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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6화 (26/265)
  • 달의 몰락(3)

    * * *

    갑자기 밝아진 분위기에 에키드나의 표정이 처음으로 구겨졌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미소가 없어지고 대신 분노가 감돌았다. 에키드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계획을 망친 마리안느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좋던 분위기를 한 번에 바꾸다니, 역시 달의 후예들인가…. 유피테르 말고는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네.’

    “그, 그렇게 쳐다보면 어, 어떡할 건데에!”

    에키드나의 시선을 받는 것을 느낀 마리안느가 애써 두렵지 않은 듯 연기했다. 나이가 어린 것은 숨길 수 없는지 그곳에 있던 모두는 마리안느가 얼마나 공포에 빠졌는지 알 수 있었다. 어린아이의 용기는 일부 귀족들의 마음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마족이면 다냐! 어린아이를 겁박하다니. 차라리 나를 쳐다봐라. 네까짓게 노려보아도 무섭지 않다.”

    “그래, 차라리 나를 봐라. 아이가 떨고 있는 게 불쌍하지도 않나. 내가 대신 네 눈빛을 감당해주겠다. 한 번 해봐. 해보라고.”

    “여보, 혹시 당신 저 마족이 이뻐서….”

    “에이 설마. 아냐 아냐. 절대 아냐. 안 들려. 안 들리는 걸.”

    카테리나는 마리안느를 보호해주는 귀족들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마지막 양심은 버리지 않은 듯 보였다. 만족한 카테리나는 지금껏 없었던 빈정거리는 말투로 에키드나를 놀렸다.

    “왜, 마음대로 되지 않았나 봐 마족 씨? 이걸 어쩌나.”

    “생각보다 귀찮은 존재구나 인간이란 건. 늘 그랬어. 왜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후후. 재미있네. 정말 재미있어.”

    “네가 좋아하는 유피테르 오라버니도 인간….”

    그러나 카테리나의 말은 누군가에 의해서 끊겼다.

    “내 딸들에게 볼일이 있는가 마족이여? 그럼 먼저 나와 이야기해보는 게 어떤가.”

    카테리나의 기다림은 보상을 받았다. 생일 파티에 참여한 사람 중 강력한 마법사인 카르멘 아르테미스가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것이다. 카르멘의 당당함은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품격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버지가 등장하자 그제야 카테리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아르테미스의 가주는 그녀가 알고 있는 한 패배한 적이 없는 최강의 마법사였다. 그는 냉정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적재적소에 마법을 사용했다. 이는 그녀가 가장 배우고 싶어 하는 부분이었다.

    대를 위해 과감히 소를 희생하는 판단력은 가주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르지만, 유피테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카테리나에게는 상당히 먼 이야기였으므로. 카테리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상냥한 편이었다.

    카르멘은 아르테미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나 지배력과 아르테미스 이름에 걸맞은 끝을 모를 마나를 바탕으로 조디악의 일원을 선정하는 사바트에서 우승했다.

    그의 퍼스트 서클은 아르테미스의 이름에 걸맞은 얼음 마법이었고, 세컨드 서클은 달의 마법이라고 참여했던 마법사들에 의해 전해졌다.

    그가 세컨드 서클의 마법을 사용하자, 맑은 하늘도 한밤중으로 변하며 하늘에서 은은히 빛을 내는 달빛이 그를 축복하는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졌다고 했다.

    이 미지의 달의 마법이 그가 세컨드 서클을 넘어, 서드 서클에 도전하는 증거라고 익명을 요구한 한 마도사가 말하기도 했다.

    카테리나가 카르멘을 믿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마족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몰랐지만,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다.

    “글쎄, 아르테미스의 가주가 마족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하더라고. 다들 알지 그 물병자리의 마도사 있잖아.”

    “그게 정말이야? 와 마족이 그렇게 아름다운 걸까?”

    “예끼, 이 사람 그런 소리는 하덜 말아. 잡혀간다니까. 법이 무섭지도 않나보덜.”

    “내가 듣기로는 그 아들 있잖아. 마나를 못 쓴다고 소문난 그 아들. 그 아들이 신이 아니라 마족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된 거래.”

    아름다운 마족에게 차여 싫어하게 되었다는 근거 없는 뜬 소문부터, 유피테르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마족의 저주 때문이라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어 보이는 소문까지. 오만가지 소문이 돌았지만 단 하나도 밝혀진 것은 없었다.

    고작 세컨드 서클에서 헤매고 있는 인간이 마족에게 대항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다. 그러나 카르멘은 불가능한 일을 젊었을 때부터 한 기적의 마법사였다. 아마, 달의 마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는 마족 한 명을 토벌하고, 사용하던 무기를 빼앗아서 사용하고 있었다.

    죽였다는 마족의 시체를 직접 가져온 것은 아니었지만, 들고 있었던 아티팩트에서는 마족의 마나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결국, 그가 마족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탐욕의 스태프 아바라치아. 그것이 그가 사용하고 있는 무기의 이름이었다. 아바라치아는 상대방의 마법을 그대로 흡수해버리는 최강의 아티팩트였다.

    “딸? 당신이 리나의 부모인가? 그렇구나, 당신도 마나의 향기가 유피테르와 닮았어.”

    에키드나는 새로 나타난 강대한 존재에 반응했다. 물론,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 마법사 간의 수준 차이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지만. 카르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분명하게 위험한 느낌이었다.

