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의 계획(2)
* * *
‘어어어어어어어, 어떡하지.’
오흐트의 표정이 미스릴처럼 딱딱해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실수였다.
마족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마나를 사용해서 무의식적으로 반응해버렸다. 마(魔)를 싫어하는 성국 특유의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카르멘의 마법이 무력 시위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싸울까? 아니면 도망갈까?’
그나마 떠올린 두 개의 선택지.
이 중 뭘 골라야 유피테르가 만족할지 오흐트는 고민했다.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카르멘이 서드 서클을 바라보는 인류 최강의 마도사라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초대 성녀 오를레앙은 비교할 수 없는 명성과 업적을 쌓았고, 칼리스토 오흐트는 그 이상이었다.
저울에 올려놓는 것 자체가 실례였다.
카르멘은 흥미롭다는 듯 관을 바라보았다.
“제 발로는 나오지 않겠다는 건가? 재미있군.”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침입자의 정체까지 알지는 못했다.
타르타로스로 넘어오며 이전보다 강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공작급과는 여전히 소원했다.
타르타로스에서 그는 여전히 이방인에 불과했으니까.
“나오지 않는다면, 나오도록 하면 되는 거겠지.”
말하는 것과는 달리 카르멘은 여유롭지 않았다.
던전을 공략하는 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기에. 간단했던 다른 열쇠들과 달리 마지막 열쇠는 끈질겼다.
마치, 내가 진짜라고 주장하는 듯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낫겠군.’
카르멘은 결단을 내리고는 마나를 넓게 퍼트렸다.
우웅!
검푸른 마나는 이전과는 달리 음울한 기운을 발했다. 마치, 마족을 보는듯했다.
깡!
카르멘이 지팡이로 땅을 한 번 내려치자, 마나들은 날카로운 창으로 변했다.
깡!
한 번 더 내려치자, 검푸른 창들이 관을 향해 쉴 새 없이 달려들었다.
대기 중의 마나까지 흡수해 처음보다 몸집도 우람했다.
카르멘의 마나가 화살이 되어 관을 꿰뚫으려는 바로 그 순간.
퍼어어어엉!
귀를 찢는 소음과 함께 관이 폭발했다.
“신성 마나라고?”
온갖 경험을 한 카르멘이라도 이번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성 마나를 지닌 이와 싸우는 건 특별한 경험이긴 했다. 치유사와 척을 지는 멍청한 이는 세상에 없었기에.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마족들의 땅에서 신성 마나를 쓰는 이라…. 유피테르의 동료로군.”
카르멘은 역시 영민했다.
오흐트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는데도 정체를 알아맞혔다. 물론, 에키드나가 ‘적’의 정보를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마주 보는 건 처음이네? 달의 몰락의 주범 씨.”
“날 상대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오흐트는 숨지 않았다. 신성 마나를 은은하게 흩뿌리며 카르멘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마스터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하지도 않던데. 그건 좀 자의식 과잉이 아닐까.”
“하, 들었던 대로 꽤 당돌하군.”
“당돌이라.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인데.”
문답무용(問答無用)
오흐트는 성검 오를레앙을 꺼내 들고서 땅을 박찼다. 시에라의 검사들이 놀랄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카르멘은 다섯 겹의 방어막을 만들어 검술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이 모든 게 눈 깜빡하는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첫 번째 공격이 막힌 오흐트는 뒤로 물러섰다.
“시동어도 쓰지 않네?”
“이곳에 와서 얻은 것들이 꽤 많아서 말이지.”
“에키드나에게 끌려다니기만 하지는 않다는 소리구나. 하긴, 마스터와 같은 핏줄이니까.”
오흐트는 카르멘의 평가를 바꾸었다.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예상외로 귀찮아질 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는 건 말로만 듣던 공작무기였고, 검푸른 마나는 카테리나의 그것과 비슷했다.
탓!
오흐트는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느린 속도였다.
‘뭔가 있군.’
카르멘은 안심하지 않았다.
고작 한 번 손을 섞은 것뿐이지만, 이상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초대 성녀 오를레앙의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자리할 정도로 들었다.
저건 방심을 유도하는 속임수일 게 뻔했다.
카르멘은 재빠르게 마나를 움직여 일곱 겹의 방어막을 만들었다.
방어막이 완성되자마자 오흐트의 검이 날아들었다.
콰아앙!
상대방을 박살을 내겠다는 신성 마나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겠다는 검푸른 마나.
두 기운의 충돌은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자랑했다.
단순히 충돌한 것뿐인데 던전 자체가 흔들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오흐트의 두 번째 공격도 성공적으로 막아낸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초대 성녀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실망이군.”
“지금 실망이라고 했어?”
“네가 한 것이라곤 신성 마나로 육체를 강화해 돌진한 것뿐이지 않나.”
성녀 오를레앙.
나이아드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혁혁한 정공을 세운 자였다.
고대 전쟁 시기에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전후를 수습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대륙을 공포에 밀어 넣는 몬스터를 토벌하고 다양한 던전을 공략했으니까.
카르멘의 정확한 평가가 오흐트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생각보다 눈이 좋은걸? 아르테미스들은 모두 한가락 하나 봐?”
“비교 대상이 유피테르 녀석이라면…. 단단히 잘못짚었군.”
카르멘은 마법을 준비했다.
두 번이나 막아냈으니 이제는 그가 공격할 차례였다.
카르멘 식 특제 마법 – 밤의 얼음 비
던전의 천장에 검푸른 마나가 군집하더니 이내 거대한 빙하로 변했다.
제각각 다른 모습을 지닌 빙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수를 불렸다.
‘시동어를 썼어.’
위험하다.
본능이 그렇게 속삭였다.
오흐트는 망설이지 않고 방어하는 걸 택했다.
