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44화 (44/211)
  • 신은 죽었다(1)

    "다들 준비 됐나요?"

    "동생 어서오고."

    차갑고 텁텁한 지저 도시의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출근하자 비싼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던 차도식이 손을 척 들어올렸다.

    최근 차도식파는 꾸준하게 압도적인 실적을 내왔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한편, 내부적으로도 관리가 매우 잘 되고 있었다. 다른 조직에서 견디지 못해 빠져나온 인재 몇 명을 최근 조직원으로 흡수하기도 했고.

    때문에 그는 직접 지상 작전에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3일마다 한 번씩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보통 높은 지위에 있으면 귀찮아서라도 구두 명령만 내려두고 말텐데, 그는 솔선수범해서 조직원들을 챙기는 타입이었다.

    '인망이 있다기보단 눈치가 대단하다고 봐야겠지.'

    윗사람은 미처 모르고 넘어갈 수 있지만 아랫사람은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는 것. 그건 바로 배려와 관심이다.

    윗사람들은 그것들이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기 일쑤인데, 아랫사람들은 그런 일이 쌓이고 쌓일때마다 가슴 속에 담아뒀다가 한 번에 터뜨린다.

    그런 점에서 차도식은 눈치빠른 윗사람이었다. 진심을 다해 아랫것들을 챙겨주는 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그렇게 보이도록 열과 성을 다한 연기를 펼치는 거다.

    귀찮고 힘들어도 조직원들의 신뢰를 얻어야 하니까. 자신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두목이라는 걸 끝없이 강조해야 하니까.

    '그래도 저정도면 양반이지.'

    나는 여느 때처럼 북부 지구 엘리베이터 앞에 모인 다른 밀수조직들을 살폈다.

    연이은 실패에 쓴물을 삼킨 조직들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눈에 독기가 차있었으며,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누가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펑 터질 것처럼 예민해보였다.

    반면 차도식파를 비롯해 상도 아재가 있는 공구리파, 일전에 나와 한 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 특전사 출신이 소속되어 있는 도구봉파는 활기가 넘쳤다.

    차도식에게 '도 사장' 이라고 불리는 도구봉파의 두목은 조직원들의 장비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타입이었다.

    특전사 출신의 에이스가 지상 작전에선 좋은 장비가 필수라는 말이라도 했는지, 최근 잘나가는 차도식파보다 장비 수준이 훨씬 더 좋은 것 같다.

    "차 사장! 오늘도 한몫 거하게 잡을 생각이야? 우리 상도덕좀 지키자고~."

    "에이 선수들끼리 또 왜 그러실까. 도 사장쪽 애들도 지난 번에만 조금 죽 쒔지, 막상 실적은 나쁘지 않잖아?"

    "거기 그 친구가 아주 개코라던데? 이 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해!"

    장비를 점검하고 있던 나를 가리킨 도 사장이 차도식과 함께 맞담배를 폈다. 아직 엘리베이터 가동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는지라 두목들끼리 잡담을 나누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거 도 사장은 지난 번에 특전사 출신 뽑았다고 자랑좀 했잖아. 그 친구도 일 괜찮게 하는 것 같던데?"

    "아 물론 그 친구도 대단하지! 비실비실한 놈들이랑은 질적으로 달라 질적으로! 근데 우리 애들이 특전사 폼을 못 따라가더라고. 근데 그쪽은 저 친구가 건수 하나 잡으면 알아서 척척이라면서? 대체 비결이 뭐야?"

    도 사장의 칭찬에 차도식은 기가 살았는지 슬쩍 내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 한 게 있나. 다 우리 애들이 열심히 한 거지. 저 친구가 수완이 워낙 좋으니까 효율적으로 일을 한다고. 효율적으로."

    "크으, 지상에 있을 때는 그냥 아랫것들 굴리기만 하던 내가 더 잘나갔는데, 어째 지저로 들어오니까 차 사장이 더 잘나가는 것 같아? 나도 경영 방침을 좀 바꿔볼까?"

    "이 친구가 경영 방침은 무슨. 나야 운이 좋은 케이스고, 오히려 조직 운영 잘 하는 건 도구봉파 아닌가? 그쪽은 애들 위계질서가 딱딱 잡혀 있잖아. 우린 애들이 좀 프리~해서 가끔 내 말도 안 들어쳐먹어. 썩을 놈들."

    "푸흐흐! 그래, 오늘도 서로 한탕 거하게 해먹자고."

    "그래서 그쪽은 어디로 가려고?"

    "으응?"

    갑자기 정색하며 되묻는 차도식에게 도구봉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태도로 나왔다.

