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78화 (78/211)
  • 내가 손을 척 내밀자 지상에서 송수신기를 만졌던 녀석이 특수한 녹음기 하나를 내게 건넸다.

    땅굴 탐색중 본격적으로 '흔적'과 마주하면 그때부터 녹음을 시작하게끔 규정이 정해져 있다. 일종의 현장 탐사 기록 같은 건데, 작전에서 복귀한 작전팀이 정작 보고해야 할 상황에서 횡설수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녹음 버튼을 눌러서 1번 기록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제 17회 강행 수색 작전 기록을 시작한다. 17번 땅굴에 진입한 우리는 2시간 1분만에 북한의 대규모 지하 시설을 발견했다. 1번부터 16번 땅굴과의 차이점은 군사 목적 시설이나 요인 보호, 설비 보호 목적의 일반적인 지하 벙커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선 땅굴 초입부터 현재 위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깊이가 있으며, 그 깊이는 대략 370m로 추정된다. 또한 기이하게도 이전까지의 땅굴과는 달리 이곳을 지키는 인민군이 일절 포착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까지 교전 및 접촉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다."

    찰칵, 하고 녹음 종료 버튼을 누르자 1번 기록이 정상적으로 저장되었다.

    디그러쉬가 땅속 깊은 곳에서도 목소리가 울리거나 잡음이 섞이지 않게끔 특수 제작했다고 하는 이 녹음기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상품중 하나였다.

    "일단 들어가서 좀 더 살펴보자. 기록도 남겨야 하고, 따로 할 일도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싸늘한 시체처럼 모든 것이 정지된 지하 도시에 발을 들였다.

    O

    "그럴싸하게 지었는데, 실용성이 없어."

    지하 도시를 잠깐 둘러본 나의 첫 감상은 그 한 마디였다.

    "여기가 북한과 지하만 아니라면 투기꾼들이 군침 흘리기엔 충분한 도시 아닙니까?"

    "구조만 놓고보면 그렇지. 북한답지 않게 쫙 깔린 도로와 말끔한 모던풍 건물 양식, 당장이라도 차와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진짜배기 도시야. 하지만 자세히 살펴봐. 낯익은 풍경 속에서 당연하게 있어야할 것들이 안 보이잖아."

    내 지적에 부하들이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자신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양 다시 나를 바라봤기에, 나는 한숨을 쉬며 도로 한복판을 가리켰다.

    "시각적 요소가 없잖아 멍청한 새끼들아."

    "아...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송수신기를 만지던 똑똑이 후임이 그제야 불편한 요소를 찾아냈다.

    "도로나 건물, 그 어디에도 특정 위치를 알려주는 표시가 없습니다. 차선, 횡단보도, 신호등, 표지판, 건물 간판, 심지어......"

    "그래. 가로등도 없지."

    후임이 마지막으로 내뱉을 말을 친절하게도 대신 내뱉은 나는 손전등 불빛으로 열심히 건물 사이를 헤집었다.

    하지만 불빛이 침투한 어둠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곤 하나같이 두텁게 쌓인 먼지와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 살풍경한 광경 뿐이었다.

    지하에 도시를 건설할 계획이라면 최소한 작업자들을 위해서라도 가로등이나 작업용 전등 정도는 설치하는 게 맞다.

    하지만 건물 내부에는 처음부터 전등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고, 인부들이 사용하는 작업용 전등이나 형광등, 심지어 추위를 막기 위한 캠프파이어의 흔적조차 없었다.

    이곳에는 그저 추위와 어둠, 그리고 지상에 있는 여느 도시의 양식을 어설프게 베껴서 옮겨놓은 기이한 장소만이 전부였다.

    "그래도 도로에 타이어와 무한궤도의 흔적은 확실히 남아 있습니다. 그럼 어떠한 목적으로 이 지하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어떤 목적인지 모르니까 그렇지. 너흰 2020년대에도 핵 미사일 들고 서울 불바다 운운하면서 자발적 쇄국정책을 펼쳤던 빨갱이 수령 동지가 정말로 이런 곳에 돈과 자재, 인력을 썼을 것 같냐?"

    "가능성은 있잖습니까. 그리고 옛날부터 북한 지하 도시설은 꽤 유명했습니다. 땅굴을 워낙 잘 파는 놈들이라 그 기술을 타국에 팔아먹을 정도로 지하 공사에 이골이 난 놈들인데, 전쟁에 대비해 지하 도시를 건설했을 가능성도 아주 없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래. 그 말도 일리가 있지. 여기가 평양 바로 아래였다면."

    "......"

    여긴 함경남도 함흥 인근에 위치한 산이다.

    무려 평양에서 서울 만큼 떨어진 장소이기 때문에 이곳에 굳이 지하 도시를 건설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북한의 지배층 입장에서 보면 이 지하 도시는 돈과 자재, 그리고 인력 투입이 너무나도 아깝다.

    주변에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평양과 가까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군사적 요충지인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여차하면 전쟁 발발시 한미일 연합군이 가장 먼저 상륙하게 될 장소중 하나가 바로 함경도 인근인데 무엇하러 이런 걸 만든단 말인가?

