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79화 (79/211)

지저에서 독식(1)

지저 도시 입주 20일째. 6회째 지상 작전 종료.

대다수의 밀수조직이 엄청난 폭설로 인해 당일 복귀가 어려웠는지, 나와 도구봉파처럼 일단 어딘가에서 하루를 보낸 뒤에 복귀하는 길을 택한 듯 했다.

덕분에 20일 정오, 예외적으로 한 번 더 격벽을 열어준 군인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밀수조직들을 서둘러 안으로 들여보냈다.

갑작스러운 폭설로 인해 대다수의 밀수조직이 우리처럼 이번 지상작전에서 난항을 겪은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도구봉파만큼이나 다른 밀수조직도 부상자가 많거나, 미복귀자가 제법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악착같이 물자를 찾아서 가져온 것 만큼은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멸망한 세상의 폭설조차 인간의 끝없는 탐욕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고 순수하게 감탄해야 할까.

격벽 안으로 무사히 들어온 나는 도구봉파에게 내 몫의 물자는 차도식파에게 보내두라는 말을 남긴 뒤 그들과 헤어졌다.

상도 아재 말마따나 밀수범은 어딜 어떻게봐도 신용따윈 없을 것 같은 범죄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이 없으면 해먹을 수 없는 직업(?)이다.

그 법칙을 모를리 없는 도구봉파의 에이스 정원석이 내 몫을 떼먹을 거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떼먹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이후에는 상도덕이고 나발이고 거리낌없이 그를 짓밟을 명분이 될 테니까.

잠깐이지만 나와 함께 사선을 넘나들면서,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옆에서 보고 배운 도구봉파는 막상 헤어질 때가 되자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땀내나는 남자들의 아쉬움따위를 받아봐야 무엇에 쓰겠느냐마는.

"아, 오셨습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기 직전, 군 부대에 뇌물로 넘길 소량의 사치품과 우선 입찰로 넘길 물자의 양을 체크하고 있던 김명호가 내게 인사했다.

어제와 오늘, 제대로 고생한 우리와는 달리, 차도식파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지상작전을 안정적으로 마무리한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으니 당연하겠지만, 역시 노원역이라는 안정적인 교두보도 제대로 한몫한 듯 했다.

"물자가 상당한데요. 노원역에서 재미좀 봤던 모양이죠?"

내가 그리 묻자 김명호는 피식 웃으며 내게 물자 품목이 적힌 서류를 건네주었다.

품목 대다수는 당장 지저 도시에 필요한 생필품과 식료품, 그리고 의약품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번에는 의외로 사치품 비율이 적었는데,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먹고살기 바쁜 서민들은 사치품 따위 눈독들이지 않는다. 남부 지구나 동부 지구, 중앙 지구의 돈 많고 권력도 쩌는 상류층이라면 모를까, 지저 도시의 인구 비율 9할을 자랑하는 서민들에게 사치품은 문자 그대로 사치였다.

해서, 뇌물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사치품은 자연스럽게 물자 확보에서 우선 순위 바깥으로 밀려난다. 나처럼 높으신 분들에게 기름칠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면 제값주고 팔기 힘들기 때문이다.

비싼 사치품이라도 싹 긁어모아서 지저 도시의 부자들에게 마구 흩뿌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우리가 밀수범들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대규모 자금 거래 정황, 혹은 지저 도시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사치품들이 시중에 계속 풀리고 있다는 첩보, 두 정보가 윗대가리 귀에 들어가는 순간 문제가 심각해지는 거다.

그래서 나또한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물건을 뇌물에만 써먹고 있는 것이고.

"노원역에서 군인과 소수의 민간인으로 구성된 생존자 집단을 만났습니다. 한성 씨 말대로 순수하게 생존이 목적인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거래 대상이 될 수 있는 저희를 상대로 상당히 친절했습니다."

"저 가혹한 바깥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정보와 물자, 무력을 두루 갖춰야 하니까요."

노원역 입장에서 보면 바깥에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무력 집단 겸 상인 집단인 우리는 상당히 좋은 물주들이다.

잠자리를 제공하거나, 어느정도 편의를 봐주기만 해도 불로소득을 취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거래를 할 수 있다. 혹은 제 3의 세력과 중간에서 거래를 주선시켜주는 것도 가능하겠지.

노원역은 그저 오고가는 사람이 많아지기만 해도 알아서 무럭무럭 자라는 우량주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 말고도 노원역에 접근한 다른 세력이나 소수의 생존자 그룹이 있던가요?"

"예. 남양주와 의정부에서 서울로 건너온 집단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소규모 군 부대도 있었기에 타 지역의 정보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난동을 부리거나, 군대의 계급이나 무력을 앞세워 노원역을 무단 점거하려는 집단은요?"

