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60화 (260/265)

버려진 딸, 새로운 신(2)

* * *

2차 대륙 전쟁이 끝나갈 무렵, 한 소녀가 창조신 레아의 계시를 받았다.

신음하는 인간들을 도와라.

목소리에 이끌린 소녀는 대륙을 헤매다가 바위에 꽂혀 있던 검을 발견하고 뽑아냈다.

그 후, 같은 목소리를 들은 한 노인과 함께 레아교를 설립하고, 성국 크레이타까지 세운다.

레아교를 믿지 않더라도 알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공작 가문 출신이었던 유피테르 역시 기초 상식으로 배웠었다.

‘성검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유피테르는 에나스의 생각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성검 오를레앙의 주된 능력은 신성 마나를 증폭시켜주는 거였다. 무한정 늘어나는 건 아니어도 아티팩트처럼 효율을 극대화해주었다.

오흐트도 그 이상의 힘을 기대하지 않았다.

신이 준 질문을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풀어나가고 싶었기에. 성검에만 의지하다간 마족처럼 선을 넘어버릴 것만 같았다고 말했었다.

유피테르의 의문이 풀릴 기회는 곧바로 찾아왔다.

잠들어 있던 오흐트가 천천히 눈을 뜨며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마스터?”

스르르륵―

오흐트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환자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동작 하나하나가 신중했다.

일자로 몸을 세운 오흐트는 시선을 돌리며 이곳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유피테르, 트리아, 테세라.

보자마자 마음이 든든해지는 동료들이었다.

그리 오래 잠든 것은 아닌지 배신자들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안 돌아왔다 이거지?’

자신을 누워있게 한 범인보다도 배신자들이 더 미웠다.

바득바득 이를 갈며 마지막 인물을 확인하려고 할 때, 그녀의 눈동자가 밑도 끝도 없이 커졌다.

“에나스 언니가 있네?”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나 싶어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에나스가 무감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렇게 강력하면서도 순수한 기운을 내뿜는 건 첫째 언니뿐이었다.

“널 치유해준 사람이 바로 그녀야.”

“구해줘서 고마워.”

유피테르의 말에 오흐트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도움을 받으면 감사함을 표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오흐트를 보며 에나스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

막 깨어난 환자가 에나스가 뭘 원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던 오흐트는 곧바로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신호를 포착한 유피테르가 에나스의 행동을 설명해주었다.

“오를레앙을 원하고 있더라고.”

“어머, 나를? 첫째 언니가 나를 필요로 하다니. 그거 진짜 영광인데.”

타르타로스에 있던 테세라도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에나스는 더했다.

애초에 기둥을 지키는 일을 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 세력, 특히 마족이 기둥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 대륙은 다시 한번 멸망의 공포에 떨어야만 했으니.

정령이었던 에나스는 정말로 감정을 느끼지 못했고, 다른 이의 도움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유피테르는 신난 오흐트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잘못 말했군. 네가 아니라 성검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에이 뭐야. 그런데 성검은 왜? 마스터라고 해도 제 위력을 내지 못한다는 건 알잖아?”

“나도 모르지.”

유피테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돌리자, 오흐트의 시선도 자연스레 같이 이동했다.

“진짜 성검 필요.”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진짜긴 한데….”

오흐트는 말끝을 흐렸다.

알려진 이야기와는 다르게 그녀가 발견한 성검은 두 자루였다. 그중 하나만 사용했을 뿐.

언젠가는 비밀을 풀어주려고 했었지만, 마녀로 몰리면서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모습을 감출 때 성검을 버리고 간 것도 어차피 한 자루가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흐트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성검이 원래 두 자루라는 건 알고 있어?”

“긍정.”

에나스는 예의 그 표정으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성검이 두 개라고? 말도 안 돼. 바실리는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내가 가진 정보에도 그런 건 없었다, 후대야.”

“그… 마족들도 몰랐는데요.”

칼리스토의 마스터, 정보 담당 그리고 성국의 최대의 적인 마족조차 모르는 기밀 정보.

꽤 오랫동안 이 사실을 숨겨왔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낄 만도 하지만, 오흐트는 그러지 않았다.

“바실리 님께서 그러라고 했어.”

“바실리가?”

“신이 두 개의 성검을 만들었다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셨으니까.”

무려 신의 딸의 충고였다.

신의 말을 듣고 그 길을 걷던 성녀가 무시할 리가 없었다.

“신의 딸이라는 위치에 있기에 알려줄 수 없는 사실도 있던 건가.”

유피테르가 중얼거렸지만, 확실하게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당사자인 오흐트조차 그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기에.

그때, 에나스가 오흐트에게 또 손을 내밀었다. 어서 성검을 꺼내 달리는 손짓이었다.

“성검.”

“알았어. 주면 되잖아 주면!”

오흐트는 한결같은 태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었다.

성격대로 아공간 내부는 잘 정리되어 있었다. 성검을 꺼내는 건 쉬웠다.

“여기 있어.”

오흐트는 성검을 꺼내 에나스에게 건네주었다. 가까이 와있었기에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다.

“확인.”

