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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83화 (83/265)
  • 고요한 밤, 사냥의 밤(9)

    * * *

    “그치만…. 강의가 없어서 심심하다구. 친구들도 모두 겁에 질려서 재미도 없구.”

    “그게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이란 거야. 겁에도 좀 질려보고 그래야 재미있는 삶이 될 거라고 생각은 안 하니?”

    “안 해.”

    오흐트는 마스터의 말에 단 한 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이 재미있는지 항상 진지한 트리아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티격태격하는 게, 마치 아버지와 딸 같았으니까.

    물론,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누가 더 많은지는 협정에 의해서 지켜지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치유 펀치 한 방으로 기절시킨 뒤, 다시 치유하는 기적의 악순환이 지속할 테니까.

    “마스터. 마족들이 날뛰는 걸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데. 대체 그 적절한 때라는 건 언제 오는 거야?”

    “승리란 이미 패배한 자들에게 버터를 바르듯 거두는 거야.”

    피아쿠스를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오흐트는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마족은 전혀 두려운 존재가 아닌데 아무것도 못 하고 환자만 느는 게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으니까.

    특별 유학생으로 있는 이상 그녀도 힘을 전부 드러낼 수 없었다. 당연히 아카데미 생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만 마법을 사용해야 했다.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들과 상처를 못 본 척 지나가야만 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었다.

    “와…. 그 말 너무 멋진데. 누가 말한 거야 마스터?”

    “리테리아 오르비스라고 푸른 성에 사는 늙은 여우가 한 명 있어.”

    그건 전술의 대가라고 불리는 아르테미스 1 마법사단 단장 리테리아가 한 말이었다. 승리를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수면 아래에서 치밀하게 전략을 준비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르메 제국과의 전쟁에서 완벽하게 이기고 나서 남긴 이 말은 전설이 되어버렸다. 이후, 군사적인 작전을 펼칠 때 가장 기본이 되었다. 어린 시절 리테리아의 책을 많이 읽은 유피테르의 행동 패턴도 이에 기초하고 있었다.

    다만, 상식 밖의 힘을 가지게 되어서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을 뿐.

    “흐응. 그렇구나. 기억했다가 써먹어야지.”

    멋진 말을 들어 기분이 좋아진 오흐트는 유피테르가 말한 문장을 그대로 머리에 새겨두었다. 칼리스토 자매들과 함께 있을 때 이 말을 사용해서, 바보로 굳어진 자신의 이미지를 바꿔보려고 한 것이다.

    “뭐. 잘해보렴. 조금 늦었을 때가 완전히 늦었을 때니까.”

    “치이. 마스터는 항상 심술 궂어.”

    1%도 자신을 걱정하지 않는 모습에 오흐트틑 결국 삐져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서 유피테르는 웃어버렸다. 칼리스토들이 그녀를 귀여워하는 이유가 바로 저런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톡톡.

    한창 웃고 떠들고 있을 때 새 한 마리가 나타나서 창문을 두드렸다. 유알라냐가 부른 실프였다. 이번에는 굳이 창문을 열지 않고 부리로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그걸 본 트리아는 창문에 다가가 활짝 열어주었다.

    그 거대한 틈 사이로 실프는 쏜살같이 들어왔다.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는 제 의사를 표현하지 못했다. 오직, 계약자와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리 편지를 적어서 실프에게 주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정령의 도움을 받는 게 마족의 눈을 피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방법이었다.

    유피테르 일행은 옴팔로스가 정확히 누구의 편을 들고 있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통신 마법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라도 도청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델포이의 결계를 담당하고 있다는 말은 곧 어디서나 엿들을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흐음….”

    유피테르는 실프가 물고 온 편지를 빠르게 읽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만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L 결백. I 확인 요망. P 의심되는 부분 있음.

    “부탁한 걸 제대로 들어줬네. 그렇게 보여도 하이 엘프이긴 한 건가.”

