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족의 그림자(2)
* * *
“헛소리 마라! 인간 주제에 감히 대공님의 이름을 입에 올려?”
베타는 코웃음을 쳤다.
저기서 웃고 있는 은발의 마법사, 유피테르. 그가 인간 같지 않은 실력을 보유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마족의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유피테르가 푸른 마나를 사용해 자신을 제압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었으니까.
‘예상했던 것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반응인가. 어쩔 수 없네.’
베타의 충성심을 꺾을 계획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말이다.
그건 딱히 어려운 방법은 아니었다.
유피테르가 어린 시절 당한 것 중 하나만 사용해도 베타는 견디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
터벅터벅.
유피테르는 천천히 베타를 향해 걸어갔다.
여유가 넘치는 그 모습을 보며 베타는 으르렁거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마치, 하악질을 하는 고양이처럼.
베타의 곁에 도착한 유피테르는 마나를 뿜어냈다. 푸른색이 아닌 검은색의 마나가 공기를 휘어잡았다.
그걸 본 베타는 멍칭하게 입을 벌렸다.
“무, 무슨….”
“이래도 내가 인간으로 보이나?”
두 속성 이상의 마나를 가진 마법사는 현재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 속성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건 오직 고대의 마법사들에게만 허용된 비기였다.
고대 마법을 이은 오크 메이지들을 통해 확인했기에 틀림 없었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이군요. 역시, 신이십니다.’
유피테르의 능수능란함에 트리아는 조용히 감탄했다.
두 번째 마스터는 칼리스토보다 한참 어렸다.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나긴 했으나, 꽃이 피는 게 한참 늦었다.
그럼에도 다방면으로 능력을 활용했다. 이건 칼리스토들에게도 좋은 동기 부여가 되어 주었다.
“저, 정말로 마족님이셨던 거야요? 주인님과 같은?”
베타는 말을 더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
몇 번이나 확인해도 결과는 같았다. 유피테르의 몸을 감싼 건 마족의 마나였다.
돌연변이의 세포 하나하나가 찌릿하고 반응했다.
“그렇다. 잠시 인간을 속이기 위해 모습을 숨긴 것뿐이었다.”
“죄, 죄, 죄송합니다. 제가 몰라보았습니다.”
유피테르를 마족이라고 판단한 베타는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마족들은 전부 가차 없는 성격이었다.
조금이라도 기어오르거나,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면 그 자리에서 폐기 처분되었다.
동료들이 재로 변해버렸을 때의 공포는 여전히 베타를 옭아매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마족다운 위엄이 담긴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머리를 들어라.”
“가, 감사합니다. 마족님. 이 은혜를….”
“시끄럽다. 네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하나! 네 주인이 그런 식으로 가르쳤나.”
“아, 아닙니다.”
“그럼. 네 주인의 이름을 빨리 말해라. 너 같은 돌연변이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하니 말이다.”
진짜 마족이 와도 분간하지 못할 수준의 연기력이었다.
유피테르는 과거 마족들과 교류하기도 했었기에 흉내를 내는 건 식은 포션 먹기였다.
이런 이유로 베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주인의 정체를 밝혔다.
“카, 카르멘입니다.”
“뭐? 크흠흠. 뭐라?”
이번에는 유피테르가 놀랄 차례였다.
상상치 못한 정체에 순간 본심이 나올 뻔했다. 그래도 헛기침을 하며 어떻게든 숨겨냈다.
혹시 연기를 하는 게 들켰을까?
유피테르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베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 정말입니다. 어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헛기침이 제대로 통한 것인지 베타는 유피테르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벌벌 떨며 제발 믿어달라고 호소했다.
“카르멘 비제는 지금 어디에 있지?”
유피테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시에라 제국을 구해주지 않아도 되니, 마족을 쫓는 게 올바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베타는 우물쭈물할 뿐, 카르멘의 소재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게….”
“아직도 내가 마족이라는 걸 믿지 못하는 건가 보군? 그렇다면 가르쳐주도록 하지.”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그림자 채찍
공간을 지배하던 검은 마나는 가시가 돋친 채찍으로 변했다. 그 후, 사정없이 베타의 몸을 후려쳤다.
베타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통을 참으며 신음을 내뱉을 뿐, 반항하지 않았다.
마족에게 대항한다면 오직 죽음만이 남아있었으니까.
“마, 말할게요. 카르멘 주인님은 지금 시에라 제국에서 실험 중이십니다.”
“그게 정말인가?”
“어찌 마족님의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베타가 눈물을 흘리며 말을 끝낸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베타의 몸에서 강력한 마나 반응이 나타나더니 큰 폭발을 일으켰다.
베타를 가둬놓았던 방은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곳곳에 그을음이 져서 원래 어떤 색이었는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나마 방어 마법이 걸려 있어 저택에 피해가 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연기가 걷인 후.
트리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피테르의 이름을 불렀다.
칼리스토의 마스터라면 기습공격에도 끄떡없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고작 인간이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버리는 건 시기상조였다.
“신이시여! 괜찮으십니까?”
폭발 속에서도 유피테르는 멀쩡했다.
푸른 나비가 일렁거리는 결계는 그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었다.
