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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7화 (7/265)
  • 마리안느 아르테미스의 생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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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生日). 다른 말로 탄생일. 한 생명의 빛이 세상으로 나오는 날이다.

    갓 태어난 가냘픈 생명의 울음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맥동하는 심장은 신의 축복인 마나와 함께 호흡을 시작한다. 이처럼 생명의 탄생은 그 자체로 축복이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세상의 진리였다.

    태양이 뜨고 지며 달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듯이.

    아르메 제국에 비해서 신분 제도가 확실한 리투아 제국이지만 이를 적용하지 않는 단 한 가지 예외가 바로 생일이었다. 생일을 맞은 사람은 공식적으로 업무를 면제받을 수 있었으며, 아이를 출산하는 날의 부모들 역시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닮은 작은 생명체의 노래는 신분에 상관없이 가장 고귀한 선물이었기에.

    또한, 가지고 있는 재력에 따라 개최되는 크기에 차이는 있으나, 10살 이전, 아이의 생일은 되도록 성대하게 열어주는 게 리투아 제국만의 특별한 문화였다. 또, 생일 파티가 아이만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족 모두의 축제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귀족의 경우에는 평소 친분이 있던 가문들을 초대해서 교류하는 사교의 장이 되기도 했다.

    평균 수명이 백 살에 육박하는 이 대륙에서, 아이들은 20살이 되고 나서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10살의 나이에 퍼스트 서클에 도달한 카테리나가 희대의 천재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금요일은 가문의 귀염둥이 마리안느의 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초대할 손님을 정하는 것은 마리안느 본인과 담당 집사의 일이었지만 그 외에는 메이드들의 몫이었다.

    마리안느의 경우 친한 친구들에게 꼭 와달라는 마음을 한껏 담아 직접 초대장을 쓰고,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다.

    아르테미스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냉철한 성격과는 다른 귀여움과 순수함을 보유한 마리안느에게는 황실과 다른 공·후작 가문의 친구들도 많았다. 그녀는 그야말로 귀족 어린이들 사이에서의 아이돌이었다.

    사근사근한 성격과 귀여움으로 무장한 것으로도 모자라, 누구의 말도 주의 깊게 들어주는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메이드들 역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바빴다. 얼음성의 거대한 파티장을 꾸미거나, 초대될 손님들의 취향과 신분에 맞게 방을 정리하고 여러 음식을 준비하는 등의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황실의 일원이 방문해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실제로, 유피테르가 귀환하기 전부터 관련된 모두가 조금씩 준비하고 있던 일이었음에도, 일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를 않았다.

    유피테르의 귀환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직 공식적으로 가문 내에서 귀환이 선언되지 않았지만, 분명한 첫째 공자이자 정식 후계자이지 않은가? 카테리나가 차기 가주로 유망한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아직 후계자는 그였으니까.

    젊은 후배 문지기가 술자리에서 대공자와의 싸움을 실감 나게 표현하며 너무나도 무섭게 느껴졌다고 한 말은 조금씩 퍼져나가 세바스찬 이외의 집사들과 메이드들은 대부분 유피테르가 가문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역시 끝까지 지킬 수 있는 비밀은 절대로 없었다.

    유피테르가 과거와는 다르게 가주 카르멘을 피하지 않고 격렬하게 대립했다는 소문도 미묘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힘을 더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과거에 그를 방관했던 사실이 괜히 생각나 버리는 것이었다.

    그나마 가문의 메이드들에게도 미소를 지어주는 고마운 막내 공녀 마리안느님과 꽤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그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는 했지만. 이는 결국, 일종의 자기합리화일 뿐이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마리안느 님이 우리를 지켜주실지도 모른다는.

    그렇게 마리안느의 생일은 성큼성큼 다가와 금요일이 되었다.

    가족끼리 지내는 아침 식사에는 카르멘, 카테리나, 제이스란 그리고 마리안느만 참여했고 유피테르는 참여하지 않았다. 카르멘과의 점점 깊어지는 대립으로 인해 생일이라는 축제 분위기가 나빠질 수 있었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가족끼리, 점심 식사를 친한 친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손님과 함께 성대하게 여는 것이 귀족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점심에는 유피테르가 참여할 필요가 없었지만, 친구에게 갑자기 돌아온 오빠를 소개해주고 싶다는 마리안느의 부탁 때문에 그는 걸즈 토크 한가운데에서 애매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마리, 잘 지냈어? 생일 축하해!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얼음성은 우리 데메테르에서는 꽤 멀어서 자주 오기가 힘들어서 미안해. 아쉽다. 황녀님과 사리아 언니는 자주 만나니까. 마리도 가까우면 좋은데.”

    “응응, 리네 언니. 나는 잘 지냈어! 유피, 사리아 언니도 오랜만이에요! 진짜 와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어머, 그건 숙녀답지 못한 말투에요. 여러분. 몸가짐을 바로 하셔야죠. 그래야 소녀들의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걸요?”

    “미아.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렇게 행동하면 힘들지 않아? 마리, 여긴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구. 그렇게 딱딱하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

    “어머,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다니 실례에요. 사리아.”

    리네아 데메테르, 마리안느 아르테미스, 유페미아 드 리투아, 사리아 아폴론.

    이들은 원형의 테이블에서 서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고품질의 원목으로 만들어진 테이블 위에는 소녀들의 취향에 맞는 프릴과 레이스로 마감처리가 된 테이블보가 있었다.

