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적극적인 개입(3)
“이크.”
중년 사내, 파프닐이 가벼운 경호성과 함께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검풍이 그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제대로 지켜주셔야 합니다? 이러다 죽겠어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레인이 검격으로 글라시아 라볼라스를 밀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파프닐의 참전으로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제 상대를 몰아세우는 쪽은 저쪽이 아닌 이쪽이었다.
조금 불안 불안한 측면이 있다는 게 문제일 뿐.
“애초에 왜 그런 강력한 힘을 가졌으면서 스스로를 지킬 능력만큼은 부실한 거냐.”
“저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겠습니까?”
레인이 혀를 찼다. 툭 치면 죽어버릴 것 같은 이 사내를 신경 쓰느라 기껏 잡은 우세를 마음껏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아쉽기 그지없는 상황. 그래도 상황이 반전되었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하리라.
“저 마법사 녀석, 거슬리는군.”
“히히히! 이거 상당히 짜증나네! 자꾸 타이밍이 엇나가니까 저 녀석을 난도질할 수가 없잖아!”
두 마왕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파프닐은 짐짓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레인의 뒤쪽에 숨었다.
“확실하게 보호해주셔야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아요.”
“알겠으니까 제대로 보조해.”
레인이 대지를 박차고 곧바로 푸르푸르에게 돌진했다. 글라시아 라볼라스를 이기어검으로 견제해가면서.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군!”
푸르푸르가 권능을 발현, 레인의 발밑에 돌풍을 생성시켰다. 수없이 많은 바람의 칼날이 회전하며 레인의 전신을 노렸다.
레인은 사전에 돌풍이 생겨날 영역 바깥으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것을 피해서 움직이려면 한 차례 우회해야 하고, 그만큼 상대에게 도달하는 시간이 늦어지게 된다.
<시간축 고정(Time base fixed)>.
시기적절하게 파프닐이 서포트해 왔다.
일대 공간의 시간을 찰나 동안만 동결시키는 마법. 생명체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마법인지라 주위 모든 사물이 정지한 가운데서도 레인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단순히 사물뿐 아니라 권능으로 생성된 돌풍마저 그 움직임을 멈췄다. 레인은 그 영역을 단숨에 가르고 뛰쳐나가 푸르푸르를 향해 쇄도했다.
“큭.”
푸르푸르가 곧바로 연속해서 권능을 발현했다. 자신의 주위에 바람의 칼날로 장벽을 세우고, 일대 전역에 무작위로 번개가 내리치게 만들었다.
레인이 지체 않고 바람의 장벽에 일장을 내질렀다. 일순 장벽에 구멍이 뚫렸다. 본래라면 순식간에 복구되는 장벽 안쪽으로 파고들기까진 힘들었겠으나, 때맞춰 마법 지원이 왔다.
<시간 가속(Time acceleration)>.
레인의 몸이 일순 가속해 장벽을 통과했다.
일반적인 가속 마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갑작스러운 속도 상승으로 시전자에게 괴리감을 선사하는 그런 종류의 마법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초월자의 영역에 이른 무인에게도 적용되는 마법인 시점에서 상궤를 벗어났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콰지지지직!
레인의 검격이 권능에 뒤덮인 푸르푸르의 손과 충돌했다. 역량의 차이가 명백한지라 푸르푸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촤악! 촤악! 촤악!
한차례 합을 겨루고, 연속해서 쏟아내는 검격.
아무래도 이런 초근접전에는 약한 면모를 보이는 푸르푸르의 전신이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화했다. 다만 그 다급한 와중에도 치명상만은 입지 않는 노련함을 보였다.
“날 잊으면 섭섭하지!”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글라시아 라볼라스가 이기어검의 견제를 벗어나 쇄도해왔다. 레인은 애써 미련을 떨치고 자리에서 물러나 파프닐에게로 되돌아갔다.
그 모든 일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지고 마무리되었다.
“으아아! 으아아아아!”
파프닐은 주위에 떨어져 내리는 번개, 그리고 눈을 번뜩이며 덤벼오는 마족들을 피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가속 마법을 마지막으로 지원이 끊긴 건 그 탓이었다.
