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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84화 (84/265)
  • 고요한 밤, 사냥의 밤(10)

    * * *

    그러네. 마스터의 말대로야. 우린 단 한 번도 펜던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어. 설마, 있지도 않은 걸 가지고 지금까지 의심해 온 거야?”

    반―반 마족을 만드는 아티팩트라고 의심되는 펜던트.

    가장 확실한 증거인 펜던트를 아직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오흐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유피테르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도 펜던트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치유 마법을 사용할 때, 아카데미생들의 몸에는 확실한 마족의 마나가 들어있었다. 티아나도 세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마족의 마나를 잘못 볼 리는 없었다. 그래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주입된 마나를 한시라도 빨리 빼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럼. 티아나와 세이드가 거짓말을 한 거예요? 믿을 수가 없어.”

    “글쎄. 이쯤 되면 누구의 말이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하지?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기에는 표정이 너무 진실하지 않았니.”

    “그건…. 확실히 그렇지만 말이죠.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애들이 숙련된 프로처럼 표정을 잘 숨길 리도 없고.”

    옴팔로스와 피티아. 티아나와 세이드. 이사야와 라우라까지.

    용의 선상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대체 누가 진범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피테르가 갑자기 이사야를 납치하듯 데리고 와서 오흐트의 머리는 더더욱 복잡해졌다.

    ‘으으,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야.’

    그녀의 마스터는 진실을 알고 있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더욱 답답했다. 자신이 이런 추리에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제대로 안 알려주는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머리로는 도저히 정답을 맞힐 수 없을 것 같았다.

    “잠깐. 대체 날 이리로 데려온 이유가 뭐야. 너희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따라가지 못하겠는데.”

    오흐트와 유피테르가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있자 이사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언반구 없이 납치당한 것도 짜증이 나는데 기억하기 싫은 것만 묻더니 내버려 둬버렸으니까. 델포이에서 쫓겨나듯이 떠난 이후에는 조용히 가족들과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가족과 맛있는 식사를 꿈꾸며 이것저것 준비하는 도중 끌려 나와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히, 오늘의 메뉴는 딸이 좋아하는 비엔나 소시지였다. 이렇게 낭비할 시간 따위 없었다.

    “현재 델포이 아카데미는 마족의 출현으로 비상 상황입니다. 실종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해서 의견을 듣고 싶어 이렇게 모시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이사야를 이곳으로 납치한 트리아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강제로 끌고 와서는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건 웃긴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전직 델포이 아카데미 교수라고 해도 이론 분야의 전문가였을 뿐이었으니까.

    굴레를 벗어난 칼리스토, 트리아의 마법을 파훼할 방법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허. 마족?”

    이사야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족이란 단어는 논문 속에서도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잊혀진 시대의 전쟁이 끝난 후 신은 반기를 든 마족에게 감옥이라는 벌을 내렸다.

    몇몇 마족이 결계를 돌파할 수 있다고는 들었지만, 대부분의 마족은 그들의 영토인 타르타로스에서 나올 수 없었다.

    신이 직접 만든 결계는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크레이타의 신관들이 사용하는 마법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들의 신성 마법은 익히기 어려운 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

    “저희는 티아나가 앓던 병이 마족의 저주에서 비롯된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마나 분야 전문가이시니 반마족의 생성 과정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다 하다 별소리를 다 들어보겠군. 마족이라더니 저주에 반마족까지? 티아나의 병은 확실히 마나 감소증이야. 자네는 마나의 이해 강의가 아니라 소설을 가르치는 교수인가? 웃기지도 않는군.”

    마족이 델포이 아카데미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도 믿기 힘든데 일개 아카데미생에게 저주까지 내렸다는 걸 이사야는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일개 아카데미의 평범한 마법사에게 저주를 내리는가?

    사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일지도 몰랐다.

