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1화 (11/211)
  • 세컨드 라이프(1)

    '제발 눈 뜰 때마다 뭔가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정신은 차렸지만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그런 생각을 품었다. 기이하게도 내 인생은 눈을 뜨기 전과 뜬 후로 극렬하게 나뉘는 것 같다는 기분을 최근 들어 자주 느낀다.

    "자는 척 하지마."

    "응흣?!"

    빠꾸없이 옆구리로 치고들어오는 발차기에 나는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보니 여동생이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걱정 많이 하셨어. 전력이 다시 복구됐다 싶었는데 난데없이 경비업체 직원들이 오빠를 업어서 데려왔으니까."

    "환자인 줄 알면 좀 더 냅두지 그랬냐? 아오......"

    옆구리 문지르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세우자 전신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내가 격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뭔가에 세게 부딪친 것도 아닌데 엄살을 부리는 것 같다고?

    '초긴장 상태로 10분 이상을 보냈는데 당연히 근육이 비명을 지르지.'

    내가 무의식적으로 한계까지 내몰았던 근육은 쉽게 말하자면 과부하 상태가 상시 유지되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인간이 위기 상항에 혼자서 차를 번쩍 들어올리는 것처럼, 초긴장 상태의 근육은 언제라도 자신이 한계를 뛰어넘은 힘을 사용할 수 있게끔 만전으로 대기한다. 그걸 10분 이상 유지했으니 실신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머리에 피가 가지 않았던 거야.'

    머리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내 몸이 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곧바로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이런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몸은 기본적으로 생각하고, 조절하고, 한계치를 정해두고 움직이게끔 설계되어 있다.

    "후우...그래서 난 몇 시간이나 뻗어있었는데?"

    "대충 3시간?"

    "불이 들어오는 걸 보니 정전 사태는 해결했나봐?"

    "2시간 전쯤에 해결됐다고 입주민 상대로 공지가 내려왔어."

    "바깥은?"

    귀를 기울여봤지만 더이상 총성 같은 건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바깥 문제도 해결됐다는 거다.

    "그건...잘 모르겠어. 다시 지저 도시 통신이 연결되서 엄마가 아빠한테 전화를 했거든. 그런데 별 일 없으니 별도의 통보가 있기 전까지는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대."

    "총성이 멎은 건 얼마나 됐는데?"

    "전력이 복구되고나서 얼마 뒤에 멎었으니까, 1시간 30분 전쯤?"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지하 기계실에서 비상발전기를 가동시키고 기절한 게 3시간 전쯤, 전력이 복구된 건 2시간 전쯤, 그리고 총성이 멎은 건 1시간 30분 전쯤이라고 한다.

    여기서 나는 전력이 완전히 복구된 후부터 총성이 멎기까지의 30분보다, 내가 기절하고 나서 전력이 완전히 복구되기 전까지의 1시간이 더 신경쓰였다.

    전력이 복구된 다음 30분 동안 총성이 멎지 않은 것은 '뒷처리' 때문이었겠지.

    신도시에 전력이 복구되기 전까지 바깥의 군인들이 상대하고 있던 것들은 1~2시간 총질한다고 해서 정리할 수 없는 것들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전력이 복구되자마자 고작 30분만에 총성이 멎었다? 이는 필시 '빛'과 연관성이 있음을 의미했다.

    빛이 없었던 상황에선 군인들이 전투를 이어나가는 게 고작이었고, 빛이 존재하는 상황에선 군인들이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는 건 바깥의 무언가가 빛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빛에 취약하다던가.

    '그럼 지하 1층에서 기계실로 들어오려 했던 놈도......?'

    비상발전기가 전력을 공급하자마자 지하가 훤히 밝아졌으니, 당연히 어두웠던 기계실을 기억하고 필사적으로 기어들어오려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막상 들어와보니 기계실 내부도 밝았던거고. '비명'을 내지른 것도 빛을 피할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빛을 피하고 싶었다면 날 따라서 환풍구로 기어들어왔겠지. 하지만 환풍구까지 따라오진 않았어.'

    거기서 새로운 가설 2개를 떠오른다.

    1. 환풍구까지 따라들어올 수 있을 만큼 유연하거나 몸집이 작지 않다.

