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라이프(2)
다른 나라 이야기, 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느 시대에서든 인용할 수 있다.
바깥 세상이 갑작스러운 빙하기가 닥친 탓에 투모로우2를 찍고 있는 것도, 질서와 통제가 사라진 탓에 다시 원시적인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도 내게 있어선 '다른 나라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제, 지저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정전 사태와 원인 모를 소요 사태 발발로 인해 실질적인 피해를 입은 누군가도 나와 같을까?
같았으면 좋겠지만, 아마 그들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아직 이곳을 제 2의 고향이라고 느낄 만큼 마음을 붙이기도 전에 행방불명 처리 됐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 지저 도시에 절대로 밤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테니까.
그들에게 '다른 나라 이야기'는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일일노역을 위해 방문하신 HR 등급의 시민 여러분은 입구에 배치된 리더기를 통해 출근 체크를 해주십시오. 이는 퇴근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출퇴근 시스템입니다."
디그러쉬 사에서 근무하는 DR-5 등급 말단 안내원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낯익은 시스템을 들이밀었다. 인간은 언제나 낯익은 시스템에 애써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상호합의하에 합법적으로 우릴 부려먹고 있다는 사실에서 양심적 죄책감을 덜고 싶을 뿐이거나.
잃어버리면 큰일난다던 금속 명찰(직급 코드)을 체크 카드처럼 긁자, 종이처럼 얇은 스크린에 '박한성 출근 시간 AM 07 : 55 확인' 이라는 표시가 출력되었다.
출근하고 퇴근하기 전까지 직장에서 머무른 시간 만큼 돈을 주는, 딱봐도 배짱이들이 악용해먹기 좋은 시스템을 뉴시티펑크 2030에 그대로 도입했을 줄이야.
그 부지런한 개미나 벌들 조차 집단 내에서 노는 놈들이 있기 마련인데, 하물며 끝없이 편한 것만 찾는 인간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없을까?
축하한다. 모두의 기대를 배신하듯 정답은 '없다'였다.
"디그러쉬 사는 지저 세계의 토지 개척 및 산업 광물 채광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러한 것들은 디그러쉬 사의 가치를 증명하는 대표적 업무인 만큼 많은 노동력과 투자를 필요로 합니다. 현재 정부가 발표한 2030 계획에 따르면 디그러쉬 사에 제공될 인력은 당분간 한정되어 있다고 하니, 여러분들은 우선 미완성 개발 지구에 파견되어 할당량의 노역을 하셔야 합니다. 지저 도시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이런 노역이 대부분일 거라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자기는 편한 사무직이라 현장 노동직으로 끌려온 우리의 심정이 어떤지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안내 직원은 우리의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는 소형 드론을 가장 마지막에 소개해주었다.
"이 소형 드론들은 여러분들의 노역 거부 행위, 불법 행위를 디그러쉬 사가 직접 관리감독 하는 용도로 쓰입니다. 모든 소형 드론들은 여러분들의 노역이 시작되고 끝나기 전까지 철저하게 모니터링할 것입니다. 또한 수집된 데이터는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해 외부로 반출되거나 거래되지는 않겠지만, 디그러쉬 사의 서버에 '보관'될 것입니다. 질문 있으신 분?"
안내 직원이 이제 막 출근한 대기업 직원이 V로그를 촬영하는 것처럼 활기발랄하게 되물었으나, 누구 하나 손을 들지 않았다.
손을 들면 무심코 안내 직원의 코를 뭉개버릴 것 같았으니까.
"노역을 하는 건 딱히 상관없는데, 그에 대한 보상은 왜 얘기 안해주는 거요?"
아마도 나처럼 가족 덕분에-주로 군인들- 지저 도시에 입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재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사실 이 자리에 선 모두 누가 저 질문을 하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아, 노역 보상 말이죠. 일급, 주급, 월급, 인센티브 형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노역 보상은 당일 일급으로 지급하며, 주급과 월급은 별도의 신청을 하셔야 합니다. 인센티브의 경우 디그러쉬 사에 도움이 될만한 공로를 세우시거나 하면 내부 회의를 거쳐 지급됩니다. 인센티브는 정해진 임금과 달리 제한선이 없습니다."
"디그러쉬처럼 대단한 기업을 위해 우리같은 무지렁이들이 뭘 해줄 수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일단 물어봅시다. 정확히 뭘 해야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는 거요?"