    현재의 인류에게 마족은 두려운 존재인 건 확실했지만, 가까운 존재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확실히 검진했다고. 티아나와 세이드의 몸에서 나온 건 마족의 마나가 맞았어. 트리아도 마스터도 확실히 그렇게 말했잖아!”

    왠지 자신이 거짓말쟁이로 몰리는 것 같아 오흐트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진단은 엇나갈 리 없었다. 마족과 싸우다 상처를 입은 칼리스토 자매들을 치유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 속에서 그녀는 최고의 치유 마법사였다. 그 누구도 그녀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잠깐. 거기 소녀. 화내지 말고 들어. 정말로 마족이 나타났다면 델포이의 시스템은 어찌하고 있지? 분명 학장이나 결계가 빠르게 대응했을 텐데.”

    “학장님께서는 치안 유지부대와 교수들과 연합해서 사건에 대응하고 있어요.”

    “결계를 담당하고 있는 옴팔로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족과 손을 잡은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유피테르와 트리아가 이사야의 각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두 명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자 이사야는 안 그래도 정신이 없었는데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한 사례씩 떼어서 이야기하자고 제안했다.

    “잠깐, 잠깐. 천천히 학장의 사례부터 이야기해 보자고. 시간 순서대로 천천히 이야기 해봐.”

    “티아나의 병을 진단하고서 마족의 마나를 빼는 식으로 치료했어. 거기서 마족으로 의심되는 자를 만났고, 그 이후 학생과 학생회장이 실종되었어.”

    “네가? 넌 고작 어린아이로 보일 뿐인데…? 대체 진단을 어떻게 하면 마족의 존재가 나오는 거지. 네 능력이 고위 신관급 이상이라는 건가?”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야? 내가 이래 봐도 초대….”

    이사야는 여전히 오흐트가 미덥지 못한 듯 말끝을 흐렸다. 역량을 의심당한 오흐트는 발끈해 비밀로 유지해야 할 정보까지 말할 뻔했다.

    바로 그 순간.

    “오흐트 거기까지.”

    유피테르는 한발 먼저 그걸 알아채고 그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오흐트를 제지했다. 칼리스토들의 정체가 알려져서는 안 되었었다. 유알라냐가 트리아의 정체를 아는 건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특히, 오흐트의 존재는 누군가가 본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아, 알았어! 마스터. 어쨌든 그 뒤로 마족도 나타났다고. 피아쿠스라는 이름이었어.”

    “네 말이 사실이라고 일단은 믿어주지. 계속 이야기 해봐.”

    이사야는 유피테르가 내뿜는 마나가 보통이 아니었기에 일단 그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는 빨리 의문을 풀어주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는 시간만 늦어질 뿐이라는 걸 직감했다.

    전설로만 남아있는 공간 이동 마법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 이후 오흐트는 유피테르와 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델포이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살짝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원래의 톤으로 돌아왔다.

    이사야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물어보았다.

    “학장이 그런 식으로 대응했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너무 느리고 답답해. 평소의 그녀답지 않아.”

    설명을 다 들은 이사야의 첫 말은 바로 피티아 학장의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티아나의 사건 당시 자신을 추궁할 때와 너무나도 달랐다. 실종 및 살인이라는 거대한 사건임에도 느리게 행동했다.

    심지어, 이번 사건은 티아나의 사건과 다르게 엄청난 규모의 사건인데도 말이다.

    “그럼 원래는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는 분이 아니라는 건가요?”

    “그래. 보는 내가 다 답답할 정도다. 만약, 한 명이라도 실종되었다면 아카데미생의 불만이 나올 정도로 과도하게 보호했을 거야. 예전에 비슷한 사건이 있을 때도 그랬었고.”

    이사야가 생각하는 피티아 교수는 냉철하면서도 따듯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아카데미생들이 한 명이라도 잘 못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실제로, 티아나가 성국에서 생활하고 치유 받는 비용을 학장이 직접 보조해줬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학생회장을 포함해 몇 명이나 실종되었는데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는 건 이상했다. 지금 하고 있다는 강의 폐쇄 조치를 사건 발생 초창기에 밀어붙일 사람이었다.

