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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5화 (25/265)
  • 달의 몰락(2)

    * * *

    에키드나는 유피테르가 보여주었던 힘이 무서웠다, 그가 자신에게 준 상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유피테르만 생각하면 커지는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 이 마음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지금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는 건 은발 머리가 아닌, 금발 머리의 황녀였다.

    “도둑고양이는 당신이 아닐까요? 전 오라버니의 가족이자 동생이니까요. 당신은 오라버니의 대체 뭐죠?”

    카테리나 역시 싸늘하게 반응했다. 그녀 역시 유페미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나선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동생 마리안느의 표정이 바로 눈에 들어왔으니까. 신분상, 황녀 유페미아가 자신보다 높은 건 맞았다.

    그러나 카테리나에게 있어 유페미아 역시 마리안느처럼 보살펴야 할 동생이었다.

    유페미아가 황실의 예절과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손이 떨리는 것까지 확실하게 숨길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물론, 17살인 카테리나 역시 아직 제국법상 성인이 아니었지만, 퍼스트 서클 유저이자 델포이 아카데미 수석인 그녀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델포이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건 그만큼 믿음직한 것이었다. 세아니아 대륙에는 여러 아카데미가 있었지만, 그중 델포이가 가장 뛰어난 위상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철저한 실력주의와 퀘스트는 아카데미 생들에게 실전에서의 강함을 주었다.

    카테리나는 오라버니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럽혀지는 것 역시 참을 수 없었다. 아직 자신이 만나보지 못한 오라버니의 현재를 알고 있다는 말에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오라버니의 귀환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기억하던 추억과 지금의 유피테르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힘들 때, 의지하던 추억이 부서져 버린다면 그녀의 정체성이 흔들릴지도 몰랐다.

    “유피테르의 동생? 아… 네가 그 ‘리나’ 구나. 유피테르의 여자친구 후보인 마족이라고 해둘까?”

    에키드나는 무언가 기억 속을 뒤지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리나’라는 단어를 꺼냈다. 에키드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요염해서 귀족 남성들이 침을 삼켰지만, 화가 난 카테리나에게 그런 건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에키드나가 이곳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그 단어는 어디서 굴러다닌지도 모를 저 마족이 아닌, 오라버니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여동생 마리안느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단어였다. 자신과 친한 친구나 가족들은 모두 ‘카리나’라고 부르도록 했으니까.

    마족이라는 단어 때문에 회장의 분위기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는데, 여자친구 후보라는 말에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인간과 마족이 필연적인 적이라는 수 없었다는 건 상식이었다. 하물며, 몬스터와의 공생도 불가능하게 여겨지는데. 그보다 윗선인 마족과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마족이란 인간을 갖고 노는 장난감으로 생각했으니까. 잊혀진 시대에서 인간과 마족은 동맹이었으나, 지금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건 고작 몇 안 되는 존재뿐이었다. 태초의 마족 에키드나 역시 포함되었다.

    “마족 따위가 오라버니의 여자친구가 될 거라구요? 인정할 수 없어요. 마족과 저녁 식사를 같이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역겨….”

    “거짓말. 망설이는 게 다 보이는걸. 유피테르를 의심하고 있구나? 가엾은 리나.”

    에키드나는 카테리나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도중에 끊었다. 저 은발의 소녀는 자신의 오라버니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점이 에키드나는 싫었다. 저건 유피테르를 위한다는 사람이 할 태도가 아니었다.

    ‘그래봤자. 고작 인간이었던 거야. 저런 사람들 속에서 자라왔다니. 불쌍한 유피테르.’

    이미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오랜 삶을 살아온 에키드나에게 있어 인간의 감정을 읽는 일은 너무나도 쉬웠다. 저 소녀는 지금 자신의 오라버니가 마족과 손을 잡고 이 사태를 만든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유피테르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추억이 무너질까 봐 무서워하고 있는 거란다. 거짓말쟁이 리나.”

    에키드나는 아까부터 카테리나의 마음 한편 구석에 있던 아픈 사실을 찔렀고,

    “당신이 뭘 안다고 그렇게 마음대로 이야기하는 거야!”

    속마음을 들켜버린 카테리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녀의 마음에 응답하듯 무수한 얼음 화살이 에키드나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극한의 냉기가 회장을 둘러쌓기 시작했다. 평소 자연스럽게 방출되고 있던 마나에 극한의 냉기라는 성질이 더해졌다.

    그녀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자들은 무도회장을 뒤엎은 냉기를 피하지 못하고 추위에 떨었다.

    “들은 것과 다르게 굉장히 과격하네? 리나.”

    에키드나가 간단히 손짓하자, 그녀의 그림자에서 정확히 같은 수의 화살이 나타나 얼음 화살을 상쇄했다.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얼음 화살과 밑에서 솟구쳐 오르는 그림자 화살이 격돌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중력이라는 세계의 법칙을 생각하면, 에키드나의 마나 지배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카테리나 역시 천재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이었다. 태초의 마족에게 인간이란 장난감 그 이하였다.