에나스는 한 발자국 떨어져 성검을 확인했다. 진짜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신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행동에 오흐트가 아쉬움을 호소했다.

“내가 왜 첫째 언니에게 거짓말을 하겠어. 좀 믿어주면 안 돼?”

“정령에게 인간의 상식을 바라는 게 이상한 거다.”

유피테르는 그런 그녀를 달래주고서는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검은 뭐였던 거지? 지금 꺼낸 검은 완전히 다른 기운을 지녔는데.”

“칼리스토가 되며 얻은 능력으로 오를레앙을 복사한 거야. 명색이 신의 딸의 수호자들인데 이런 것도 못 하겠어?”

“그럼 저 성검을 쓰면 더 강해지는 건가?”

“그건….”

막힘없이 대답하던 오흐트의 입이 처음으로 닫혔다.

‘저 검을 쓰면 더 강해지냐고?’

성검 오를레앙만큼의 힘이 있다면 비슷한 위력을 내는 건 쉬웠다.

칼리스토가 되기 전에도 어지간한 몬스터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

그러나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저 검에 어떠한 힘이 잠들어 있는지 몰랐으니까.

신의 계시란 일단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수수께끼였다.

“나도 몰라. 저건 이름조차 없던 검이니까. 오히려 에나스 언니에게 물어보는 게 빠를지도.”

오흐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에나스에게 꽂혔다.

타이밍이 좋았던 건지, 에나스는 성검을 들고 유피테르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기둥의 지팡이.”

“지팡이라니? 이건 어떻게 봐도 검이지 않나.”

정령의 눈이 자신과 다른 것을 찾아냈나 싶어 유피테르는 마나 감지를 사용해보았다.

그러나 이름 없는 성검은 여전히 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걸 가지고 가보면 알게 될 것.”

“그건 무슨 의미지.”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길었으나, 여전히 뜻은 알 수가 없었다.

‘기둥에는 에키드나가 있었지. 그럼 이게 바실리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건가.’

유피테르가 에나스의 말을 곱씹어보려고 할 때, 에나스가 이름 없는 성검을 던졌다.

휘리릭!

성검이 자유롭게 하늘을 가로지르며 유피테르에게로 향했다. 단련을 잊지 않은 그였기에,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어렵지 않게 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자칫 잘못하면 성검에 크게 베일 수도 있는 상황에 유피테르는 화를 냈다. 하지만, 에나스는 신경을 쓰지도 않고 행동했다.

손가락을 튕기는 것조차 없었다.

에나스가 바라보자마자 유피테르의 주변에서 공간 이동의 빛이 환히 쏟아졌다.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

유피테르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아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반응이 너무 늦어진 탓이었다. 한 번 배신을 당하긴 했지만, 에나스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에나스에게는 마음과 감정이 없었고, 오로지 칼리스토의 의무만을 시행하는 존재였기에.

칼리스토의 마스터가 허무하게 마법에 당하자 비밀 거점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트리아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일단, 첫 번째로 칼리스토 계약을 맺은 자였으니까.

“언니, 이게 맞아?”

“긍정.”

한 번 물꼬가 트이자 테세라와 오흐트도 대화에 참여했다.

“대체 마스터를 어디로 보낸 거예요?”

“그 성검이 뭔지는 설명해주고 보내는 게 맞지 않았을까? 에키드나도 또 다른 신의 딸이라고 하던데.”

“그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야. 내가 잠든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칼리스토 자매들은 폭주하듯 저마다 말을 쏟아냈지만, 에나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자매들을 지켜볼 뿐.

“운명.”

그녀는 이 한 마디만을 남겨놓고 저택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강제로 공간 이동을 당한 유피테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에나스의 말에 거짓은 없었어.’

성국의 아티팩트가 정령에게도 먹혀들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짧은 이동이 끝나고 빛이 보였기에.

시야는 돌아왔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유피테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어디로 이동했는지 알기 위해 마나 감지를 펼쳤지만, 마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별빛 마나를 사용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세계의 기둥인 건가.”

유피테르는 상황을 종합해서 결론을 이끌어냈다.

세아니아 대륙에서 마나를 쓸 수 없는 곳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신의 잔향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이런 곳에서 신의 딸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건가. 막막하군.”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던 유피테르가 처음으로 엄살을 부렸다.

사실, 이게 정확한 비교였다.

별빛 마나를 지니고 있어도 신의 딸을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신성 마나가 신의 잔향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처럼.

지이잉!

유피테르가 묘한 감상에 빠져 있을 때, 이름 없는 성검이 울었다.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는 건가?”

바실리의 반려자로서 아티팩트를 많이 다뤄보았다. 처음 보는 아티팩트라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감이 왔다.

유피테르는 생각을 확인하고자 성검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그러자 더 강하게 진동하는 곳이 분명히 느껴졌다.

마치, 그쪽으로 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야 할 길이 정해졌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상, 어린 시절만큼 약해졌으니까.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야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적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이 앞에서 기다릴 텐데, 그는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유피테르는 고민 끝에 힘을 봉인하던 반지를 모두 벗어 아공간에 고이 모셔두고서는, 성검이 가리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제 정말 마지막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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