    "어허, 이 친구야. 실적에 죽고 못 살아서 애들 군기 잡는 거 하나는 서울 최고였던 양반이 오늘은 아주 작정을 했을 것 아닌가? 그쪽도 노리고 있잖아? 백화점."

    "흐흐...이거 들켰구만. 사실 우린 차 사장 애들이랑 엮이기 싫어. 지상에서 서로 만나면 적절하게 타협해서 수익 반띵하는 게 룰인데, 그러면 너무 재미없잖아?"

    "그건 그렇지. 그러다 싸움이라도 나면 서로 줄초상 치르는 거고. 그러니까 오늘은 서로 알아서 피하자, 이 얘기 하려고 찾아온 거지?"

    "하여간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다니까. 역시 눈치 하나로 빌어먹고 산 양반은 달라도 뭐가 달라~."

    도구봉이 비릿한 미소를 짓고, 차도식은 그저 담배만 뻑뻑 피워댄다.

    슬슬 도봉구에서 털만큼 털었기 때문에 다들 도봉구 인근 지역에서 큰 건수 하나 올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6시간 안에 발견하고, 6시간 안에 한가득 가져올 수 있는 큰 건수를.

    사실 6시간을 온전히 찾는 데만 쓸 필요는 없다. 이미 눈여겨봐둔 장소라면 6시간의 정찰 시간까지 물자운반 시간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지상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처음부터 모든 조직원들이 뛰쳐나가 12시간 안에 대량의 물자를 확보해오는 것. 극한의 하이 리스크와 하이 리턴 작전이다.

    "그래서 차 사장은 어디로 갈 거야? 아래? 위?"

    "우리가 아래로 가면 위로 가서 드시겠다?"

    "알만한 사람이 자꾸 왜 이러실까. 조직 하나가 백화점 2개나 독점하는 건 선 넘는 거잖아. 안 그래?"

    "흐흐, 우린 그럴 능력 되는데? 저 친구 덕분에 팀원 전체가 움직여도 사상자 한 명 없이 병원 하나 싹 털어버린 거 알잖아."

    "쓰읍! 상도덕좀 지키자니까? 우리 애들 요새 피죽도 못 먹는다!"

    낄낄 웃던 차도식은 이번에만 선심쓰겠다는 듯 내게 고개를 돌렸다.

    "동생! 우린 이번에 어디로 갈 거야?!"

    "위로 갑니다."

    "들었지? 우리 동생은 위로 갈 거래."

    "아, 진짜...그럼 우리가 아래로 가야 하잖아."

    도구봉은 별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고 물러섰다.

    여기서 차도식과 도구봉이 떠든 백화점과 위, 아래는 문자 그대로 도봉구 아래에 위치한 롯데백화점 미아점, 그리고 미아점보다 위에 있는 롯데백화점 노원점을 의미한다.

    각각 강북구와 노원구에 위치해있으며, 북부 격벽에서 제법 거리가 된다. 다만 노원점이 미아점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더 가깝다는 점, 그리고 노원점 인근에 노원역과 아파트단지가 있다는 점이 큰 메리트로 작용한다.

    미아점에도 근처에 미아사거리역이 있긴 하지만 아파트단지가 적은 탓에 상대적으로 물자 확보가 조금 더 힘들 것이다.

    그럼 우리가 어째서 이렇게 배째라는식으로 나올 수 있는가, 그건 현재 차도식파가 차지하고 있는 이권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실적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밀수업계에서 우리는 압도적인 실적을 세우고 있고, 사망자 및 낙오자 0명이라는 경이로운 기록까지 보유하고 있다.

    실적 좋아, 손실 없어, 군과 민간에 상부상조도 잘 해줘. 이쯤되면 차도식파가 대놓고 배째면서 '특정 지역 하나는 우리가 먹겠다'라고 주장해도 감히 반발할 조직이 없다는 거다.

    '물론 지상에 나가면 통수 치고 달려들 가능성도 있지만, 서로 피해만 입을 테니 어지간하면 그런 짓은 안 하겠지.'

    누구나 눈앞의 이득보다 눈앞의 목숨을 더 중요시 여기는 법. 특히나 지금 지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는 자들은 절대로 지상에서 소란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안전 점검 끝났습니다!"

    한 정비병의 외침에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아서 쉬고있던 밀수조직들이 서둘러 일어나 몸을 풀었다.

    도구봉과 얘기를 끝낸 차도식은 히히덕대며 나와 김명호를 한 자리에 불러모았다.

    "내가 너희들 믿는 거 알지? 지난 번처럼 너무 과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필요한 것만 딱딱 챙겨서 돌아오면 돼. 뭐니뭐니해도 안전 제일! 그것만 기억하자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형님."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죠."