성검을 던전 바닥에 욱여넣고서는 신성 마나를 끌어내 작은 결계를 만들었다.
공격을 막는 평범한 방어막보다는 공간의 성질을 바꾸는 결계가 낫다고 판단했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지워버릴 수 있었으니까.
오흐트 식 특제 마법 – 성스러운 결계
크레이타의 성기사들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기본 결계 마법.
그러나 오흐트의 것은 차원이 달랐다.
레아의 축복을 받은 오흐트가 성검의 힘을 빌렸기에 당연했다.
쾅! 쾅! 쾅!
음습한 느낌을 주는 빙하는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결계를 때렸다.
거대한 질량과 높은 높이.
창조신 레아의 섭리가 마법과 합쳐지자 위력이 몇 배 늘어났다.
그러나 성녀가 직첩 펼친 결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거친 공격이 계속 이어져도 금하나 가지 않았다. 오직 한 겹으로 이루어졌는데도 버텨냈다.
‘별거 아닌 건가?’
예상했던 것보다 위력이 떨어졌다.
평범한 인간들에게 있어 저 마법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마나의 색이 이상해져도 얼음 속성은 남아있었기에.
빙하가 떨어지는 충격은 엄청났고, 공격당한 부분은 바로 얼어붙었다.
그러나 정화의 속성을 가진 신성 마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누구처럼 마나 자체를 소멸시킬 순 없었으나, 성질을 약화할 순 있었으니.
빙하의 폭격이 이어지는 도중에 오흐트가 카르멘을 도발했다.
“왜 마스터가 당신을 두려워했는지 이해가 안 가는걸? 이 공격 방식은 카리나와 다를 게 없잖아.”
“글쎄.”
보유한 힘은 오흐트가 훨씬 위였으나, 심리전은 그러지 못했다.
다양한 경험을 해왔어도 태생적인 천재를 뛰어넘는 건 어려웠다. 이건 배워서 늘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흐트는 포기를 몰랐다.
“공작무기를 들고도 수준이 이러면 마스터가 진작에 초대 가주를 넘었겠는걸.”
그 순간.
카르멘의 기세가 변했다.
인간치고는 대단한 수준에서 마족 공작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마나가 짙어졌다.
카르멘의 냉혹한 눈동자에 지독한 살기가 이글거렸다. 은빛 눈동자는 오직 오흐트의 죽음만을 원하고 있었다.
“그 말, 후회하게 해주마.”
공작무기를 든 카르멘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쨍그랑!
카르멘이 별다른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멀쩡하던 신성 결계가 부서졌다.
전조도 없이 마법이 박살 나자 오흐트는 당황했다.
“뭐, 뭐야?”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카르멘은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강력한 마나를 계속 뿜어냈다.
카르멘 식 특제 마법 – 달빛의 고유 결계
카르멘의 마나가 던전을 뒤덮었다.
검푸른 마나는 빛이란 빛은 전부 집어삼켰다. 그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차단되자 오흐트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젠장, 마나 감지도 안 먹히잖아.’
시야를 막는 건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오감을 지배당하면 대단한 마법사도 명중시킬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나 감지조차 되지 않는 건 익숙하면서도 색달랐다.
이런 기술을 사용하는 건 유피테르나 칼리스토뿐이었으니까. 카르멘이 이런 걸 보여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달이 고개를 들었다.
본 적 있는 광경에 오흐트는 경악성을 내뱉었다.
“이건 마스터와 같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르멘 아르테미스는 분명 마스터의 아버지였다.
두 사람 다 얼음 마법을 사용했다. 또, 마법을 전개하는 방식도 유사했다. 같은 피가 흘렀기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고유 결계마저 같다는 건 말이 되지를 않았다.
고유 마법은 일정 영역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거였다. 쌍둥이. 아니, 쌍둥이의 할아버지가 와도 저건 불가능했다.
오흐트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르멘은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마법을 알아보는 건가. 역시 그놈의 부하로군.”
“어, 어떻게!”
고유 마법이 완성되면 완벽하게 수세에 몰렸다. 최악의 경우 마나가 그녀를 적으로 인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오흐트는 그런 사실 따위 잊어버렸다. 마나를 장악하는 틈을 타 반격하지조차 않았다.
별다른 방해 없이 고유 결계가 완성되자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꽤 놀랐나 보군.”
“….”
오흐트가 대답하지 않자 카르멘은 그녀가 끌릴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싸우고 싶었던 건 온 힘을 다하는 초대 성녀였다. 진심을 낸 오를레앙을 이겨야만 나이아드의 경지를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
“유피테르가 예전에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던 건 알고 있겠지.”
“그건 신의 시험이었다고, 마스터가 그랬어!”
바실리에게 부탁받은 이후, 오흐트는 유피테르의 모든 것을 조사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만 했기에.
오흐트가 주목한 건 유피테르의 어린 시절이었다.
트라우마가 생겼을 정도로 아픈 손가락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흐트는 멈추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일직선상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떤 쓰라린 과거라도 똑바로 마주 보지 않으면 행복한 미래는 영영 오지 않았다.
오흐트의 말에 카르멘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하, 아들놈이 그런 식으로 말했나? 진실을 모르는 멍청이로군. 아니, 그냥 아는 게 무서울 뿐인가. 유감이지만 그건 틀렸다.”
“그럼 당신이 뭔가 한 거야?”
“그 말은 조금 어폐가 있군.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헛소리하지 마! 당신이 에키드나와 오래전부터 손을 잡은 거 다 안다구. 비밀 정원을 봤단 말이야!”
“호오?”
비밀 정원을 발견할 줄 몰랐던 카르멘은 잠시 고민한 후, 말했다.
“유피테르의 마나가 날 선택했다. 그래서 에키드나와 이 무기의 도움을 좀 받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