이트워커의 이목을 일부러 끌어주고 있다면 모를까.

    63빌딩 인근에서 그런 미친 짓을 벌였다간 순식간에 개미 떼처럼 불어난 놈들에게 둘러싸여 몰살당할 것이다. 장애물이 많고 복잡한 시가지일수록 기동성이 떨어지는 중장갑보병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최진석은 그조차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알파들도 그와 같은 생각인듯, 오히려 그게 무슨 대수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어도 화력면에서 우리가 밀릴 것 같지는 않은데."

    "중장갑보병들이 단체로 움직이는 시점에서 작전의 은밀성이 떨어진다니까. 이 근방은 너희가 이미 정리를 끝내둬서 망정이지, 당장 원효대고 타고 넘어가면 거기에 뭐가 얼마나 있을 줄 알고?"

    중장갑타격대와 중장갑보병의 화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대단해서 시가지를 지옥불바다로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소음이 커지고, 주변이 밝아질수록 더 많은 나이트워커들이 몰려든다는 거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에 탄약은 무한정 하지 않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총열이 결국 녹아내리면? 총을 너무 쏜 탓에 고장나버리면? 엑소스켈레톤의 배터리가 방전되면? 동료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빈 자리를 메꿔야 한다면?

    온갖 변수들이 앞길을 막을 텐데 그걸 무식하게 화력으로만 뚫겠다는 건가? 중장갑타격대가 원래 이런 놈들이었나?

    "63빌딩을 공략하려면 최소한 주변 정리라도 끝마치고 공략을 논해. 지금은 아무리 화력이 좋아도 거길 공략하는 건 너무 위험......."

    "그럼 40%. 이정도면 할 마음이 들겠지?"

    탕!

    나는 책상을 두들기며 벌떡 일어섰다.

    "아 글쎄 위험해서 안 된다니까!"

    "50%."

    "에누리 없이?"

    "에누리 없이."

    "콜."

    나는 최진석과 손을 맞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누가 이 광경을 사진으로 찍고 '격한 논쟁 끝에 극적인 협상 타결!' 같은 제목으로 뉴스 기사좀 뽑아주면 좋을 텐데.

    웃어 박한성. 넌 지금 국위선양을 하는 거야.

    * * *

    "대모(大母)님. 필두사제의 이정춘이 이곳에 도달하기 전에 승천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빛을 갈구하는 자인가요?"

    "내부자의 공작 덕분에 그의 체내에는 단시간에 고농도의 오염이 축적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싸우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전투를 끝마치자마자 호텔 안으로 돌아가 30시간 가까이 두문분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자들이군요."

    대모는 자신의 팔에 감긴 신성한 검은 붕대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그날, 롯데백화점 노원점에서 빛을 갈구하는 자에게 세상의 진실을 알리고 흑연의 정수를 주입해서 형제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혐오, 그리고 모독이었다.

    그는 권총을 난사해 형제자매들을 하나둘씩 불명예스럽게 처단했으며, 뜻을 함께 하는 자들에게도 총칼을 휘두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때 불쌍한 형제를 꿰뚫고 날아든 탄환 파편이 그녀의 팔에 상처를 내면서 체내의 정수에 일부 손상을 입혔다.

    체내의 정수가 손상을 입는 다는 건 마치 본인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흑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특수한 정수를 먹인 붕대로 상처를 감아둔 상태다.

    만약 제때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거나, 더 심각한 손상을 입었더라면 대모는 더이상 대모가 아니게 되었으리라.

    "지저 도시에 잠입한 형제단에게도 거사를 실패했다는 비보를 전해받았습니다. 더이상 지저 도시의 전력 공급을 차단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온통 슬픈 소식들 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의지를 굳건히 다졌다.

    "태초에 전능자께서는 지상의 죄인들을 벌하기 위해 그들을 쓸어버릴 홍수를 일으켰답니다."

    "그것은 창세록의......"

    "실제로 성공했지요. 지하로 숨어들어간 극히 일부의 죄인들을 제외하면 지상은 깨끗하게 정화되었으니. 홍수 또한 죄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 지하로 흘러내려갔습니다. 그렇게 원죄를 짊어진 죄인들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지요."

    하지만 새롭게 탄생한 인류는 또 한 번 원죄를 짊어지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다시 한 번 '대홍수'가 일어나야 합니다. 죄인들을 모조리 벌하는 대홍수가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뒤덮으면, 비로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겠지요."

    "...차질없이 진행하겠습니다."

    필두사제가 어둠 속에서 물러가자 대모는 부드럽게 자신의 팔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기억'은 대체 몇 억년이나 된 것일까.

    작가의 말

    중장갑수색대의 구호가 ‘브라보는 항상 알파보다 앞서나간다’고 바뀌게 된 것은 주인공 덕분입니다. 실제로 중장갑수색대는 중장갑타격대보다 상대적으로 못난 사람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작중에 나왔듯이 대통령은 끊임없이 고기방패(중장갑수색대)들을 작전에 투입시키면서 많은 희생을 치렀고, 그렇지 않고 정해진 위치만 사후처리하듯 타격하는 중장갑타격대는 중장갑수색대와 달리 엘리트 집단이라는 고정관념 같은 것이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을 많이 희생시켰던 만큼 엑소스켈레톤도 많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작중 대한민국은 예산때문에 허리가 휠 것 같아도 군용 엑소스켈레톤을 억지로 많이 만든 것입니다.

    (전부 작중에 직, 간접적으로 나온 내용들이지만 독자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부가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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