    소녀회와 같은 모임의 성격에 점심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디저트와 차 위주였다. 그야말로 애프터눈 티 세트라고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르테미스의 문장이 각인된 명품 식기들에 음식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면서 소녀들은 화기애애하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잔병치레가 잦아, 황족 특유의 권위 의식이 덜한 제 올해 14살의 3 황녀 유페미아가 이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이었다. 차와 약으로 유명한 데메테르가에 요양하러 간 유페미아 황녀는 그곳에서 무료하게 매일매일을 보내던 리네아와 친해지게 되었다.

    아직 어린 마리안느의 경우 리네아가 카테리나와 친한 사이여서 만나게 된 후 상당히 친해지게 되었다. 특히, 리네아는 여동생을 가지고 싶다는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졌다며 마리안느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사리아는 유페미아와 둘도 없는 소꿉친구였기 때문에 이 모임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었다. 시원시원하고 결단력 있는 성격을 유페미아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활동하기 쉽게 단발을 유지하는 사리아는 키도 상당히 큰 편이었다.

    이처럼 서로 두루두루 친한 황실과 각 공작 가문 출신의 4명의 소녀가 모인 자리에 불청객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유피테르였다.

    “그래서 이분이 누구신지 물어도 되겠니. 마리?”

    나이로도, 신분으로도 모임의 리더 격인 유페미아 황녀가 옆에 있던 유피테르에게 먼저 관심을 보였다. 이에 마리안느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유피테르를 모두에게 소개했다.

    “아르테미스 가문의 대공자이자 제 자랑스러운 오빠인 유.피.테.르.에요!”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입니다. 음… 이런 자리에 제가 있어도 되는지 정말 모르겠네요.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귀족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흠잡을 수 없는 깔끔한 인사. 게다가 적당한 자신감이 말에 녹아있어 소녀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외모 역시 이미 제국 내에서 유명할 정도였지 않은가? 유페미아 황녀가 있어 적당히 높임말을 사용하는 것도 매력 포인트였다.

    “아, 유피테르 님이시군요? 리투아 제국 3 황녀 유페미아 드 리투아에요. 올해로 14살이에요. 처음 뵙겠어요.”

    리투아 제국 황실의 상징인 태양 같은 금발과 금색의 눈동자를 지닌 유페미아에게서는 다른 사람이 쉽게 가질 수 없는 우아함과 단아함이 느껴졌다. 앞머리는 잘 정돈되어 눈썹 위에서 가지런함을 자랑하고 있었고,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금발은 뒤로 넘겨져 가녀린 어깨선을 덮었다.

    “마리안느의 오라버니시군요. 처음 뵙겠어요. 리네아 데메테르입니다. 올해로 11살이에요. 마리의 오라버니시면 제 오라버니도 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정말 기뻐요.”

    “사리아 아폴론입니다. 유미아와 동갑입니다. 꽤 강하신 분이라고 마리에게 들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퍼스트 서클을 달성하고 싶은데 나중에 한 수 지도받아도 되겠습니까?”

    아직 어려서 그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아끼는 마리안느의 오빠라서 그런지 그들은 유피테르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게다가 사리아는 아폴론 가문 특유의 직설적인 말투를 그대로 사용했다.

    나이 차가 나는 사람이었기에 존댓말을 쓰려고 노력해서 오히려 어색한 말투가 되어버렸지만.

    카르멘, 세바스찬, 카테리나의 경우가 예외적인 경우로 명문 귀족이라고 해서 모두 이른 나이에 퍼스트 서클에 당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균적으로 10대 후반에 퍼스트 서클의 실마리를 잡고 20대에 들어서면서 완전하게 퍼스트 서클에 들어가는 것이 평균이었다.

    아직 14살인 사리아는 의욕은 높았지만 평범한 재능을 지녔기에 퍼스트 서클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소중한 친구인 유페미아를 지키기 위해 하루빨리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절대 영도의 아르테미스, 치유의 데메테르와는 다르게 불의 마법을 사용하는 아폴론은 꽤나 힘든 상황이었다. 청염을 사용하는 아폴론가의 가주 피아톤은 세컨드 서클의 초입으로 4대 가주 중 가장 뒤떨어지는 상황이었다. 황실 호위를 담당하는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마리안느의 친구들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유피테르는 사리아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녀’ 덕에 절대 과거의 제로 서클이 아니게 된 그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마리안느와 꽤 친해진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처럼 서서히 다가오는 마리안느는 가족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유피테르에게 꽤 소중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았지만.

    “아, 저희에게 말을 편하게 해주세요. 유피테르 님. 제가 황녀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 모임에서만큼은 편하게 있고 싶어요.”

    유페미아 황녀가 먼저 말을 편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나이가 얼마나 많든 리투아 제국에서의 상하 관계는 분명히 신분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보다 어린 황녀에게도 극존칭을 사용하여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면 나야 고마운데. 말을 편하게 해도 괜찮겠어? 나랑 친하게 지내서 좋을 건 없을 거 같은데 말이지.”

    “그럼요. 제가 먼저 부탁드린걸요. 저 역시 3 황녀라 계승권도 낮고 지지세력도 적어서 사실, 공작 가문의 대공자보다 높다고는 못하다고 생각해요.”

    “야호. 그러면 나는 오라버니라고 불러야지. 마리와 공유하는 게 하나 더 생겼다!”

    리네아는 마리안느와 새로운 공통점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러면 점심 먹고, 간단하게 대련을 꼭 부탁드릴게요. 간단하게 하나라도 배울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이 와중에서도 사리아는 그저 강대한 존재감을 뿜는 유피테르라는 새로운 존재에게 한 수 배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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