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6화 (6/265)
  • 마리안느 아르테미스의 생일(1)

    * * *

    유피테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긍정적으로 해석한 세바스찬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우선, 돌아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와 다르게 확실하게 자기주장을 이야기하시는 점이 정말로 아르테미스다워지셨습니다. 아주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게다가 외모는 더욱 만개하셨습니다?”

    그건 확실했다. 성장한 유피테르의 모습은 어릴 때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건방질 정도로 느껴지는 자신감을 장착한 현재의 그는 더욱 미형의 모습이 되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지, 외모가 부족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남자임에도 어깨까지 내려오며 찰랑거리는 긴 머리가 어울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에.

    능력이 없음에도 가끔 사교계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은발과 은안, 쌍은의 아르테미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외모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갈 때마다 영애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뭐, 그런 금칠은 됐으니까. 본론을 이야기해줄래? 새벽부터 먼 거리를 여행해서 힘들거든.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산더미처럼 남아있고.”

    긴 실종 기간 동안 아무도 유피테르의 정확한 소식을 알지 못했다. 아르테미스 영지에서 파르테논 아카데미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로 가는 길은 치안마저 좋았다.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만한 곳이라고는 농담으로도 할 수 없었다.

    행방을 찾기 위해 4개의 공작가와 황실의 정보단체 역시 나섰지만 일말의 실마리조차 얻을 수 없었다. 신의 분노를 사서 저주받아 더는 사람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 유피테르가 부끄러워서 모습을 감췄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리고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게 되셨는데 대체 어떻게 마나를 사용하….”

    “그만. 그건 아무리 세바스라고 해도 알려 줄 수 없어. 같이 있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해둘게. 그보다 막내의 생일이라면 다른 두 동생도 오나? 다들 바쁠 텐데.”

    움찔, 순식간에 방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전쟁에도 여럿 참여했으며 본신의 힘도 세컨드 서클에 가까운 백전노장 세바스찬이 순간적으로 몸을 경련시킬 정도의 압도적인 존재감. 그 속에서 오롯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돌아온 유피테르뿐이었다.

    ‘이게 무슨….’

    세바스찬은 순식간에 냉각된 분위기에 당황했다. 유피테르가 순식간에 내뿜은 존재감은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가주를 보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당황한 마음을 숨기려고 했지만, 손에 끼고 있는 하얀 색의 장갑에 땀이 가득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 힘은 명백히 보고 받은 것 이상이다. 대체 대공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분명 문지기들은 돌아온 대공자가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보고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세바스찬은 귀를 의심했다. 제로 서클이라고 불리지만,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신의 저주를 받은 자. 그 불명예를 안고 살아간 것이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였다.

    대공자의 힘은 기사들의 나라인 시에라가 자랑하는 ‘오러’와도 분명히 다르다고 보고했다. 그 문지기는 가문에서 꽤 오래 근무했던 자로 확실한 보고만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렇다면 시에라에서 한 수를 배워온 것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세바스? 무슨 일 있어? 그래서 카테리나랑 제이스란이 전부 돌아오는 거지?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맞습니다. 다음 주 금요일이기 때문에 늦어도 이번 주말에는 다들 돌아오실 겁니다. 오히려 유피 공자님이 계신 생일이라 꽤 놀라울지도 모르겠네요. 마리안느 님이 태어난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니까요. 심지어 마리안느 님은 유피 공자님의 존재마저도 모를지도 모릅니다.”

    세바스찬은 얼어붙은 분위기를 마리안느의 존재라는 소재를 통해 능숙하게 풀어나갔다. 유피테르가 가문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꽤 오래된 정보여서 흥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유피테르가 돌아온 것은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마리안느의 생일까지는 애매한 시간만이 남아있었다. 그가 이 시기를 노려서 돌아온 것은 아니었으나, 계획을 현실로 이루기에 꽤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얼굴도 모르고 능력도 없다는 소문만 무성한 바보 같은 대공자…. 그게 나지. 귀여움받고 있다는 막내동생은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한데?’

    가문의 일원처럼 티를 내며 싫어할 것인가, 아니면 카테리나처럼 좋아해 줄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제이스란처럼 적당히 무시할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정보 고마워, 정말 피곤해서 그런데 아침 식사는 그냥 넘길게. 점심 식사 때 다시 와줄래? 그리고 당장 가문에서 입을 옷을 좀 준비해줘. 당분간은 이곳에 있을 예정이니까.”

    유피테르는 본인이 걸치고 있는 여행자용 로브와 한바탕 싸움으로 인해서 너덜너덜해진 옷을 손으로 짚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이 옷은 귀족 가문의 사람이 있기에는 적절하지 못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이곳을 담당하고 있는 메이드에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편안히 계시기를.”

    “나도 반가웠어, 부탁해 세바스.”

    세바스찬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소리 없이 빠르게 사라졌다. 유피테르는 그것을 보고는 옅게 웃었다. 과거와 똑같은 풍경은, 역시 안심감을 준다며.

    방에 혼자 남은 유피테르는 로브를 옷장 안에 정리해두고서 욕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씻었다. 커다란 방답게 혼자 쓰기에는 과분했지만, 그에게는 이런 상황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손님용 방이라고 해도 층만 다를 뿐 크게 다른 걸 느끼지는 못했다.