연속해서 시간축을 비틀어 위기를 벗어나는 파프닐. 어느새 레인의 이기어검의 지원하듯 그의 주변을 맴돌며 피뢰침처럼 번개를 받아내고 달려드는 마족들을 견제했다.
“이제 좀 살겠네.”
이내 레인이 도착, 주위 마족들을 크게 휩쓸었다. 마왕들의 권능을 쳐냈고, 후속 견제도 모조리 무력화시켰다.
“쯧.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는데.”
“그리고 제가 죽었겠죠.”
아쉬움을 토로하는 레인에게 파프닐이 불평하듯 말했다. 왜 조금 더 빨리 구해주러 오지 않았냐는 의미를 담아서.
그리고 그 시점에, 전장에 큰 변화가 일었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갑자기 전장의 한쪽 구석에서 솟아오른 본 드래곤의 브레스가 한창 인류군을 추격하고 있던 마족군 공중병단을 휩쓸었다.
그로 인해 일시적인 혼란에 빠진 마족군 공중병단 사이로 그 숫자만 이백에 달하는 본 와이번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혼전이 벌어졌다.
이 순간을 위해 헬 하운드와 마충을 모조리 해체하고 한계 용량을 본 와이번으로만 꽉 채워둔 로엘이었다. 본 와이번들은 로엘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혼란에 빠진 비행형 마수들을 습격했다.
다수의 본 와이번이 내뿜는 브레스가 허공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아래쪽에서 전쟁에 열중하고 있던 양측 병력의 시선을 일순 강탈할 정도로 강렬한 퍼포먼스였다.
“저, 저게 무슨?”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 일격은 공중전의 흐름을 끌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양측의 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누가 봐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광경이었으니까.
오래지 않아 마족군 공중 병단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아군 진영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전장의 흐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 * *
아파에르 영지를 향해 몰려온 마족군을 통솔하는 마왕은 모두 합쳐 스물셋. 그중에는 마족 최고의 정보상이라 불리는 마왕, ‘아스타로드’도 있었다.
그녀는 휘하 세력 구성원 전체가 ‘정보원’이라는, 더없이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게다가 본인이 가진 권능은 그 반경만 해도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텔레파시(telepathy)’.
그녀는 마족군 전역에 퍼져 있는 휘하 세력으로부터 텔레파시를 통해 정보를 얻고, 그것을 취합함으로써 도출된 결론을 다시 텔레파시를 통해 다른 마왕들에게 전달했다.
[군대를 한 차례 물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뭣!”
“그게 무슨 소리요!”
즉시 다른 마왕들에게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으나, 아스타로드의 어조는 단호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이미 제공권이 적측에 넘어간 상황입니다. 아직 남은 공중 병단이 있지만 지금 그들을 출격시키기엔 타이밍이 좋지 않습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휘하 정보원들이 전해오는 전황을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제공권도 그렇고, 군의 사기도 문제입니다. 워낙 시각적인 퍼포먼스가 컸던지라 아군의 동요가 큽니다.]
“크으.”
[서쪽에서는 배신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파악된 숫자는 대략 일천. 그래도 상위 마족 중에서는 배신자가 나오지 않는 듯합니다만, 혼란이 거셉니다.]
이외에도 몇 가지 문제가 더 있었지만, 아스타로드는 구구절절한 설명은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이대로 계속해서 들이받으면 승패를 떠나 아군이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반대로 한 차례 물러났다가 군을 재정비하면 필승을 장담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아군이 전력적으로 우세하다는 건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군을 물릴 거라면 아직 피해가 그리 크지 않은 지금 시점이어야 했다. 결단이 늦으면 늦을수록 피해가 커지고 퇴각이 힘들어지리라.
[굳이 이번 전투에 집착해서 큰 손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억지로 진격해 승리를 얻는다고 해봤자 메리트라고는 아직 피난을 마무리하지 못한 인류의 행렬을 습격함으로써 얻는 이득 정도입니다. 지금의 마족군은 그 정도 이득에 목멜 필요가 없지요.]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한 합리적인 판단.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장기였다.