    차라리 비밀 핵탄두 제조 공장이라면 어느정도 납득은 되었을 것이다. 그럼 동해에서 활동하는 잠수함들에게 핵 미사일을 쉽고 빠르게 보급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가이거 계수기는 여전히 반응이 없고, 핵탄두의 ㅎ 자도 발견되지 않는 상황이다. 한술 더 떠서 이곳을 지키는 인민군조차 보이지 않으니, 이쯤되면 이곳이 빛나는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전에 버려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초능력자가 아니니 그 잘나빠진 수령 동지의 생각을 감히 가늠할 수도 없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이는 건 이 도시에서 '절박함'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신속과 정확이 생명이라는 듯 사람을 갈아넣은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그럼에도 어설프게 미완성으로 내버려둔 것 같은 기이한 구조는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기획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보자.

    평범한 인간이 이런 환경의 지하 도시에서 살기 위해선 정말 많은 것이 필요하다.

    전기, 가스, 수도는 기본중의 기본이고, 지하에서 생활하기 위한 대형 공기 정화 필터와 암흑을 쫓아낼 수 있는 대규모 광원, 그리고 식량을 재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개량된 비옥한 토지.

    하지만 이곳은 그 모든 것들이 생략되어 있다.

    전선도 없고, 가스관도 없으며, 배수구가 없으니 수도관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어디 그뿐인가? 탁한 공기를 정화시켜주는 공기 정화 필터도, 어두운 거리를 환하게 밝혀줄 가로등도 없다.

    인형이나 레고 장난감이 사는 도시도 이것보단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여긴 사람이 살라고 만든 게 아니야."

    "누가봐도 사람이 살라고 만든 지하 도시 아닙니까? 이런 생활 양식을 가진 게 인간 말고 어디 있습니까?"

    "인간이 아닌 무언가겠지. 막말로 여기서 사람이 사는 것과 귀신이 사는 것중 어느쪽이 더 편해보이겠느냐고 물으면 어느쪽을 고를래? 백이면 백 다 후자를 고를 거다."

    그래.

    여긴 모든 생존 욕구가 결여된 비정상적인 지하 도시다.

    무언가가 이곳에 거주한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고, 막상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괴리감이 흘러넘칠 거다.

    우리는 뒤죽박죽으로 얽힌 커다란 건물이나 단독주택을 지나쳐, 아마도 인민군들이 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대략 30분 정도 더 걷고난 후에야 우리는 지하 도시 형태의 나선형 통로를 따라 더 깊숙한 지하로 내려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현재 깊이는 지하 718m, 기온은 영하 33도 입니다."

    "지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야할지, 아니면 북한이 자력으로 이만한 규모의 지하 도시를 건설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모르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박뱀."

    "그럼 내 총알이랑 같이 즐겨볼래? 어차피 못 피할 텐데."

    "아가리 단속하겠습니다."

    좆같은 후임 새끼.

    이 서늘하고 묵직한 K2C 소총으로 뚝배기를 깰 수만 있다면 원이 없을 텐데.

    후임들이 정겹게 깝죽대면 나는 걸쭉한 욕을 뱉으면서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기를 또 30분. 대략 심도 1km를 찍었을 즈음에 우리는 다시 한 번 행군을 멈춰야 했다.

    "격벽?"

    "크기가 장난아닙니다. 어지간한 성문보다 큰 것 같습니다."

    그 말대로 우리의 앞에 우뚝 선 금속 격벽의 크기는 중세 시대 성의 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견고해보였다. 아주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현실감각이 빛과 같은 속도로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만한 격벽을 열고 닫으려면 엄청난 전력이 필요하겠는데? 하지만 여긴 발전시설은커녕 발전기조차 없잖아."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만 뚫는 건 어떻습니까?"

    안될 것도 없다.

    우리가 방문했던 땅굴 대부분이 견고한 지하 벙커였기 때문에 돌파를 위해서 테르밋 폭약을 곧잘 사용해곤 했으니까.

    "테르밋 챠지 설치하고, 준비되는대로 터뜨려. 격벽 사이즈를 보니 양 조절할 것도 없겠다."

    후임들에게 대충 지시를 내린 나는 분명 격벽 근처에 있을 초소를 찾기 위해 크게 옆으로 돌았다.

    초소가 격벽 내부에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골때리는 일이지만, 일단은 차량이 바깥에서 들어왔으니 당연히 초소도 바깥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소는...아닌데."

    격벽 중심에서 대략 50m 정도 우회하자 초소라고 하기엔 어딘가 민망한 컨테이너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꽤 많이 쌓여있었다.

    이 구역 전체에 먼지가 풀풀 날려서 손전등 불빛이 제대로 닿지 않았던 탓에 미처 발견하지 못 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거주용, 작업실용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 박스와는 살짝 생김새가 달랐는데, 주로 화물선에 가득 실어 운송하는 용도였다.

