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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09화 (209/265)

마족의 그림자(1)

* * *

인간 측이 전투에서 승리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검사들의 분위기는 축 처져 있었다.

오크를 상대하기 위해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어찌어찌 살아남은 검사들은 오크의 습격에 대비해 도망치듯 성문 안으로 돌아갔다.

쿠웅!

드워프의 도움으로 강화한 성문이 굳게 닫혔다.

피곤함에 찌든 검사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편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돌아왔기에 끈끈한 전우애가 가득했다.

“하, 이것 참. 오크들이 공격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미안하다. 너희들의 시체를 수습해주지 못해서.”

“마지막 놈들이 진짜 무시무시했지.”

“난 아직 이 전쟁이 모두 끝나지 않았다는 게 더 두려운데. 혹시, 다른 쪽 애들 소식 온 거 있어?”

헛웃음과 자책이 오가는 상황.

가뜩이나 힘든데, 다른 성문을 지키는 이들의 소식마저 들려오지 않았다.

쉽게 가지 못할 거라는 걸 직감한 검사들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시름하고 있을 때, 세이라 공주는 누군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모습은 검사들의 시선을 끌 만했다.

“유피테르!”

콱―

그녀는 유피테르의 멱살을 쥐고서 강하게 흔들었다. 반항할 생각이 없었는지 유피테르의 몸이 춤을 췄다.

“이것 좀 놓고 이야기하는 게 어때? 멀미가 날 것 같거든.”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돌연변이 오크 어쨌어!”

“돌연변이라니?”

“하, 모른 척하려는 거야?”

세이라 공주는 답답하다는 듯 유피테르를 뿌리쳤다.

하지만, 유피테르는 유피테르였다. 저 멀리 나가떨어지지 않고 두 발로 버텨냈다.

“너, 너, 너, 너어 진짜―.”

세이라 공주는 부들부들 떨었다. 태연하게 있는 은발의 마법사를 보고 있자니 화가 솟아올랐다.

그녀는 황실의 검을 뽑아 유피테르의 목에 겨눴다.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언니!”

“조용히 있어, 오흐트. 나는 대답을 들어야겠으니까.”

서슬 퍼런 목소리에 오흐트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사실, 세이라 공주가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상황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저 유피테르가 알아서 잘 해결해줄 거라고 믿었다.

“베타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그놈을 어디다 숨겼어?”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그럴 이유가 있나?”

“그렇다면 날 왜 재웠어?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그런 거 아냐? 아니라면 제대로 설명해 보라고.”

세이라의 추궁은 끝날 줄을 몰랐다. 유피테르가 느긋하게 반응하는 게 그녀를 더 자극했다.

“세이라 공주, 당신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서 그런 거다. 돌연변이의 힘을 똑똑히 보지 않았나.”

“그래? 그런 식으로 도망가겠다 이거지?”

유피테르가 진실을 말해도 세이라 공주의 귀에 도달하지 못했다.

검사와 마법사들 간에 존재했던 자그마한 불씨가 조금씩 몸집을 키웠다.

“옳소. 마법사가 우리를 도와준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마족과 한패였던 거 아니냐? 인간이 어떻게 혼자서 마족을 물리쳐.”

“공주님이 계신 이곳에 오크 대장이 도달한 거 보면 말 다 했지.”

“맞아 맞아.”

묵묵히 지켜보던 검사들이 합세했다.

정확한 상황은 몰랐지만, 유피테르보다는 세이라 공주의 말을 듣고 싶었다.

정체도 모르는 마법사보다야 같은 검사의 길을 걷는 자를 응원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었으니까.

“당신들! 지금 누구 덕에 이곳에 살아 있는 줄 알기나….”

기가 막힌 오흐트가 유피테르의 옆에 섰다.

생명의 은인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만.”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멈춰 세웠다.

편을 들어주는 건 고마웠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가 나서면 대립만 더 커질 뿐이었다.

‘정신 오염이라도 당한 건가?’

정신 오염은 마족의 특기였다.

마족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킬 수 있는 마법을 여럿 알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마나 감지를 사용해 주변을 전부 훑었다.

그러나 깨끗했다.

마족의 반응은커녕 제대로 된 마나를 보유한 자는 그와 오흐트밖에 없었다.

“공주님 저자가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한 검사가 소리쳤다.

그는 검사의 기감을 통해 마나가 움직이는 걸 읽어냈다. 그러나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마법을 사용했다고 오해해버렸다.

그 말은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대립각이 세워진 지금은 손쉽게 받아들여졌다.

“저 말이 정말이야?”

“전혀 아닌데.”

“미안하지만 유피테르. 이제는 너와 같은 길을 걸어갈 수가 없겠어.”

세이라 공주는 진심이었다.

방금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유피테르 역시 그 변화를 눈치챘다.

‘뭘 말하더라도 소용이 없겠네.’

유피테르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돌연변이가 몇이나 더 남아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정말 마족이 흑막이라면 세 채에서 끝날 리는 없었다.

돌연변이가 한 번만 더 오면 이곳에 모인 검사들은 모두 죽을 게 뻔했다.

류이스크가 뚫리는 건 시에라 제국의 멸망할 거라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유피테르는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로 내가 베타를 숨겼다고 생각해?”