“나는 무사해. 고작 이 정도에 당할 사람으로 본 거야?”
“그것이 아니라….”
“아냐, 농담이야.”
한 없이 진지한 트리아의 태도에 유피테르는 화제를 바꿨다.
트리아의 일 처리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실수가 있었는 지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트리아. 마법진을 숨기고 있는지 검사 안했어?”
“아닙니다. 철저하게 검증했습니다. 베타는 그냥 마족의 마나로 만들어진 돌연변이였습니다.”
“하긴, 네가 모를 리가 없지.”
유피테르는 결계를 해제하고서 베타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어마어마한 폭발의 매개체가 된 돌연변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조건 발동형 마법식이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밖에 없어. 설마, 칼리스토들 중에 배신자가 있는 건가.’
*
트리아가 배신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외부의 누군가가 베타의 입을 막아버렸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저택은 다양한 결계로 보호받고 있었다. 외부인은 함부로 이곳에 들어오지 못했다. 아니, 저택의 존재마저 인식할 수 없었다.
‘이건 증거가 부족하니 다른 쪽부터 확인해야하나.’
칼리스토들을 의심하는 건 싫었다.
그건 바실리의 안목을 평가절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전대 마스터이자 연인인 그녀를 그렇게 취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피테르는 어쩔 수 없이 칼리스토의 문제를 뒤로 밀쳐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가 마스터이긴 했지만, 바실리처럼 마음을 휘어잡은 건 아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마족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했다.
“이런 짓거리를 할 사람은 역시 빌어먹을 아버지밖에 없는데….”
정황 증거들은 카르멘을 범인으로 몰았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망설였다.
카르멘은 에키드나의 동료가 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협력자였다.
당최 왜 그를 마족이라고 생각했는 지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트리아, 인간이 마족이 된 경우가 있어?”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돌연변이체도 그 종족의 한계를 초월할 뿐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베타는 그렇게 말했잖아. 마족 주인님이라고.”
유피테르는 생각에 잠겼다.
새 하얀 머릿속에 카르멘의 특징들이 하나둘 아로새겨졌다.
인류의 배신자
얼음성의 전 가주
조디악의 일원
에키드나의 협력자
마족 공작의 무기
“공작 무기…!”
“신이시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마족 공작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에 그런 힘이 있을 확률은 없나?”
“7개의 죄악을 담은 무기 말입니까. 그 무기는 저보다는 오흐트가 잘 알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물어보면 되겠네.”
* * *
유피테르와 트리아는 오흐트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물론, 나가기 전에 방을 원래의 상태로 복구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택의 식당에 도달하자 오흐트의 모습이 보였다.
산처럼 쌓여있던 케이크의 산은 어느새 평평해져 있었다. 배가 부르지도 않는지 오흐트는 새로운 케이크 접시를 집어 들었다.
포크와 나이프로 케이크를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자르려고 할 때.
“오흐트.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마스터? 무슨 일이야. 갔던 일이 잘 안되기라도 한 거야?”
케이크에 열중했지만, 유피테르가 어디론가 사라진 건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 네 도움이 좀 필요하다.”
“내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물어봐!”
오흐트는 그 좋아하는 케이크를 내버려 두고 유피테르의 근처로 다가왔다. 단 것에 집착해도 칼리스토의 의무가 먼저였다.
오흐트의 입가에는 생크림이 덕지덕지 남아 있었다. 트리아는 아공간에서 냅킨을 꺼내 입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오흐트. 또 이렇게 먹은 겁니까?”
“그치만, 마스터의 케이크가 너무 맛있는걸! 트리아도 마스터의 홍차를 제일 좋아하잖아.”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걸로 했을 텐데요?”
“아, 아 맞아. 마스터 대체 내 도움을 받을 게 뭐야? 누구 다치기라도 했어?”
트리아의 언성이 높아지자 오흐트는 유피테르에게 구조요청을 보냈다.
“인간이 마족이 될 수 있나?”
“반마족을 말하는 거야?”
오흐트는 포인트를 잡아내지 못하고 다른 대답을 했다.
세이니아 대륙의 인간들은 모두 마족들을 싫어했다. 대륙 전쟁을 일으켜 찬란한 유산을 파괴시킨 장본인이었으니까.
“아니.”
유피테르는 고개를 저었다.
“반마족이 아니라 진짜 마족이 될 수 있냐를 물어보는거야. 초대 성녀인 너라면 그 대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유피테르의 말에 오흐트의 표정이 바뀌었다.
쾌활하고 장난기 넘치던 평상시의 모습에서 초대 성녀의 자애로운 얼굴이 되었다.
“그런 미친 짓을 하려는 인간이 있었던 거야?”
“내 아버지가 아마 그런 것 같다.”
“마스터의 아버지라면 카르멘 아르테미스? 조디악이라도 해도 마족이 될 수는 없어.”
오흐트는 유피테르의 가설을 부정했다. 하지만, 유피테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패를 꺼내 들었다.
“마족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무언가 달라질 수도 있나?”
“마족의 무기?”
“그래. 마족 공작들이 사용하는 7개의 무기 중 하나를 그 자가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