    욕실 밖으로 나오자 세바스찬이 말했던 메이드가 벌써 다녀갔는지 옷과 간단히 즐길 수 있는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옷도 다과도 불평할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귀족들이 저택 내부에서 활동할 때 입는 편안한 평상복이었다.

    그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품질이 좋아진 듯 보였다.

    유피테르는 준비해둔 옷으로 갈아입고는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차에 대해 까다로웠는데, 이 차는 그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했다. 아마, 세바스찬이 특별히 준비해둔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서는 차의 향기를 맡으며, 침대에 걸터앉아 햇살이 웃어주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 보던 풍경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얼음 조각들. 그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리 크지 않은 크기의 마법 연습장.

    ‘저기서 세바스랑 엄청나게 노력했었지. 마나를 느끼겠다고 진짜 하루종일 고민했는데.’

    처음에 느껴지는 맛은 씁쓸하지만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달콤함이 느껴지는 상등품. 아마 데메테르 공작가의 특산품일 것이다. 데메테르 공작가의 차는 각 황실도 인정한 세아니아 대륙 최고의 차 생산지였다.

    또, ‘그녀’와 함께 마시던 차가 이런 맛이었으니까. 이 맛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

    똑똑.

    차와 함께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유피테르의 방에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

    “혹시, 유피테르 오빠인가요? 저는 마리안느라고 하는데요….”

    “마리안느. 아, 막내동생이구나? 미안 혼자 있고 싶으니까. 조금 돌아가 줄래?”

    “히잉…. 몰래 왔는데 안 되나요?”

    문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연상될 정도의 분위기와 목소리. 정말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인 게 확실하게 티가 났다. 그래도 그가 돌아온 게 이렇게 빨리 소문이 날 리는 없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여기를 알아낸 건지는 흥미롭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동생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가 꽤나 난리를 치기는 했지만, 이렇게 어린아이는 마나의 충돌에 대해서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을 텐데. 그렇다고 세바스찬이 그렇게 입을 쉽게 놀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문을 열어줄게.”

    “네! 고맙습니다. 오빠.”

    오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기한 표현이었다. 단어 자체가 주는 느낌이 신선했다. 그가 기억하는 한 카테리나는 그를 오라버니라고 불렀으니까.

    유피테르는 마시던 차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문에 다가갔다. 문을 열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마나에 반응하여 천천히 문이 열렸다. 마나를 감지하는 아티팩트는 역시 편했다.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마리안느의 양 갈래로 잘 정돈된 머리 스타일이었다. 큰 은색 눈망울과 잘 어울린다고 유피테르는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유피테르 오빠. 처음 뵙겠습니다. 마리안느 아르테미스입니다. 올해 5살이에요.”

    “이것 참, 정중한 인사를 해줘서 고마워.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야. 잘 부탁해.”

    “우와…. 이뻐요. 제이 오빠랑은 완전 다른 스타일이네요. 리나 언니가 말하는 걸 이해할 수 있어요. 너무 이뻐요.”

    뜬금없는 칭찬의 말.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마리안느의 인상과 잘 어울렸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가득 담은 배게 같이 몽실몽실한 느낌이었다.

    “하하. 과분한 칭찬 고맙네. 우선 들어올래? 서 있기 힘들어 보이네.”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어린아이만의 순수함.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유피테르는 5살의 막내를 방 안으로 안내하고, 의자에 앉혔다. 가문을 싫어하더라도 어린아이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으니까.

    “네네네! 들어갈게요. 고맙습니다.”

    마리안느는 고개를 힘차게 앞뒤로 흔들고, 뚜벅뚜벅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어린 나이라 귀족의 우아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이 차가 큰 막내의 어리광은 아직 용인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유피테르 본인을 제외하고서라도, 아버지를 뛰어넘을지도 모르는 천재적인 재능의 여동생과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는 남동생이 있기에 이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평범함을 간직할 수 있었을 수도 있었다.

    갓 태어난 가문의 아이에게 큰 짐을 씌우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좋지 않은 건 확실했다. 물론, 유피테르 본인의 경우는 첫 번째 자식이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이곳에는 어떻게 온 거야? 몇몇 사람들 말고는 아직 내가 귀환한 것을 모를 텐데. 그리 반기지도 않을 거고.”

    “친하게 지내는 메이드 언니가 아침 식사시간에 몰래 알려줬어요! 오빠가 돌아왔다고. 어디서 머무는지 까지도요!”

    “무섭다거나 하진 않았어? 나이도 많이 차이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잖아? 잘도 오빠라고 부르네.”

    “오빠는 오빠에요! 유 오빠. 아무것도 모른다 이런 건 하나도 상관없어요. 보고 싶고 알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하죠! 그리구….”

    너무나도 빠르게 말하는 게 걱정되어 유피테르는 마리안느를 테이블 옆 의자에 앉히고 차를 한 잔 내주었다. 어린아이라 워낙 기운찼지만 쉬지 않고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니까.

    “이것 좀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해. 시간은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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