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61화 (261/265)

버려진 딸, 새로운 신(3)

* * *

‘기둥’의 문을 열고 들어간 에키드나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조디악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던 카르멘이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유피테르처럼 작정하고 몸을 단련하지는 않았으나, 마나 제어에는 자신이 있었다. 발을 빠르게 하는 건 포션 먹는 것만큼 간단했다.

육체 강화에 미쳐버린 헤라클레스 가문조차 자신의 의견을 듣기 위해 얼음성에 방문하지 않았던가.

입에서 단내가 나는데도 정작 카르멘은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마족과 손을 잡는 건 생각보다 더 위태롭군.’

에키드나의 손을 잡은 걸 후회하던 참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빌어먹을 아들놈에게 한 방 맞았기에.

사실 그건 자신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계획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에키드나의 잘못이 더 컸다.

유피테르의 기운이 느껴졌다면, 바로 알려주었어야만 했다. 그럼 바로 대책을 세웠을 테니까.

모든 변수에 대처할 수는 없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예측 가능한 일을 무시하다가 사고가 벌어지는 건 그의 완벽주의에 반(反)했다.

하지만, 방금 전 이루어진 대화에 응어리가 단번에 풀려버렸다.

‘거기서 그런 대화를 할 줄은….’

무슨 뜻인지 모르는 단어들이 섞여 있었으나, 동업자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라면 마지막에 웃을 수 있을 듯했다.

팍!

갑자기 에키드나가 발을 멈추자, 딴생각에 빠져 있던 카르멘의 얼굴이 등에 부딪혔다.

마왕 비이자 신의 딸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육체였다. 강철의 성벽이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카르멘은 시뻘건 코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코피가 나는 불상사는 없었고, 코뼈도 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얼얼함만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카르멘은 포션 하나를 꺼내 비워버리고서 물었다. 평소와 다른, 어찌 보면 코맹맹이와 비슷한 소리였다.

“여기가 그 중심부인가?”

“너답지 않은 실수라니. 무슨 생각이야. 이제 와서 손을 잡은 걸 후회하기라도 해?”

어느 정도 핵심을 찌른 에키드나의 말에도 카르멘은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신의 딸이 걱정해주다니 이거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군.”

“말은 잘해.”

“그보다 여기가 새로운 신으로 거듭날 장소가 맞나.”

“그래. 여기가 기둥의 중심이야.”

카르멘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기둥은 세계의 법칙을 관장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법칙에는 당연히 마나와 마법도 들어 있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자들이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공간이었다.

‘우자(愚者) 놈들은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모르겠지.’

지금의 마법사는 고이다 못해 썩어버렸다.

현 상황에 만족해서 살이 뒤룩뒤룩 찐 엉덩이를 움직일 생각조차 안 했다.

과거의 마법 체계를 되찾아 돌아가자고 열변을 토하는 이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놈들도 멍청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권력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일 뿐.

‘나이아드 님을 봐라.’

아르테미스의 초대 가주는 현대 마법 체계로도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발자취 하나하나가 역사에 길이길이 보전되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당연히 그녀와 비견되는 마법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이아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것. 가능하다면 그녀보다 더 위를 노리는 것.

그게 카르멘의 목표였다.

“이건 상관없는 거고. 에이, 이것도 아니네. 으음…. 이쯤에 있었는데.”

중심부에 설치된 마법진에 오른 에키드나는 능숙하게 무언가를 찾았다.

“내가 여기 올 줄 알고 있었던 거야? 아무리 어머니라도 그럴 리는 없어.”

“아니면, 네 짓인 거니. 발칙한 동생아.”

편안하게 움직이는 손과 다르게 그녀의 입은 쉬지 않고 불만을 뱉어냈다.

그걸 본 카르멘의 얼굴에 놀라운 빛이 들다가 바로 사라졌다.

‘저렇게 급한 모습은 처음 보는군. 끝이 코앞이라는 뜻인가.’

묘하게 말을 끌고, 매혹적인 표정은 전부 연기였다.

처음 만났을 때의 에키드나는 정확히 지금과 같은 말투를 사용했었으니.

원래대로 돌아온 걸 보니 정말로 끝이 다가온 듯싶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입가가 달처럼 휘었다.

에키드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이 바로 자신의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으니까.

바로 그때.

꾸우우우욱!

엄청난 두통이 몰려왔다.

코가 부서질 듯한 아픔을 단숨에 잡아먹고 멈추지 않았다. 뇌를 그대로 파괴할 기세였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카르멘은 한 사람, 아니 한 마족을 애타게 불렀다.

“에, 에키드나아아악!”

“아, 미안. 이제 괜찮아질 거야.”

에키드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한결 여유로워진 카르멘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며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건 뭐였나. 네가 공격했을 리는 없고. 내가 알기로 이렇게 머리가 타는 듯한 고통을 주는 마법도 없다. 그래, 마치, 알면 안 되는 걸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마등을 봤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아픔에 카르멘의 말도 절로 늘었다.

에키드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정확해.”

“그게 무슨 소리지.”

“방금 세계에 신호를 보냈어. 내가 신이 되었다는 걸 공표한 거지. 마나를 가진 자라면 이제 이걸 상식으로 여기게 될걸?”

“그것만으로도 신이 될 수 있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상식을 바꾼 것만으로도 신이 된다니. 그건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창조신 레아.