    그의 첫 마디는 엘프에 대한 칭찬이었다. 그가 유알라냐에게 부탁한 건 딱 한 가지였다. 마족과 내통했다고 의심되는 세 사람을 최대한 자세하게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바람 그 자체인 실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걸 부탁했는데. 머리 아픈 일은 딱 질색이라구.”

    “라우라 이사야 피티아에 대한 조사. 트리아의 보고서 같은 건 아니고 최근 행적을 정령들에게 물어봐 달라고 했어.”

    오흐트의 질문에 유피테르는 사실 그대로 말해주었다. 칼리스토에게 이런 걸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생각하는 작전의 핵심이 바로 오흐트였다. 마족을 상대로 그녀는 무적에 가까웠다.

    이때를 위해 특별 유학생으로 델포이에 데려온 것이었다.

    “그렇게 웃는 걸 보니 대충 계획이 세워졌나 보네?”

    “뭐, 그렇지.”

    오흐트가 쇼파에서 뒹굴거리면서 물었다. 일반 기숙사와 교수용 기숙사에 있는 가구의 수준은 차원이 달랐다. 특히, 쇼파의 푹신푹신함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번 중독되면 일어설 수가 없었다.

    마치, 겨울철 따듯함이 남아있는 침대처럼.

    “흐음… 혼자만 모든 걸 알고 있는 마스터의 모습 진짜 밥맛이야.”

    오흐트는 아직도 이사야를 의심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확실한 증거가 없었지만, 이사야는 아니었다. 티아나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증거가 분명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전대 마나의 이해 교수 이사야를 제압해서 정보를 얻는 게 가장 좋아 보였다.

    “이 모든 게 끝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은 푹 쉬고 있으렴. 밤은 바빠질 테니까. 사냥의 시간이 올 때까지는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해.”

    “알았어.”

    유피테르는 흔적이 남지 않게 편지를 얼려버렸다. 그러며 오흐트에게 참을 수 있는 용기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직 어떠한 것도 시작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실종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일들은 고작 전조 증상에 불과했다.

    거대한 계획의 톱니바퀴는 아직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트리아. 이사야 교수 좀 잡아 와줘.”

    “알겠습니다. 신이시여.”

    유피테르는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가벼운 말투로 이사야 교수를 이곳으로 데려와달라고 요청했다. 트리아 역시 잠깐 잊어버린 물건을 찾아오겠다는 느낌으로 받아쳤다.

    트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언제나처럼 빛 속으로 사라졌다.

    오흐트는 잠시 잘못 듣는 게 아닌가 하고 포크로 뺨을 찔렀다. 그러자 뺨이 빨갛게 부어오르며 통증이 느껴졌다.

    확실했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지 않았다.

    “마, 마스터. 이사야는 갑자기 왜?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했었잖아.”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있거든. 그가 아니라면 대답을 해주지 못해서 말이야.”

    유피테르는 동료들에게도 간략한 설명만 해주었다. 때문에 협력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을 정도였다. 심리전에 약한 오흐트에게 이런 류의 추리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고작 ‘점’을 알려주었을 뿐이었기에 ‘면’은커녕 ‘선’도 만들 수 없었다.

    “티아나의 사건은 끝난 게 아니었어?”

    “펜던트가 나와버렸으니까. 본인의 말을 들어봐야지. 이사야를 잡아 오고 나서 어떻게 하는지 잘 봐. 이런 방식이 필요한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

    “돌아왔습니다. 신이시여.”

    유피테르는 차를 음미하며 트리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트리아는 한 남성을 손에 들고서 나타났다.

    더는 교수가 아닌 이사야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다만….

    요리를 하던 중이었는지 에이프런을 입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손에는 뒤집개와 프라이팬이 들려있었다. 그가 버둥거리자 트리아는 조심스럽게 그를 내려놓고서 의자에 앉혔다.

    “바쁘신데 실례합니다.”