"그럴 기미가 보이는 자들이 몇몇 있었기에 저희가 남몰래 처리했습니다. 지상작전을 나갈 때마다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그런 불순분자가 있는지, 혹은 타 세력이 노원역을 노리고 있는지 감시해야할 것 같습니다."

"노원역이 무력으로 위협받지 않는 위치까지 올라서려면 당분간 뒤를 봐주긴 해야겠죠."

물자 품목을 모두 확인한 나는 다시 그것을 김명호에게 돌려주고, 조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 좌석에 착석했다.

대량의 물자와 사람을 싣고도 12km 통로를 어렵잖게 오갈 수 있는 이 초대형 엘리베이터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고생시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충분히 높은 위치에 올라섰을 때 다시 한 번 고민하면 될 일이다.

나는 아직 충분히 높지도 않고, 고민을 할만한 여유도 없다.

'1시간 12분.'

그렇게 타이머가 맞춰져 있는 내 디지털 시계는 그대로 고장이 나버렸다. 내려가면 다른 시계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1시간 12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천천히 기억을 곱씹었다.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1시간 12분은 내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만큼 많은 시간이 아니니까. 일부 공백이 존재하는 기억 속의 1시간 12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1시간 12분이라는 시간이 아니다. 1시간 12분을 보낸 장소와 그곳에서 내가 했던 일, 그리고 목적이지.

하지만 이 기억속의 공백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분명 나는 이것을 '공백'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내 뇌는 아무런 문제없다고만 말하는 느낌이다.

마치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코흘리개 시절의 기억을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뇌가 문제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기억의 공백이었다.

'솔직히 공백을 메꿔야할 필요성조차 못 느끼겠어.'

그럴 의지가 없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흥미가 없기 때문인가? 어느쪽이든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오히려 이미 떠나보낸 과거의 기억따위에 굳이 얽메이는 인간이 바보같은 거니까.

고장난 손목 시계를 풀어 주머니 속에 넣은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며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나는 여느때처럼 주변의 소리를 잠시 지우고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복기한다.

'이번 작전에선 불가피한 일들이 너무 많았어. 사전 정보 없이 필드(현장)에 나간 내 잘못도 있지만, 자기대처 능력이 생각보다 형편없었다.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생각만큼 잘하지 못 했어.'

도구봉파와 접촉했던 아파트 단지의 대대급 군 부대에 대한 정보 수집 및 파악이 늦었고, 그들의 배신 의도를 도구봉파에게 좀 더 빨리 알리지 못 했으며, 아마도 새로운 타입일 것으로 추정되는 거미형 나이트워치에 대한 대처도 많이 부족했다.

'아파트에선 일단 도망치고 숨기보단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야 했어. 당시 내 무장 능력은 출중했고, 지상의 도구봉파가 어그로 담당이었기 때문에 내게 놈들의 어그로가 끌릴 일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겠지. 내가 좀 더 빨리 교전을 시작했더라면 도구봉파도 늦지 않게 대처할 수 있었을테니 내 잘못이 맞아.'

정확히는 도구봉파가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기 전부터 요란하게 교전을 시작해서 그들의 경계도를 최대한으로 높여주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도구봉파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내가 그렇게나 도구봉파를 걱정하는 위인이었느냐고? 그건 아니다.

'도구봉파를 좀 더 잘 써먹을 수 있었는데 그런식으로 소모시키게 될 줄이야.'

이건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의 판단 미스에 따른 자책일 뿐이다.

덧없이 죽어버린 도구봉파의 조직원들이 아까웠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필사적으로 도구봉파의 부상자들까지 모두 챙겨서 대탈주 작전을 강행했다. 어떻게든 남은 이들이라도 살려야 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대탈주 작전은 성공했고, 도구봉파는 살아남았으니 여전히 써먹을 수 있다. 특히 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심어두었으니 이제부터 갑작스럽게 허를 찌르는 것도, 몰래 뒤를 캐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떠올린 것은 어쩐지 멍하게 서있기만 했던 기억뿐인 아파트 단지 지하에서의 일이다.

'그건 조심성이 너무 없었지.'

강인한 남자들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헐레벌떡 달려나온 꺼림칙한 장소에 당연히 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건만,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섣불리 그 장소에 발을 들였다.

지독한 피비린내와 끔찍하게 살해당한 사람들, 그리고 디그러쉬제 녹음기를 가지고 있던 이름모를 중령의 시체. 그곳에서 나는 손목 시계 타이머가 1시간 12분을 가리킬 때까지 멍하니 서있었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봐도 찝찝함만이 남았던 장소였다. 마치 현실의 경계선이 사라진 듯한 감각이었으니, 돈을 받아도 다시 가기는 싫었다.

나는 품속에서 느껴지는 디그러쉬제 녹음기를 살짝 어루만졌다. 중령씩이나 되는 고위 장교가 가지고 있던 녹음기다. 당연히 민감한 정보가 담겨 있겠지.