“그래. 그러니 이만 나가줘. 함께 싸운 정이 있어서 목숨을 빼앗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게 좋을 거다.”

세이라 공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축객령을 내렸다. 기가 막히는 태도에도 유피테르는 담담했다.

어차피 베타를 확보한 상태였고,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스터….”

“이렇게 원하는 데 무시할 수야 없지. 이만 돌아가자.”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데리고 공간이동을 사용해 류이스크의 남문에서 사라졌다.

호위들이 사라졌는데도 시에라 공주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너무나도 차가워 손이 베일 것만 같았다.

“봐봐. 저 마법. 평범한 마법사라면 저런 건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

“그러엄. 마블링에서 성적을 보여줬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검사들 역시 앓던 이가 빠진 듯한 표정으로 유피테르가 사라진 자리에 침을 뱉었다.

* * *

유피테르가 향한 곳은 의외로 칼리스토의 거처였다.

공간 이동의 빛이 사라지고 몸에 자유가 돌아오자마자 오흐트가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그런 배은망덕한 녀석들을 가만 둘 거야?”

“너야말로 세이라 공주를 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 평소 너답지 않은걸.”

“마스터가 검사들의 목숨을 구해준 거잖아! 나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안다고.”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더욱 화가 났다.

오흐트는 씩씩거리며 발을 굴렀다. 신성 마나까지 실려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지만, 바실리의 힘으로 강화된 저택은 튼튼했다. 돌연변이를 한 방에 보낼 정도의 힘도 가볍게 무시했다.

때마침 트리아가 방에서 나왔다.

“여기서 그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오흐트. 신이시여 어찌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트리아 언니! 내 말 좀 들어봐봐.”

쇼파로 달려간 오흐트는 트리아를 옆자리로 불렀다. 그리고나서는 억울함을 토로했다. 트리아는 오흐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야기가 끝날 타이밍을 맞춰 유피테르가 주방에서 나왔다. 그의 손에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 딸기 쇼트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이 향은 분명…. 역시, 마스터가 만든 케이크잖아!”

케이크를 보니 우울함이 단번에 날아갔다.

오흐트는 엄청난 속도로 유피테르에게 달려갔다. 180도 달라진 오흐트를 보며 트리아도 안심하고서 그 뒤를 따랐다.

유피테르는 식탁에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홍차도 옆에 따라주었다.

오흐트는 싱글벙글하며 식탁에 앉았다.

“갑자기 케이크라니 누구 생일이야? 마스터.”

“평소에도 많이 줬잖아. 이번 임무 고생했으니까 주는 선물이야. 마음껏 먹어.”

맛있는 음식은 눈으로 먼저 맛본다는 말이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다. 그저 본 것뿐인데도 입에 침이 고이고 배가 꼬르륵거렸다.

“그럼 먹어도 되는 거지?”

“물론이지. 이거 먹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우웅!”

오흐트의 입 안은 이미 케이크로 가득했다. 그래서 발음이 뭉개졌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유피테르는 그런 오흐트를 뒤로 하고 트리아를 불렀다.

“베타는 어떻게 되었지? 정보는 좀 알아냈나.”

“돌연변이는 저쪽에 있습니다. 신이시여, 직접 보시겠습니까?”

“좋다.”

유피테르는 트리아의 안내를 받아 베타를 가둔 방으로 향했다.

* * *

칼리스토 저택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 그럼에도 고문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법 사슬로 묶여있는 베타를 제외한다면.

“우우우웁! 우우우우우웁!”

유피테르를 본 베타는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저항했다. 이런 꼴로 만든 장본인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베타에게서 얻어낸 정보는 얼마나 되지?”

“우우우우우우웁!”

“마족이 오크의 배후에 있다는 것과 오크 지휘관인 지라르 역시 마족의 실험체라는 것 정도입니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마치, 트리아와 둘만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중간에 베타의 목소리가 들려도 가볍게 무시했다.

“마족의 이름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나?”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신이시여.”

“애초에 시간이 부족했을 테니 괜찮아. 이 뒤는 맡겨둬.”

유피테르의 말에 트리아는 감격했다. 정말 신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팅!

유피테르가 손가락을 튕기자 베타의 몸을 구속하던 마법 사슬이 사라졌다.

“야이 빌어먹을 자식아 이거 안 풀어…. 어, 어라?”

갑자기 찾아온 자유에 베타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로 유피테르에게 달려들었다. 해머는 뺏겼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두 주먹이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공격은 유피테르에게 닿지 못했다.

소리소문없이 만들어진 보호막이 베타의 공격을 막아냈다. 돌연변이라고 해도 아티팩트가 없다면 큰 위력을 내는 건 불가능했다.

“젠장! 젠장! 대체 넌 정체가 뭐야. 이런 마법은 주인님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내 정체를 알려주면, 그 주인이라는 자의 이름을 알려줄 건가?”

“흥. 내 주인님의 정보가 너 같은 싸구려 마법사 보다야 훨씬 가치가 있지. 그 정도는 안다고,”

유피테르의 은근한 말에도 베타는 넘어오지 않았다. 충성심이 높다고 판단한 그는 접근법을 바꾸었다.

“내가 마족 대공 중 하나라고 해도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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