    “역시. 그런가요.”

    이사야의 말을 듣던 유피테르는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가설이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족이 왜 델포이에서 활동하며, 진짜로 노리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들이 노리는 건 처음부터 자신이었다. 이 모든 건 정말로 눈을 속이기 위한 연막이었다.

    “이 정도면 궁금함이 다 풀렸겠지. 이만 돌려보내 주면 좋겠다만.”

    “일단은 이런 식으로 모셔 미안합니다. 적당히 보상하겠습니다. 트리아 부탁할게.”

    트리아는 유피테르의 부탁 같은 명령을 곧바로 시행했다. 신의 부탁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기에. 그녀는 천천히 이사야에게 다가가서 그를 오른쪽 어꺠에 가뿐히 실었다. 마치 짐을 들듯이.

    “아니, 좀 이렇게 잡는 건. 사람 말을 들어 좀! 이 모습을 아내가 봤다간….”

    이곳으로 올 때도 비슷한 방식으로 와서 이사야는 기겁했다. 안전하다는 것과 무섭다는 건 전혀 다른 감각이기에. 그러나 이사야가 뭐라고 외치든 트리아는 묵묵하게 할 일을 하며 빛으로 들어갔다.

    “마스터. 설마 피티아 학장이 배신한 거야? 이사야의 말이 맞다면 피티아가 제일 의심이 가잖아.”

    “정답에 꽤나 근접했네. 나쁘지 않은 시도야. 뭐 방향성을 틀리지 않았어.”

    “아직 조금 부족한 거야 마스터?”

    “조금 더 힌트를 줄게. 유알라냐가 보낸 편지에 의하면 라우라는 완전히 결백해. 마지막에 카테리나에게 찾아간 건 우연이나 다름없어. 학장의 마법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

    유피테르는 머리를 최대한 사용해서 진실에 다가가는 오흐트의 모습이 대견한지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완벽한 정답은 아니었기에 좀 더 확실한 힌트를 건네주었다.

    “잠시만! 잠시만 마스터. 머리를 너무 많이 써서. 케이크를 조금만 꺼내주면 안 될까?”

    오흐트의 뇌는 이미 과부하가 된 듯 연기가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이럴 때는 역시 케이크와 홍차가 필요했다.

    당분. 당분 오로지 당분만이 그녀를 구원해줄 수 있었다.

    “그 정도야 쉽지. 잠시만 기다려.”

    유피테르는 방 한편에서 당당히 위엄을 뽐내던 냉장고에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특제 마법식으로 훨씬 차갑게 얼려두었던 케이크가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그러나 아직 케이크가 나설 차례가 아니었다.

    그는 티포트를 꺼내 케이크에 어울리는 조금 쌉쌀한 느낌을 주는 데메테르 산 홍차를 우려냈다. 홍차의 향기가 케이크의 달콤함을 거의 지웠을 무렵 트리아가 돌아왔다.

    “신이시여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팠던 오흐트에게 트리아의 귀환은 그렇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적당히 흘려내고서 유피테르가 가져다주는 케이크와 홍차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달콤한 딸기 시폰 케이크와 쌉쌀함 향이 감도는 홍차는 너무나도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잘 먹을게 마스터!”

    이미 눈으로 감상을 다 마쳤으니 남은 건 맛있게 먹는 것뿐이었다. 포크로 케이크 한 부분을 잘라서 푹 찍었다.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는 입에 넣자마자 그대로 녹아버렸다. 달콤함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래,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신이시여. 그럼 오늘 밤에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돌아온 트리아가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가끔 유피테르는 전대 마스터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니까. 지금 같은 경우도 그중 하나였다.

    “트리아. 에냐도 불러줘. 오늘 모든 걸 끝장내도록 하자. 사냥의 밤을 시작하자고. 나를 건들면 어떻게 되는 지 그 몸에 새겨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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