    2. 빛에 노출될수록 급격하게 약해져 환풍구까지 따라올 힘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1번과 2번 가설중 어느쪽도 맞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것은 기계실의 통짜 금속문을 파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자랑했으니 인간과 같은 덩치일리가 없다. 좀 더 거대하거나, 유연하지 않은 비대한 근육을 가지고 있겠지.

    그리고 빛에 정말로 취약했다는 전제가 맞다면, 빛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계실에 들어오려 했던 만큼 도중에 엄청난 힘을 소모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그것이 기계실 문을 파괴할 때는 필사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들려온 절규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

    상황 증거들을 종합적으로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그 정체불명의 무언가는 빛에 취약하고,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최소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뭘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번엔 어디서 다치고 와야 가족들의 걱정을 더 받을 수 있을까 고민중이야?"

    "넌 내가 그런 관심종자 같냐?"

    "그럼 아냐? 우리 가족중에 유별난 건 오빠 뿐이잖아."

    "자기는 아닌 것처럼 말하네. 양심 어디?"

    "난 최소한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라도 하잖아."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콧대를 높이는 여동생을 한 대 쥐어박으려다 말았다. 여동생은 이런식으로라도 속에 쌓인 걸 풀어두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해 반쯤 미쳐버릴 테니까.

    "후, 됐고. 어머니는?"

    "지금 식사 만들고 계셔. 엄마한테 사과드려야 하는 거 알고 있지?"

    "내가 너냐?"

    "뭐래. 예절 교육은 내가 더 많이 받았거든?"

    곧 그게 자랑할 거리가 아니란 걸 스스로 깨달은 여동생은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였다. 저렇게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면 스트레스가 쌓였다는 증거다.

    "야, 넌 나중에 남자친구 사귀면 절대 나한테 소개시켜주지 마라."

    "뭐?"

    "내가 네 남자친구한테 네 본성 다 까발릴 건데 뭐 믿고 나한테 소개시켜주려고?"

    "이 미친 놈이!"

    여동생이 내 무릎을 미친듯이 차댔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이미 고통 MAX 상태라서 더 아플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다 그만하고 이만 나와서 식사하렴."

    복도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우리는 긴급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바깥 상황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집구석에 기어들어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식탁에는 지저 도시에 이제 막 입주한 피난민들의 식탁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어머니가 가장 잘하시는 한식의 대표인 잡채와 불고기, 된장찌개, 각종 나물무침과 고슬고슬한 쌀밥이 식욕을 자극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걱정끼쳐드셔러 죄송해요."

    "...괜찮단다. 아버지가 없을 때는 네가 이 집의 남자고 가장이니까 반드시 뭔가를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이해한단다."

    "오빠말고 내가 가장하면 안돼?"

    "그건 네가 오빠보다 잘 하는 게 하나도 있을 때 생각해보자꾸나."

    "아씨! 너 때문에 팩트 폭력 당했잖아."

    밥상머리에서 내 발을 툭툭 차대는 녀석에게 피식 웃어주곤, 어머니 다음으로 수저를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간편식을 먹은 것 빼면 지금까지 배에 넣은 게 없었다. 어쩌면 급박한 상황에서 불안감 때문에 구토를 하지 않았던 건 배에 든 게 없었기 때문이겠지.

    흰 눈 같은 밥을 한숟갈 퍼서 불고기와 김치를 얹어 먹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지저 세계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식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벌써 식재료 공급이 됐나요? 입주한지 얼마 안 되서 식재료 공급은 아직 안 된 줄 알았는데."

    "경비업체 직원들이 네 도움을 받았다고 특별히 우선 배급을 해주더구나. 경비업체 직원들도 해결 못한 비상발전기를 가동시켰다면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건 해결 못한 게 아니라 할 수 없었다고 봐야 했다.

    '그러고보니 나보다 먼저 지하에 내려갔던 시설관리인과 경비업체 직원 둘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기계실에 그 사람들이 옮긴 기름통과 공구함은 있었지만, 정작 그 사람들은 없었어.'

    깨진 손전등, 비상발전기를 가동시키려 했던 흔적, 그리고 비스듬하게 열린 기계실 문에 묻어있던 끈적한 액체.

    그것들을 제외하면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뭐, 경비업체가 알아서 하겠지.'