'군사기밀보다는 사적인 내용이 더 많이 담겨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사태가 벌어졌을 당시, 타 지역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을지도 몰라.'

그건 나중에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조용히 떴다. 매우 적절한 타이밍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정원석이 이끄는 도구봉파는 가장 먼저 지상에서 가져온 장갑차와 각종 군수물자를 가지고 당당하게 개선장군처럼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장갑차는 격벽 안에 보관해둔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정비가 필요해보였기 때문에 지저 도시에 가지고 들어왔다.

어차피 군 부대 바깥으로만 꺼내지 않으면 이 장갑차들도 해당 군 부대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할테니 나름 훌륭한 위장전술이었다. 나무를 숲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처럼.

장갑차중 한대는 내가 정원석과 따로 얘기해서 차도식파가 한대 받아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다음 작전에서 차도식파의 기동 능력은 한층 더 상승할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역시 연료인데, 그건 주유소의 기름 탱크나 군 부대가 따로 관리하는 유류 창고를 뒤져서 연료를 확보하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뚜두두둑!

기지개를 켜자 잔뜩 굳어있던 근육이 풀리면서 끔찍한 소리를 자아냈다.

이번 지상 작전은 말할 것도 없이 우당탕탕 대소동이었기 때문에 다음 작전은 당분간 연기되지 않을까 싶다.

군 부대 소속 의무관 및 의무병들은 서둘러 부상자들부터 인계 받았으며, 부대 내 병상과 의료인이 부족해서 치료를 받기 힘들 것 같은 사람들은 전부 차도식 병원으로 돌렸다.

나는 부상자들을 인계하는 차도식파 조직원들에게 의약품이 담긴 화물을 맡기면서 저들을 우선적으로 치료받게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북부 지구의 민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인력 낭비를 최소화하는 거다.

저 귀중한 노동력들이 병석에 오래 누워있을수록 손해가 막심해진다. 그러니 치료를 공짜로 해주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을 최대한 빨리 복귀시키는 게 우선이다.

다음으로 김명호에게서 따로 사치품만 들어있는 화물을 받아온 나는 야구르트 아줌마처럼 수송차량 뒤쪽에 발을 올린 채 군 부대를 먼저 빠져나왔다.

이 사치품을 차도식에게 넘겨주면 그가 알아서 줄을 댄 정치인들에게 조금씩 뿌릴 것이다. 이전에도 미리 운을 띄워놨기 때문에 어쩌면 벌써 사치품을 뿌리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반쯤 전동킥보드를 타는 느낌으로 수송차량에 발을 올린 채 스무스하게 북부 지구 도로를 통과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안부 인사를 나눴다.

아이러니하게도 밀수범들중 유일하게 남부 지구 출신인 나는 남부 지구만큼이나 북부 지구에서도 유명한데, 이건 결코 내가 자아도취에 빠진 인간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공짜로 차도식 병원을 운영하고, 시중에 풀리는 물자의 평균 시세를 일시적으로 낮추면서 그 배경에 내가 있다는 걸 북부 지구 주민들이 알게된 것이다. 아마 차도식파 내에서 입이 싼 놈들이 떠벌리고 다닌 것이리라.

덕분에 북부 지구를 거닐다보면 심심찮게 말을 걸어오는 어른들이나, 내 뒤를 쫄레쫄레 따라다니는 꼬마들이 제법 늘었다.

지금도......

"WA! 야구르트 아저씨!"

"방금 아저씨라고 한 놈은 앞으로 나오시오."

"야! 튀어! 야구르트 아저씨 빡쳤다!"

뇌까지 섹시한 이 박한성을 두고 감히 아저씨라니.

지상에서 지저로 터전을 옮긴 탓에 놀거리가 급격하게 줄어든 꼬꼬마들에게 나는 적당히 따라다니며 놀려먹을 수 있는 좋은 샌드백이었다.

가끔 내가 꼬마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과자나 사탕을 뿌려서 그런지, 나를 보물 고블린 취급하는 녀석들도 있다.

또다시 들러붙는 꼬마들이 있었기에, 대충 배낭에 챙겨두었던 과자나 사탕을 적당히 나눠주고 쫓아냈다. 이러니까 꼭 다 큰 어른이 애들한테 삥 뜯긴 것처럼 보인다.

'역시 애들은 순수악이라니까.'

아이들에게 천사같다는 표현은 명백하게 잘못된 거다. 아니면 반어법이거나.

더이상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도, 불필요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사라졌을 무렵, 나는 차도식파 아지트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대로 차도식에게 물건을 넘겨준 다음 간단하게 보고만 하고 돌아가려던 찰나, 차도식의 집무실에서 처절한 고함성이 터져나왔다.

"상태창!!!!!상태창!!!!!!!"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