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43화 (43/211)
  • 경쟁(5)

    대한민국 중장년의 삶은 참 애달프다.

    본격적으로 판 벌려서 놀자니 청년 시절의 젊음이 없고, 열심히 번 돈으로 이제 자신을 위해 좀 투자해보자니 주변에 챙겨야 할 것들이 많다.

    그래서 대한민국 중장년층은 확고한 인생의 가이드라인이 없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을 산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무언가를 발견하면 굉장히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는데, 공통적으로는 자신들의 자존감을 채워주는 무언가를 광적으로 추구한다.

    예를 들어 비싼 명품백이나 화장품, 혹은 잘 쓰지도 못할 비싼 낚시대나 고급 승용차 같은 것들.

    오죽하면 자신들의 바닥난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일부러 서비스업 종사자들을 상대로 진상 짓을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까.

    안 좋은 방향으로 집착하면 당연히 나쁜 게 맞지.

    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집착한다면 어떨까?

    '방향성'만 좋다면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는 모두가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저희 남편이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나요?"

    "그럼요. 사모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북부 지구에서 물건을 떼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자선활동으로 우리 아파트 주민 여러분께 적정가로 팔고 있고요.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북부 지구의 실질적인 컨트롤 타워나 다름없는 북부 주둔군 덕분입니다. 거기 군 부대 관리하시는 대대장님이 민간 상인 조합과 협력해서 시장 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셨습니다."

    "그러고보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군 부대 주변 상권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언제나 활발하다고."

    "바로 그겁니다 사모님. 지금 북부 지구의 시장 경제가 활성화된 이유가 군과 민간의 합작인 거죠. 하지만 저는 남부 지구 거주민이고, 거긴 북부 지구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남부 거주민인 저는 점점 더 그들로부터 배척당하게 되겠죠. 사모님도 소문 들어서 아시잖습니까? 북부 지구 상인들은 타 지구 거주민이 뭔가를 사려고 하면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씌우거나, 아예 판매를 하지 않는다는 거 말입니다."

    "맞아요.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러는지......"

    내가 어두운 표정으로 한탄을 늘어놓자 눈앞의 30대 후반 여성은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형성해주었다.

    우리 가족이 사는 아파트의 부녀회 소속이지만 성격이 유순한 사람이라 괄괄한 아주머니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밀리는 분이다.

    하지만 큰소리 내지 못하는 말석이라도 부녀회는 부녀회. 그녀는 내가 부녀회에 꾸준히 갖다바친 뇌물에 이미 중독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맛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다들 어려운 시기에 자신은 풍족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면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아니오'다.

    애초에 이 남부 지구에서 온갖 식료품과 생필품, 그리고 사치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뿐이었다. 그건 모든 밀수조직이 지상 작전을 쉬고 있는 휴식기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차도식파에서 내준 개인 창고와 집구석에 따로 박아둔 물자를 북부 지구 시장에 내다팔지 않았다. 대신 남부 지구 거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조금씩, 꾸준하게 투자하고 있었다.

    뭔가 감질날 것처럼 아슬아슬한 양을 공급하면서도 물량이 떨어지면 금세 채워주는, 마치 하루에 한 번 짧은 시간만 진행하는 한정 세일 같은 느낌으로.

    덕분에 아파트내에서 나와 어머니의 입지가 자연스럽게 커졌다.

    나는 남부 지구의 상류층 인간들을 위해 열심히 물자를 실어나르는 성실하고도 예의바른 청년.

    어머니는 그런 나를 올바르게 키우시고 교육한 모범적인 현모양처.

    이러니 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부녀회 소속이라면 내 말에 껌뻑 죽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사실 우리 모자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역으로 부녀회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그게 싫어서라도 협조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

    "저희 남부 지구도 언제까지고 북부 지구에만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 자립하지 않으면 금세 북부 지구에게 뒤쳐지고, 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만 받아먹는 신세로 전락하겠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엄청나게 격한 반응을 보여줄 수도 있는 내 경고에 사모님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수방사 직할 부대 소속이었을 만큼 연줄이 확실한 육사 출신 남편을 둔 그녀는 뒤쳐진다는 말에 매우 민감할 것이다. 군인의 아내는 빈말로도 여성들만의 교류회에 뛰어들기 힘드니까.

    지저 도시에 들어오면서 가까스로 상류층 교류회에 진입한 그녀로서는 고작 북부 지구의 서민들 때문에 '뒤쳐진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치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일단 내게 해결책은 있지만 당신의 입장을 생각해서 굉장히 꺼내기 어려운 말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는 뉘앙스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 동정심을 유발하면서 동시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해결책이 있긴 한데...막상 말씀드리려 하니 좀 부담이 됩니다."

    "그게 뭔가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도울게요."

    "...좀 뻔한 말이지만 남부 지구도 주둔중인 군 부대와 민간의 상호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서로 어려운 시기에 상부상조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거죠. 그러면 군이 어려울 때 우리가 돕고, 반대로 우리가 어려울 때 군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남부 지구만의 시장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 그래서 저희 남편이......"