    실종된 사람이 있다는 게 확인되면 그 사람들이 알아서 찾을 거고, 건물 내부의 보안 문제도 더욱 철저하게 신경쓸 거다. 민간인에 불과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없었다.

    나는 식사를 계속하려다, 문득 우리 가족이 식사중 대화에 익숙치 않다는 걸 깨닫고 원격으로 TV를 켰다. TV 켜줘, 하고 말 한마디만 던지면 주택관리 AI가 알아서 TV도 켜준다. 참 편한 세상이다.

    다행히 지저 도시에도 어엿한 방송국이 존재했는지, 바깥 세상이 아닌 지저 도시 TV 채널이 나왔다. 애초에 대한민국 제 2의 수도로 만들려 했던 장소인 만큼 각종 문화와 기술 산업 부흥을 위해 투자하지 않은 종목이 없을 거다.

    -안녕하십니까 신도시 주민 여러분. KSS의 8시 뉴스 앵커 김동훈입니다.

    노련한 저녁 뉴스 앵커조차 지저 도시 입주 첫날만에 뉴스를 진행하게 될 거라곤 예상 못했는지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필요이상으로 꽉 조인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면서 포커페이스를 되찾으려 노력했다. 촬영팀도 주변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정도의 NG는 그냥 넘어가주는 분위기였다.

    -갑작스럽지만 속보입니다. 현재 신도시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에 자연스럽게 책임소재는 한전(한국전력공사)측에게 돌려졌습니다만, 한전 CEO 최말수 씨는 갑작스러운 지저 신도시의 입주와 도시 전역의 전력 공급을 예상치 못한 탓에 불가피한 사고가 있었다고 긴급 입장문을 밝혔습니다. 내부적으로 아직 인프라 배치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도시에 전력을 공급하려다 몇몇 지역에서 누전과 과부하 사태가 발발, 그것이 곧 치명적인 화재와 셧다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향후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점검과 정비, 그리고 원활한 전력 공급을 위한 인프라 배치에 힘쓸 것이라고 밝혀......

    "우리만 정전이 일어난 게 아니었구나."

    "당연하지.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긴 특별 거주 구역인데 여기만 정전이 일어나는 게 더 이상하잖아."

    "다른 지역에 정전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고?"

    "다른 지역에 정전이 일어나도 괜찮다는 게 아니라, 여기서 정전이 일어나는 게 위험하다는 의미야. 자기들이 상류층에 VIP 대접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모아둔 곳인데, 여기만 정전이 일어났다? 너 같으면 어떨 것 같냐? 당연히 들고 일어나겠지. 몸으로 부딪치는 서민들이랑 다르게 상류층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높으신 분들을 압박하니까."

    내 지적에 여동생이 입을 삐죽 내밀며 식사에 집중했다.

    백날천날 서민들이 시위하고 높으신 분들을 공개적으로 규탄하는 것보다, 권력과 재력을 두루 갖춘 인간들이 높으신 분들을 규탄하는 게 훨씬 더 효과가 있다. 기본적으로 기득권들끼리 서로 충돌할 일은 정치 뿐이지만, 어떤식으로든 기득권들끼리 부딪치면 서로 잃을 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서민들보다 기득권들의 말에 더 귀기울이는 것도 당연하지. 선거철 빼고.

    -또한 정부에선 공식적으로 내일부터 진행될 2030 신도시 부흥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2030년부터 20~30대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신도시를 성공적으로 부흥시키고자 하는 의미에서 기획된 프로젝트로써......

    "오빠 내일부터 노예 된다는데?"

    "나도 아니까 조용히 해라."

    "오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나도 똑같으니까 괜찮잖아."

    "한성이는 너보다 더 힘든 일을 하게 되잖니."

    사무직보다 막노동꾼(HR)이 더 힘든 게 맞긴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런 걸로 누구의 족쇄가 더 크고 아름다운가를 논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우린 이 지저 신도시에 전신이 묶인 상태니까. 누가 더 오래 사느냐보다 누가 먼저 죽느냐가 관건인 치킨 게임이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일반 국민으로 살기 참 힘드네.'

    상식적으로 군대에서 노예로 부려먹었으면 일반인으로 살 기회정돈 주는 게 도리 아닌가.

    나는 밥을 꼭꼭 씹어넘기면서도 내일부터 시작될 새로운 생활에 몸서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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