    “내 이름을 친한 듯이 부르지 마!”

    카테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펼쳐진 이 단순한 공방으로도 실력 차가 느껴졌다. 그녀는 천재였지만, 아직까지는 유망주일 뿐이었다. 몬스터 사냥, 던전 공략 등의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족과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잊혀진 시대 이후, 마족과 싸워서 승리한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아버지 카르멘 아르테미스 그뿐이었다.

    그녀는 인류 최강의 마도사인 아버지를 믿고 있었다. 잠시 어디론가 사라지셨지만, 그렇게 먼 곳에 계시지 않은 게 마나 감지에 잡혔다. 그가 온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올 때까지 버티면 승리야. 어떻게든 버텨보자. 여차하면 그게 있으니까.’

    아직, 카테리나에게는 황제가 하사한 아티팩트 ‘카드세우스’가 남아 있었다. 카드세우스는 단순히 마나를 증폭시키는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이는 델포이에서 퀘스트를 하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제 포기했어? 생각보다 재미없는 사람이었네 리나. 유피테르였으면 나 정도는 손쉽게 이겼을 텐데 말이지.”

    “친한 척 부르지 말랬지! 오라버니의 이름도 부르지 말고!”

    카테리나는 화를 내며 에키드나에게 마법을 퍼부었다. 하지만 얼음 마법은 그림자의 결계 마법에 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파편이 주변인들에게로 날아가 피해를 줄 뿐이었다.

    “어디다 쏘는 거야! 저 빌어먹을 마족을 맞춰야지. 이러다 내가 죽겠네.”

    “우리 애가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욧! 당신 눈이 어디 달린 거야? 어서 부모님 모셔와! 보상받아야겠으니.”

    “어, 엄마 추워요….”

    “괜찮아 우리 아가. 조금만 있으면 물병의 마도사님이 오셔서 해결해 주실 거야. 그때까지만 꼭 참자.”

    아직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귀족들은 카테리나를 비난했다. 특히, 아이를 가진 한 부모는 유별나게 행동했다. 다른 귀족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였지만, 부부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에키드나는 화를 내는 부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저런 귀족들을 지키기 위해 네 한 몸을 희생할 거야?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 텐데.”

    카테리나 식 얼음 마법 ― 얼음비

    카테리나는 에키드나의 말에 마법으로 대신 대답했다. 무도회장에 가득한 냉기가 하늘로 솟아올라 그대로 비처럼 에키드나에게 쏟아져 내렸다. 보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였다.

    심지어 그 얼음은 정말로 비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과연 이번에는 카테리나의 공격이 성공할 것인가. 귀족들과 유페미아 일행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그들의 목숨이 카테리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악담을 퍼부은 부부들도 조용히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에키드나 식 그림자 마법 ― 그림자의 유혹

    에키드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를 노리고 쏟아지는 얼음비에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에키드나의 주변만 마법으로 얼어붙었을 뿐이었다. 카테리나가 노리던 것과 다르게 그녀에게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이번에도 애꿎은 주변 귀족들만 피해를 보고 얼어붙어 버렸을 뿐이었다.

    “에,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걸. 리나 아가씨? 아. 지금 나를 공격하지 않고 조용히 하면 유피테르가 실종된 기간에 무엇을 했는지 알려줄 수 있단다.”

    에키드나가 웃으며 한 제안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형제, 자매 중 유일하게 오라버니를 만난 마리안느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는 건 치사했고, 그걸 빌미로 싸우는 걸 포기하라는 건 더욱 야비했다. 마족은 비열하게 인간을 지배하려 든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 오라버니…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카테리나는 깊이 고민했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면 그녀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될 게 분명했다. 아르테미스 가문의 가주가 되어 오라버니를 구한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건 싫었다.

    그때였다.

    “카리나 언니. 지지 말아요. 언니라면 할 수 있어요. 유 오빠는 언니를 믿고 있다고 말했다구요.”

    뒤에서 떨고 있던 마리안느가 카테리나에게 소리쳤다. 냉기에 떨고 있어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카테리나의 귀에 잘 들렸다. 마리안느의 외침이 시작점이 되어 다른 이들도 카테리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카리나 언니. 본때를 보여주세요. 언니가 강하다는 걸 저희는 믿고 있어요!”

    리네아가 카테리나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고,

    “힘내십시오. 언니의 힘이라면 마족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리아가 그 뒤를 이었다.

    “아르테미스와 제국의 자랑 카테리나. 조금만 버티세요. 그러면 도와주실 분이 올겁니다.”

    유페미아 황녀가 마무리를 지었다.

    황녀의 말이 맞았다. 믿을 수 없는 힘을 가진 마족을 이길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이기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었다. 마족을 상대할 만한 힘을 가진 아버지가 이곳에 오기까지 버티면 되는 것이었다.

    얼음성의 결계를 어떻게 뚫고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이변을 느낀 아버지와 1 단장 리테리아 등 든든한 버팀목들이 이곳으로 달려올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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