    높이는 대략 2.5m, 길이는 대략 6m. 당연하게도 창문은 달려있지 않고 정면과 후방에서 문을 개방하는 방식이었다. 외관을 보건대 가장 기본적인 20ft(피트) DRY 규격 컨테이너 박스가 틀림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암흑천지 한복판에서 덩그러니 쌓여있는 컨테이너 박스의 산과 마주했을 때, 나는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일단 증거 확보를 위해 컨테이너 박스 문에 새겨진 식별 번호를 헤드캠으로 촬영하려 했다. 조금 단순무식하게 말하면 컨테이너 박스의 식별 번호가 배송품의 송장 번호와 같은 취급이기 때문에 잘만하면 역추적 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에 당연히 새겨져 있어야 할 식별 번호는 온데간데 없고, 밋밋한 페인트칠만 되어 있었다. 심지어 특정 업체나 국가를 상징하는 마크 같은 것도 없었다.

    "무슨 밀수조직 새끼들도 아니고......"

    혹시 몰라 다른 컨테이너 박스도 살펴봤지만 모두 식별 번호가 없었다. 내친 김에 엑소스켈레톤의 출력을 이용해 문짝까지 뜯어내봤으나, 예상했던대로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기껏해야 바닥에 거뭇거뭇한 얼룩이 좀 많이 묻어있는 게 전부였다.

    물론 거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잠시 방독면을 벗고 냄새를 맡았다.

    "킁킁."

    폐가 얼어붙을 것 같은 공기가 먼지와 함께 기관지로 훅 밀려들어왔으나, 찰나의 순간에 다시 방독면을 뒤집어쓴 나는 아직 진하게 남아있는 컨테이너 박스 속 냄새를 확인했다.

    이 익숙한 냄새는......

    -박뱀.

    "어."

    -폭탄 설치 완료했습니다.

    "발파해."

    컨테이너 박스의 무덤에서 기어나온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테르밋 폭약이 잠시 타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콰아아아앙!

    그리고 이어지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수천 도의 초고열에 녹아내린 금속 격벽 일부가 완전히 뜯겨나갔다.

    차량 한 대는 너끈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격벽이 파괴되었지만 내부에서 밀려나오는 먼지의 양은 그 이상이었다.

    "씨부럴 고글......"

    방산비리 덕분에 내 눈은 칠리 소스를 뿌린 것마냥 따끔거렸다. 군사 혁명 마렵네.

    나는 다시 녹음기를 들어 기록을 남겼다.

    "제 17회 강행 수색 작전 기록을 시작한다. 우리는 심도 약 1km 지점에서 거대한 금속 격벽 및 용도불명의 컨테이너 박스를 대량으로 발견했다. 컨테이너 박스의 내용물은 텅 비어있었으며 식별 번호가 없어 정확히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북한까지 운송되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 해서, 금속 격벽을 테르밋 폭약으로 일부 파괴하여 내부에 진입해 강행 수색을 우선시하기로 결정했다."

    찰칵. 어느새 몇 번째인지도 모를 또 하나의 녹음 기록이 저장되었다.

    이렇게 착실하게 기록한 녹음은 중장갑수색대대 브라보 중대 소속 수색대원들이 위험 수당과 포상 휴가를 받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알파 중대 놈들도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내가 먼저 간다."

    "박뱀. 슬슬 제가 선두에 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내가 선두에 선다. 넌 그대로 최후미야."

    겸연쩍게 입맛을 다시는 놈을 뒤로하고 내가 먼저 박살난 격벽 틈새로 진입했다.

    철컹철컹 하고 엑소스켈레톤의 묵직한 프레임이 움직일 때마다 안정감보단 긴장감이 조금씩 더 늘었다. 이 무지막지한 병기는 위험 요소로부터 내 몸을 지켜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자욱한 먼지가 조금은 가라앉자 헤드램프 불빛이 드디어 그럴듯한 외관의 건물을 비춰주었다.

    용도는 여전히 불명이지만, 이곳이 굉장히 조심스럽고 비밀리에 다뤄진 연구 시설이라는 것을 짐작케해주는 시설이었다.

    -제 1 지저 연구동

    -소독실

    -검체 확인실

    이 염병할 고글은 이 역사적인 순간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가라앉았나 싶었던 먼지가 다시 고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내 기관지와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후욱...쿨럭! 크헉! 후욱! 후욱!!"

    나는 장식물처럼 전시된 두개골들이 하나같이 바라보고 있는 벽에 걸려있는 어느 이름모를 중령의 시체 앞에 서있었다.

    무언가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당한 중령이 마지막 순간까지 꽉 쥐고 있었던 낯익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내구성부터 성능까지 무엇 하나 모자랄 것이 없다며 적극적으로 세계 각지에 납품한 디그러쉬의 또다른 판매 상품중 하나.

    투박하지만 멋들어진 검은 녹음기를 빼내들었다.

    피가 묻어있었고 사후경직으로 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았지만 외골격 파츠 덕분에 빼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득 손목에 차고 있는 디지털 시계를 확인해보니, 타이머는 정확히 1시간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나온지 고작 1시간 12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돌아가자."

    녹음기를 품속에 갈무리한 나는 지상으로 돌아와 도구봉파와 합류했다.

    슬슬 대량의 물자와 장갑차를 확보해서 지저 도시로 복귀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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