이내 그녀의 주장에 긍정하는 분위기가 마왕들 사이에 형성되었다. 그녀의 실력에 관해선 모두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래지 않아 마족군 전체에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거대한 군세의 물결이 차근차근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 * *
‘생각보다 훨씬 퇴각이 빠르군. 저쪽에 뛰어난 역량의 지략가가 있는 건가.’
레인이 용케 진형을 흩트리지 않은 채로 차근차근 후퇴하고 있는 마족군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니, 그게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빨라. 전장 전체를 아우르는 특수한 정보체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보는 게 옳겠지.’
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전장의 흐름을 한눈에 알아보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제공권을 적에게 빼앗긴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할 터.
그럼에도 저리 기민한 대응이라면,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겠지.
‘어느 마왕의 권능쯤 되려나.’
나중에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바르바젠에게서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으니 그가 파악하지 못한 마왕 중 하나라는 소리겠지.
아무튼, 이래서야 사전에 계획했던 것보다 적은 피해밖에 줄 수 없을 듯했다. 딱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여러 변수가 있을 것이고, 마냥 계획대로 잘 풀리지만은 않을 거란 생각은 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너희 둘 만큼은 절대 그냥 보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눈앞의 두 마왕만큼은 절대로 곱게 보내줄 수가 없었다. 부족한 전과를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자리에서 그들을 잡아야 했다.
흉흉한 안광을 토해내는 레인을 응시하며, 마왕 푸르푸르는 인상을 사정없이 구겼다.
‘젠장.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가 내심 욕설을 뱉어냈다.
저 괴물 같은 인간 무인은 이쪽을 곱게 놔줄 생각이 없다는 듯, 집요하게 달라붙어 오고 있었다. 그 집요함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래도 그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몰리진 않았으리라. 진짜 문제는 저쪽에서 능글능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법사였다. 그의 마법은 그야말로 적의 발목을 붙드는 데에 특화된 종류의 것이었다.
항상 특유의 쾌활함을 표출하던 글라시아 라볼라스마저 이 상황에는 조금 긴장이 되는 모양.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마족군 진영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던 전투 영역은, 점차 기세를 타고 밀려오는 인류군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빠르게 탈출하지 못했다간 포위될 판국이었다.
푸르푸르는 극도의 흥분에 눈이 벌개진 여마왕과 눈짓을 교환했다. 그다지 미덥지 못한 상대지만, 역시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그녀와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재차 눈짓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동시에 권능을 쏟아내다가 틈을 봐서 뒤로 빠지자고. 알겠다는 듯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치직. 치지직.
그의 권능에 의해 생성된 전류가 타이밍을 조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극히 미약한 전류가 일정한 리듬에 따라 글라시아 라볼라스의 손끝으로 흘러들어갔다.
“지금!”
콰르르르르릉!
정해진 타이밍에 맞춰 푸르푸르가 전격을 쏟아냈다. 마치 온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압도적인 전격의 홍수가 레인과 파프닐이 서 있는 장소를 집어삼켰다.
“……?”
그런데, 함께 쏟아져 나왔어야 할 글라시아 라볼라스의 권능이 보이질 않았다.
“설마!?”
푸르푸르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대체 어느 틈에 혼자 몸을 빼낸 것인지, 글라시아 라볼라스가 빠르게 발을 놀려 달아나고 있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다 이쪽과 눈이 마주치자 매혹적인 눈웃음까지 친다.
“캬하핫!”
촤아악!
심지어 거기서 한술 더 떴다. 갑자기 신형을 반전시키더니 사정없이 검풍을 날려 보내온 것이다. 공격 범위엔 레인과 파프닐, 그리고 푸르푸르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빌어먹을 년이!”
푸르푸르가 경악해서 욕설을 내뱉는 가운데, 단숨에 전격의 폭풍을 뚫고 나온 레인이 그의 뒤를 노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 대신 한 자루 창이 쥐여 있었다.
그가 악귀와도 같은 얼굴로 회전력 듬뿍 실린 창을 힘껏 내질렀다.
콰드드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