    "그래그래, 믿음직스러운 동생이 둘이나 있어서 이 형님은 기쁘다."

    우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준 차도식은 곧 말단 조직원들에게도 칭찬과 격려를 건넸다.

    우리가 이번 작전에서 실패하더라도 차도식파는 보험이 있다. 차도식병원이라는 보험이.

    설령 약이 없다고 해도 진단은 해줄 수 있는 빵빵한 의료진, 간단한 검사를 해줄 수 있는 의료기기도 준비되어 있다. 지난 번에 약도 제법 구해왔으니 당분간은 병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겠지.

    뒤가 없는 다른 조직들과 다르게 차도식파는 여유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거리가 가깝고, 또 일전에 크게 한 방 터뜨린 강북구보다 안전할 것 같은 노원구를 택한 것이다.

    차도식의 말대로 안전도 챙기면서 큰 거 하나 물기엔 노원구가 가장 무난했으니까.

    "엘리베이터 탑승!"

    """탑승!!"""

    때가 되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나선 밀수범들이 엘리베이터로 열심히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꾸역꾸역 자리를 잡은 밀수범들의 숫자만 해도 가볍게 수백 명을 넘어섰다. 지난 번에 된통 당하고도 결국 밀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이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지상을 향해 움직이면서 소음이 조금 생기자, 나는 바로 옆자리에 앉은 김명호에게 보건소와 약국을 집중적으로 노리라는 귓속말을 건넸다.

    그러자 깜짝 놀란 김명호가 내게 반문해왔다.

    "우린 롯데백화점 노원점을 터는 게 아니었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봅시다. 온갖 다양한 물자가 대량으로 존재하는 백화점에 과연 생존자 집단이 없을까요?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

    재난 상황에서 백화점만큼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도 없다.

    자잘한 할인마트나 편의점이야 금방 털리고 폐허로 전락하겠지만, 백화점은 시설의 규모나 물자의 양을 고려해보면 민간인 쉘터로 안성맞춤이다. 혹은 지상의 추위를 피해서 인근 지하철역으로 숨어들어간 사람들이 백화점만 점거한 채 정기적인 물자 공급처로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고.

    "아......"

    "그러니까 생존자 집단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무장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또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을지 일단 정찰부터 해보자는 겁니다. 무턱대고 우리가 생존자 집단과 접촉했다간 십중팔구 무력충돌로 이어질 겁니다. 내 말 틀렸습니까?"

    "그건...그런 것 같습니다."

    가혹한 세상이다.

    천박한 농담으로 전락한 인간성따위보다 당장 눈앞의 식량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은 이미 전 인류가 깨달았지. 사태가 벌어진지 고작 2주만에.

    "명호 씨는 운반조와 대기조를 이끌고 먼저 롯데마트 주변에 있는 보건소와 약국, 그리고 아파트 단지부터 수색하면 됩니다. 다른 조직들도 우리를 따라서 노원구까지 넘어오려 하겠지만 백화점을 건드리려 하진 않을 겁니다. 우리와 충돌하고 싶은 조직은 없을 테니까요."

    "그럼 한성 씨가 강행정찰을 하시는 겁니까?"

    "그래야겠죠? 노원역과 롯데백화점 노원점은 제가 먼저 강행정찰을 해보고, 털 만한 곳인지 아닌지 판단해보겠습니다. 털 만하다 싶으면 랑데뷰 포인트에서 만나 다 함께 털고, 안되겠다 싶으면 적당히 먹을 것만 먹고 빠지는 겁니다."

    "그정도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어차피 조직원들을 다루는 건 차도식파의 2인자인 김명호가 나보다 훨씬 더 잘하는 일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움직이며 효율적으로 수익을 올리는 사업 파트너이기 때문에 그들과 수직적 관계를 맺고 서로 불편해할 이유가 하등 없다.

    "격벽에 도착했습니다!"

    엘리베이터 관리병의 외침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조직원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두꺼운 격벽 너머에서부터 느껴지는 지상의 냉기에 싫어도 몸이 저절로 반응해버리고 만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진짜 좆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긴 냉기다. 다들 작전을 끝내고나면 언제나 땀을 한 바가지씩 흘린 채 복귀하는 이유도 그것때문이리라.

    "격벽 개방!!"

    낯익은 대위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격벽이 드드드드드! 하고 크게 진동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어두컴컴하고 지독한 냉기로 가득한 정적의 세계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빛과 온기, 그리고 소리라는 이름의 신이 죽어버린 세상 같았다.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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