    “실례란 걸 알면 하지 말아야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부르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군. 대체 누군가?”

    식사 시간을 방해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납치를 당해서 그런지 이사야는 온몸으로 분노했다. 자연히 그의 말투는 사나워졌고, 눈썹은 일자로 변했다. 당장이라도 팬으로 한 대 칠 것 같은 기세였다.

    “마나의 이해 강의를 진행하는 유피테르 교수입니다. 잠시 이야기할 게 있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유피테르의 말투는 친절한 듯 보였지만,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도 어엿한 교수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제자에게 안 좋은 경험을 시켜주었던 이사야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마나의 이해? 아, 내 후임인가.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이것 좀 풀어주는 게 어때?”

    “그러죠.”

    트리아는 이사야가 유피테르와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구속을 풀어주었다.

    몸의 자유를 되찾자 이사야는 이미 찢어진 옷을 마법으로 정리했다.

    “뭐가 궁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델포이인가? 하필 이런 곳으로 데려올 줄이야.”

    그는 자신을 교수라고 소개한 유피테르를 노려보았다. 이 빌어먹을 델포이와는 연을 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는 것들도 분명하게 존재했다.

    “정확합니다.”

    “난 델포이 교수직을 그만둔 지 오래되어서 알려줄 게 거의 없는데. 좋은 기억도 없고 말이지.”

    이사야는 델포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었다. 델포이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아카데미 생들을 가르칠 때는 즐거웠었다. 하지만, 좋지 못한 사건에 휘말리며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런 식으로 잃기에는 너무나도 힘들게 노력해서 얻었던 것들이었다.

    “그건 티아나라는 아카데미 생 때문인가요?”

    “그래, 그래 맞아. 잘 알고 있군?”

    티아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사야의 감정이 격해졌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바로 티아나라는 빌어먹을 아카데미 생이었으니까.

    교수라는 일에 만족하던 그는 제자가 아파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병을 고치는 걸 도와주고 싶어 도와주었는데 어느새인가 자신이 악의 축이 되어버렸다.

    한 번 눈에서 엇나가자 그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렸다.

    “당신의 논문을 읽어보았습니다. 인상 깊더군요,”

    “논문 같은 건 다 옛날이야기야. 요리할 때 불쏘시개로 딱 좋지. 대체 뭘 물어보고 싶은 거야. 용건만 말해. 딸이 기다리고 있다고.”

    “티아나에게 준 펜던트 어디서 나셨죠?”

    이사야의 말에 유피테르도 과감하게 인사말을 줄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애초에 강제로 데려온 상황에서 친근하게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펜던트? 무슨 펜던트. 난 그런 거 준 적 없어. 마나 감소증을 치료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약재를 조합해서 줬을 뿐이야. 논문 봤다며. 난 원래 마법 약 전공이야.”

    이사야는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지 말라며 그런 건 모른다고 답했다. 그 대답은 티아나가 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상지 못한 대답이 들리자 옆자리에서 뒹굴거리며 듣고 있던 오흐트는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게 말이 돼? 벌써 여러 명이 펜던트로 인해서 반―반 마족이 되었다고 증언했는데.”

    “반―반 마족 그건 또 뭐지? 요새 아카데미 생들에게서 유행하는 질병의 이름인가? 아니, 그런 건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빨리 돌려보내.”

    유피테르가 보기에 이사야의 표정은 진실해 보였다. 그저 딸과의 식사를 방해받았기에 분노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이외의 감정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신이시여. 혹시 거짓 정보를 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게 맡겨주신다면 원하는….”

    “그럴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그 펜던트라는 거 실물을 본 적 있어?”

    유피테르는 트리아의 말을 끊고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내놓았다. 그러자 한 사람을 제외하고서 침묵에 빠졌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마족의 힘이 담긴 펜던트의 존재를 직접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티아나도 세이드도 그런 게 있었다고 이야기만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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