카르멘이 나이아드를 최고로 여겨도 신 앞에서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세계를 구축하고, 움직이는 원리를 만든 만물의 어머니. 그 무거운 자리를 쉽게 대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신의 딸이라고 하더라도.

태초의 마족이자 마왕이었던 티폰도 신의 축복을 받은 이에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기둥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랐지만, 에키드나에게서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에키드나는 몸을 돌려 카르멘의 은색 눈동자롤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소원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지켜보기나 하렴.”

이게, 원래 신의 딸이 가지는 가치니까. 라는 말은 가슴속에 숨기고서.

* * *

에키드나의 말처럼 세아니아 대륙은 혼란함에 맥을 추지 못하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챈 건 성국 크레이타였다.

“교황 성하!”

“무슨 일이지. 지금 성녀와 이야기하고 있는 게 보이질 않나?”

한 사제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다가오자 교황이 얼굴을 찌푸렸다. 감히, 교황에게 보여줄 태도가 아니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성녀 프레이야가 강하게 쏘아붙였다.

“오스티안 성하. 설마,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고 지금과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 거야? 그런 거라면 유피테르에게 연락해야 하겠는데….”

“다, 다, 다, 당연히 아니지.”

그 말에 오스티안이 벌벌 떨었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의 이름은 뇌리에 똑똑히 각인되어 있었다. 평생을 다해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유피테르 님이 없었다면….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하군.’

낙원교가 할퀴고 간 상처는 여전했다.

성국 해방 전선이 없었다면 복구작업조차 하지 못할 뻔했다. 지금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교황청만 해도 불완전했다.

숨 막히는 경건함만 그대로였을 뿐.

“크흠흠. 그래서 무슨 일이지?”

“교황 성하. 저희가 모시는 신이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이런 걸 질문하다니 자네 사제가 맞나? 혹, 낙원교의 생존자라면….”

“저는 어떻게 해도 좋으니 대답을 해주십시오!”

사제의 간절함에 오스티안은 웃으며 그들이 모시는 신의 이름을 말하려 했다.

“― 님을 신으로 모시는 ―교잖아 나는 그곳의 교황이고.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아까까지만 해도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뇌가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목에는 무언가가 걸린 것 같았다.

이미 낙원교에 한 번 당한 자들이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오스티안이 프레이야에게 물었다.

“성녀. 우리가 모시는 신의 이름을 말해 봐라.”

“레아 님이잖아. 교황이 된 걸 축하해주려고 했더니. 지금 그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은 거야. 나 참, 진짜 유피테르에게 연락한다?”

사제와 교황과는 다르게 프레이야는 어렵지 않게 ‘레아’의 이름을 밖으로 내뱉었다.

레아의 이름을 가슴에 품는 건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저 둘은 레아교의 교황과 사제였다. 이런 걸로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궁금했다. 만약, 이게 장난이라면 진심으로 한 대 때려줄 생각까지 했다.

“유피테르 님과 연락할 수 있나?”

오스티안이 전에 없을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당황한 건 프레이야였다.

“어, 어 일단은 연락할 수 있는데. 왜?”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일반 신도들부터 레아 님의 이름을 잊어가고 있겠지. 안 그런가?”

오스티안의 말에 프레이야는 황급히 사제에게 질문했다.

“저 말이 사실이야?”

“예. 맞습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에 신도들이 두려워 저를 찾아왔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봐.”

프레이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정 구슬이 설치된 곳으로 이동했다. 사제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새롭게 비치된 아티팩트였다.

성녀는 비상시에 교황의 직무를 대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때였다.

프레이야는 망설임 없이 아티팩트에 신성 마나를 불어넣었다.

“아무리 성녀님이시라고 해도 이건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쉬잇. 그녀를 방해하지 말렴.”

오스티안은 격분하려는 사제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사제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교황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행동이었으니까.

그래도 이건 필요한 일이었다.

‘성녀와 나와 다른 건 딱 하나뿐이지.’

오스티안은 아직 교황의 지팡이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성녀는 달랐다. 그녀는 몇 년 만에 탄생한 오를레앙의 적격자였다.

‘신의 이름을 잊는다는 게 말이 돼?’

연결된 모든 사제들과 이야기를 끝낸 프레이야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한시도 신을 잊지 않는 자들이 레아의 이름을 입에 담지 못했다.

“교황. 뭘 알고 있는 거야?”

“그 전에 유피테르 님과 연결해줘. 지금 필요한 건 그것뿐이다.”

* * *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 몬스터가 몰려옵니다.”

“어째서 초대 가주님의 결계가 파괴된 거지?”

“마법사단은 뭣들 하고 있나. 오늘을 위해서 훈련한 거 아닌가.”

“이미 달려나갔습니다.”

아르테미스의 얼음성에선 결계가 갑자기 사라졌고,

“교수님. 성국의 게이트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비 오류 아냐?”

“아닙니다. 몇 번을 정비해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나도 조금 이상합니다.”

“마나가 이상해? 난 모르겠는 걸.”

“그게. 마법을 쓰지 못하는 아카데미생들이 몰려왔습니다.”

“뭐? 그럼 처음부터 그걸 말하라고. 당장 그곳으로 안내해.”

델포이를 포함한 아카데미들은 게이트의 오류와 함께 마나에 버림받은 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