"음, 매뉴얼에 따르면 채산성이 좋은 광맥을 찾아서 보고한다거나, 디그러쉬 사에 해를 끼칠만한 존재, 혹은 그런 정보를 미리 경고해준다거나 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 형태의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고 하네요. 그 외에도 월 단위의 노역왕이라던가, 우수 노역자 같은 인물로 선정되는 방법도 있고요."
"흐, 노예 만들기 딱 좋은 시스템이구만."
"그런 말씀 마세요. 디그러쉬 사는 노동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모범적인 기업이랍니다. 또한 정직원이 아닌 일일노역자에게도 4대 보험 및 산재 처리를 해주고 있죠."
딱봐도 노가다판이 어울릴 것 같은 아재는 사탕발림이 더 듣고 싶지 않았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서 우리가 정확히 뭘 어떻게 해줘야하나? 삽들고, 포대 자루 짊어지고, 함마질좀 해주면 되나? 이참에 싹 공구리라도 칠까?"
"채광, 시공, 개척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당장 하게 될 단순 개척이나 시공은 현장 감독과 설계공학자의 말에 따라 일을 하는 것 뿐이죠. 소형 드론들이 여러분의 관리감독겸 현장까지의 안내를 맡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불가피한 사유로 노역 도중 이탈을 원하시는 분은 반드시 그에 맞는 사유를 증명해주셔야 정당한 노역을 인정받으실 수 있습니다."
천재지변, 친지변고, 응급상황 발생 등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힘없고 빽도 없는 우리같은 HR 등급의 인간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안전 장비를 지급 받고 셔틀 버스에 올랐다.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는 군대에서 의미도 없는 진지 공사를 할 때도 이렇게 좆같진 않았는데.
셔틀 버스 구석에 적당히 자리잡은 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명상이나 할겸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나와 달리 서로 동질감을 느끼는 인간들은 금세 삼삼오오 모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주된 대화 내용은 자기가 바깥에서 뭐하던 사람이었는지, 자기 가족이 이곳에서 뭐하는 사람인지 같은 시시콜콜한 허풍과 허세의 향연이었다.
내가 특별한 케이스일뿐, HR 등급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 가족들도 지저 도시 입주 자격을 최소한으로 갖춘 서민일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이들 사이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건 아니고.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무덤까지 이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이어셋으로 귀를 막을까 싶던 찰나, 내 흥미를 자극하는 대화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어제 그거, 정확히 무슨 일이었대요?"
"나도 잘 모르는데 건너건너 확인해보니까 군인들이 뭐랑 싸웠다고 하더라고."
"지저 도시에서 군인들이 싸울만한 게 있답니까? 일본이나 중국이 쳐들어온 것도 아닐 텐데."
"나도 소문만 들어서 자세한 건 모르지마는...뭔가 있었다는 모양이야. 젊은 군인 몇 명이 심하게 다치거나 죽었다고 하더라고."
"아이고...그 젊은 것들이 무슨 죄라고!"
'어제 터진 대규모 정전 사태와 시가지 총격전을 말하는 거다.'
건물 내부에 있었던 입주민들은 누구 하나 문제 없었지만, 바깥에서 무언가와 격렬하게 싸웠던 군대는 아무래도 피해를 좀 입은 모양이었다.
"그 뭐냐...엠바...엠바 뭐시기가 걸려서 자세한 내용은 말해줄 수가 없다더라고."
"엠바고? 그럼 높으신 양반들은 다 알고 있다는 건데?"
"높으신 분들이야 당연히 알고 있겠지. 젊은 애들 데려다가 막 부려먹는 게 그네들이 가장 잘하는 일인데."
"쯧! 안전한 피난처라고 해서 한시름 덜었는데 입주 첫날부터 영 깨름칙하구만."
당장 술과 고기, 그리고 불판만 있으면 새벽 4시까지 달리는 술판특급열차를 벌일 아재들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셔틀 버스가 아직 개발이 덜된 지구에 우릴 내려준 것이다.
이런 깔쌈한 도시에도 아직 미완성인 부분이 남아있나 궁금했었는데, 우리가 마주한 것은 꽤 현실적인 문제였다.
"마감이 덜됐구만. 염병."
나름 현장을 뛰어본 적 있는 한 아재가 침묵을 깨고 투덜거렸다.