    카르멘은 인간의 몸으로 세컨드 서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 서드 서클을 바라보는 마법사였다. 이는 마족의 시선에서 볼 때, 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 포스 서클에 도전하는 자와 같았다. 즉, 천년에 한 번 나올 재능을 가진 자였다.

    인간이 마족을 싫어하는 것과 다르게 마족은 인간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만약 숲을 지나다니다 옷에 벌레가 붙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은 사실 인간에게 있어 큰 위협은 아니지 않은가? 그건 그저 살려고 하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물론, 공격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평범한 벌레는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는 못하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간은 옷에 달라붙은 벌레를 혐오감을 느끼며 손쉽게 쳐내는 것 아니었는가? 마족이 인간을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에키드나가 유피테르의 이름을 말하자, 카르멘의 미간이 약간 꿈틀거렸다. 그 이름은 아르테미스 가문에서 금기나 마찬가지였기에. 황제가 허가한 생일 선물은 전혀 카르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테리나는 잘 교육한다면 자신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이 애를 먹고 있는 서드 서클의 경지를 각성할지도 모를 재능이었다. 이를 막고 있는 게 그 무가치한 장남 유피테르였으니, 좋아할 수 없었다.

    어디서 우연히 마법을 사용할 기회를 얻었는지, 자신의 앞에서 오만하게 있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자신의 말을 거스르다니.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유피테르라고 했나. 감히 내 앞에서 그 이름을 말하다니. 그런 사람은 모두 사신 디스의 품으로 돌아갔는데 말이지.”

    “그래. 그건 흥미로운 사실이네. 그래도 나는 사람이 아니니까 한 번 정도는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에키드나는 유피테르가 모욕당했는데에도 특유의 유혹하는 듯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녀를 알고 있는 마족들은 오히려 저 모습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이곳에 있는 자들은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니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카테리나는 꿈을 이뤄줄 수 있는 소중한 딸이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 주겠나?”

    카르멘은 무서운 인상으로 에키드나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은 화가 난 것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는 미중년이었지만, 웃는 표정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살 외모였다.

    카르멘은 어렸을 때부터 유피테르와는 다른 차가운 느낌의 얼굴로 유명했다. 높은 경지로 인해 중년이라기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청년의 모습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별로 노려보지는 않았는데? 조금 차가운 사람이네.”

    에키드나는 카르멘을 찬찬히 훑었다. 짧게 정리된 은색의 머리카락. 187 정도 되어 보이는 큰 키. 아르테미스 소속의 마법사를 증명하는 복장과 등 뒤에 새겨져 있는 가주라는 표식까지. 왼손에는 마족의 아티팩트 중 하나인 아바라치아가 강렬한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피테르가 이 사람의 아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은색의 눈동자와, 은색의 머리만 닮았을 뿐.

    ‘뭔가 다르네. 마음에 안 들어. 이 외모는 오히려 그들이랑 닮은 거 같은데.’

    에키드나가 아무 말 없이 카르멘을 쳐다보자 사로잡혀 있던 귀족들은 그를 열렬히 응원했다. 저 여성 마족이 왜인지 카르멘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도 했고.

    “우선 인질을 해방하도록 할까.”

    카르멘은 왼손의 아라바치아를 고쳐 잡은 것만으로 에키드나가 사용했던 마법의 지배력을 빼앗았다. 덕분에 귀족들은 그림자의 주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드디어 자유를 되찾은 귀족들은 여러 가지 태도를 보였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도 했고, 서로 껴안으며 이제는 살았다고 안도하기도 했다. 즐거워야 할 생일 파티에서 나타난 마족에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까지.

    물론, 에키드나에게 분노하는 자들도 있었다. 몸의 자유를 뺏긴 경험은 결코 즐거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우와. 마나 지배력이 대단하시네요.”

    에키드나는 카르멘의 마나 지배력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녀의 마법은 마족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편이어서 지배력을 빼앗아 오는 게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마법이라는 것은 마나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가는 것과 같았다.

    검정색으로 칠해진 도화지를 다른 색으로 물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순수한 감탄에도 카르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에키드나에게 아바라치아를 겨누고 있었을 뿐이었다.

    카르멘이 승기를 잡는다고 느끼자 귀족들은 대피해서 호위들의 보호 결계 안으로 숨었다. 호위들은 연신 도망가는 게 좋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이런 구경거리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카르멘이 왔는데 왜 도망가야 하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만약 이대로 카르멘이 저 마족을 이긴다면 보기 힘든 마족 사냥을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르멘은 이미 마족을 이긴 증거인 아바라치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가능성은 충분했다.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는 것이었다.

    조디악의 칭호를 얻기 전에도 마족 하나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으니 물병자리의 마도사라는 칭호를 인정받은 지금은 과거를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그들의 이성을 철저하게 마비시키고 있었다.

    ‘나약한 자들. 이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귀족들의 본래 모습이지.’

    자신의 힘이 아닌 타인의 힘으로 소망을 이루려는 귀족들을 보고 카르멘은 경멸을 느꼈다. 대부분의 귀족은 늘 저런 태도로 살았다. 카르멘이 좋아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기에 그들은 너무나 타락했다.

    차라리 저런 귀족보다는 유피테르가 나을지도 몰랐다. 마나가 없다는 것을 알고도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바스찬이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지만, 그 기회도 본인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유피테르가 카테리나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았다면, 카르멘은 지금 같은 태도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카르멘이 기대하고 있는 수준에 미치지 못해 카테리나처럼 잘해줄 리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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