    "예. 부군께서 남부 지구 주둔군의 지휘를 맡고 계시죠. 하지만 막상 남부 지구 주둔군이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북부 지구 주둔군처럼 활발하게 움직여도 모자랄 판국에 인력과 물자를 낭비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사모님께 이런 얘기를 꺼내게 된 겁니다."

    "...이해해요. 박한성 씨가 남부 지구와 북부 지구를 주기적으로 오가면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고 있으니, 남부 지구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죠. 오히려 제게 먼저 말을 꺼내줘서 기뻐요. 남편은 군인의 아내가 된 제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까요. 제가 남편과 잘 얘기해보면 자리를 주선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공적인 일에 부부의 문제를 들고 들어가는 건 역시......"

    "어휴,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받은 게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염치 없는 사람이 되는 건 똑같잖아요? 그러니 애써 마음에 담아둘 필요 없어요."

    "죄송하면서도 감사합니다."

    얘기는 잘 풀렸다.

    이제 그녀는 남편과 잘 얘기해서 남부 지구 엘리베이터를 지키고 있는 군 부대와 나를 연결시켜줄 것이다.

    내가 남부 지구 군 부대와 연결된다는 건 곧 차도식파가 새로운 루트를 확보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독보적인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밀수에 대한 이야기가 잘 풀리고, 차도식파가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밀수의 판도가 달라지겠지.'

    차도식파가 지상에서 대량의 물자를 확보해온다면 남부 지구 군 부대도 밀수에 적극 협력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효율을 위해 다른 밀수조직도 끌어들일 수 있다. 물론 다른 밀수조직에겐 소개비 명목으로 수익의 일부를 뜯어낸다는 계획도 준비되어 있다.

    먼저 먹고, 많이 먹고, 끝내는 시장을 독식하는 계획이다. 상상만 해도 배가 부르지 않은가?

    "보험을 사용할 때가 됐군."

    그녀와 헤어진 나는 카페테리아 구석에서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지?

    "대위님 제게 빚지신 거 바로 갚으셔야겠습니다."

    -후우, 그래. 내가 뭘 해주면 되겠나?

    "남부 지구 엘리베이터를 지키는 군 부대에 혹시 아는 사람 있습니까? 없다고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른 일로 받아내면 되니까요."

    -있다. 거기 작전장교가 내 후배야.

    "잘 됐네요. 그 후배님 통해서 북부 지구 군 부대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는지 은근히 자랑좀 늘어놓으시면 되겠습니다. 군 부대 내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질 만큼."

    -잠깐, 그러면 보안상에 큰 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 아직 우리가 하는 일을 상층부가 모르고 있다지만 남부 지구 군 부대까지 알게 되면......

    "그러니까 타이밍을 맞춰야죠. 지저 도시 입주 13일째가 4회째 지상 작전 아닙니까? 지난 작전에는 수확이 좀 적었으니 이번에는 밀수조직들도 작정하고 달려들 겁니다. 수확량이 제법 되겠죠? 그걸 은근히 자랑하는 겁니다. 북부 지구도 하는데 남부 지구는 왜 못 하냐는 식으로요."

    -그랬다가 저쪽에서 먼저 우리를 찌르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남부 지구 엘리베이터를 지키는 대대의 지휘관이 남부 지구 거주민이라 이쪽에서 먼저 약을 쳐뒀습니다. 그냥 남부 지구 군 부대도 '밀수를 하지 않으면 손해다' 라는 동요를 일으키면 충분합니다."

    -정말로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건가? 그걸로 지난 번 빚을 없애준다고?

    "서로 자주 볼 사이인데 불편하게 빚 같은 거 계속 쌓아두면 안 되죠. 서로 깔끔하게 털어내는 편이 좋잖아요?"

    -그건...그렇지. 그럼 너희 밀수조직이 다음 지상 작전에서 크게 한탕 하면 내 후배에게 얘기를 흘리는 것으로 하겠다.

    장병 17명의 목숨값에 대한 죄책감을 이런식으로 덜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북부 격벽을 지키는 대위는 주저없이 내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다.

    통화를 끝내고나니 긴장감이 빠져서 의자 등받이에 축 늘어지듯 기댔다.

    "후우...원래 내가 바랬던 사회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미래그룹 산하 경비업체에 취직하면 직장 동료들과 잘 어울리면서 견실한 사회인이 될 생각이었다.

    너보다 위에 있는 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꺾어야 한다는 끔찍한 가정교육을 잊고, 새롭게 사귄 사람들과 형님아우 하면서 근심걱정없이 살고 싶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인 탓에 피로가 쌓였는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러고보니 오늘 한숨도 못 잤지.

    -박뱀은 전역하면 뭐할 겁니까?

    -직장인.

    -에이 구라치지 마십쇼. 우리같은 놈들이 어떻게 직장인이 됩니까?

    -그럼 뭐, 어디 피의 맹세를 하고 조폭에 입단이라도 할까?

    -또또 후임의 충언을 왜곡하신다~ 우리같은 놈들은 손에 맞는 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성격에도 안 맞는 거 하면서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그냥 몸따라 마음따라 꼴리는 거 하십쇼.

    -지랄. 개소리하지말고 불이나 꺼.

    -전원 소등하랍신다.

    -모두 알겠지만 우리 목표는 북한......

    [녹음기록이 손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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