사실 말이 좋아 마감이 덜 된 거지, 포장 도로가 툭 끊긴 탓에 이 앞부터는 비포장도로가 쭉 이어진 것 정도는 애교였다. 뼈대만 세워져 있는 건물들, 잔뜩 쌓여있는 건설자재, 그리고 그 근처에서 모래가 들어있는 자루를 쌓아 임시 초소를 만들어 경계중인 소수의 군인들까지.
아주 대환장 콜라보 파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공업용 엑소스켈레톤과 중장비를 실어나른 대형 화물트럭이 우리 다음으로 현장에 도착했다는 점, 우리가 작업할 동안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해줄 군인들이 있다는 점, 그리고 작업 지시를 해줄 인간들이 한가롭게 놀고 있지 않다는 점 정도였다.
솔직히 현장 감독을 하게될 작업 반장이나 구체적인 작업 지시를 내릴 똑똑이 양반은 저들끼리 귀한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이며 짝짜쿵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디그러쉬는 극도의 효율충이 CEO로 있는 기업답게 노역자부터 관리자까지 그냥 놀게 놔두지 않았다. 정확히는 싹수가 노란 양반들은 처음부터 뽑지도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미리 우리에 대한 인적 정보를 넘겨받은 현장 관리자들은 중장비 면허가 있는 사람에겐 중장비를, 엑소스켈레톤 면허가 있는 사람에겐 엑소스켈레톤을 내주었다. 그마저도 없는 사람들에겐 삽과 오함마를 비롯한 각종 공구를 내주었다.
개중에서도 나는 특이하게 노가다 경험도 없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엑소스켈레톤 면허를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우습게도 군대에서 취득한 면허였다.
'중대장 그 새끼가 날 부려먹으려고 엑소스켈레톤 면허 시험을 보게 할 줄은 몰랐지.'
이것도 다 인생 경험이라고, 군대 나가서 남들에게 자랑할 것 하나 정도는 가지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꼬드긴 탓에 공부했고, 면허를 따버렸다.
그다음은 모두가 알고 있는 헬피엔딩이었다. 중대장과 행보관이 원하는대로 다 해-줘야하는-주는, 근육이 헤픈 무상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짬내서 면회를 왔던 어머니와 여동생과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만약 그때로 회귀한다면 가장 먼저 영창도 각오하고 중대장의 멱살부터 잡을 것이다.
"젊은 친구가 엑소스켈레톤 면허를 가지고 있다고? 학원다니는 거 돈 많이 깨졌을 텐데?"
"정부가 그런 쪽으로는 세금 지원 잘 해주잖아요. 운이 좋았죠."
정확히는 군대가 노예 양산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지만, 그거나그거나.
엑소스켈레톤은 기본적으로 부품 하나하나가 비싼데다 대기업의 정수(프리미엄)가 담겨 있기 때문에 학원들도 비싼 수강료를 받았다.
군용과는 살짝 다른 산업용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자 잠시동안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엑소스켈레톤은 피부에 맞닿은 생체 인식 패드로부터 착용자의 뇌가 보내는 전기 신호를 받아들여 금속 부품을 의식대로 움직일 수 있는 활동 보조 장치다.
본래 개발목적은 반신불수나 사지결손 같은 중증 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상용화된 것은 군용이었고, 그다음은 산업용, 가장 마지막이 의학용이었다.
2025년 유인 달 탐사에서 신형 우주복에 탑재된 차세대 배터리 덕분에 최대 12시간 움직일 수 있으며, 모델에 따라 다르지만 산업용은 평균적으로 약 1톤의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조금 과장을 더하자면 인간이 소형차 한 대를 번쩍 들고 자유자재로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당연히 제 2의 산업혁명을 불러왔고, '10년안에 지하 12km에 신도시 건설하기'도 반쯤은 성공하게 만든 주역이다.
등 뒤의 척추 골격에서 뻗어나온 스마트글라스가 내 안면을 덮었다. 작업 도중 과한 빛이나 파편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 겸 엑소스켈레톤의 운용을 도와주는 UI를 출력해주는 용도다.
작업자들이 얼추 준비를 끝마치자 작업 반장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작업 지시를 내렸다.
2회차 인생이란, 남들처럼 무조건 치트나 기연을 얻는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 2회차 인생은 무의미하고 지루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