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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벨리아 왕국(1) (157/249)
  •  157화. 벨리아 왕국(1)

     어느 비밀스러운 공간 내부. 그곳에 여섯 남녀가 모여 주제가 불분명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계획은 잘 진전되고 있나?”

    “크흐. 물론이지. 날 뭘로 보는 거냐.”

    “뭐긴 뭐야. 늙어빠진 드워프지.”

    “뭐가 어째!”

    “아하하하하하하! 늙은이! 늙은이래!”

    “닥쳐라!”

     온몸을 두꺼운 갑주로 도배한 늙은 드워프가 윽박질렀지만, 보랏빛 머리칼을 지닌 어린아이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드워프는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팩, 하고 돌렸다.

    “이야기가 새는군. 그쯤하고 계획에 대한 걸 계속해서 이야기했으면 하는데.”

     냉막한 인상의 용인족 남성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기분이 상한 드워프는 한 차례 코웃음을 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자. 너무 그러지 마세요. 요즈음 분위기도 별론데, 우리끼리 분쟁을 일으켜서 좋을 게 없지 않나요. 기분 푸세요.”

     결국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여성이 중재에 나섰다.

     어딘가의 여신상이 연상되는, 살결이 대부분 노출될 정도로 헐벗은 복장. 수없이 착용한 번쩍이는 장신구. 육감적인 몸매에 대륙에서 보기 드문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크흠. 리메라 양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후, 닭살 돋아. 노인네가 징그럽기까지 하다니. 히히히.”

    “네놈은 닥치라고 했다.”

     결국 드워프 쪽이 먼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는 ‘리메라’라고 불린 여인에게 굉장히 약한 면모를 보이곤 했다.

    “그래서, ‘계획’은 어디까지 진척되었나요?”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리메라 양. 크흐흐. 얼마 있지 않아 벨리아 왕국은 완전히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될 겁니다.”

    “수고하셨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고생해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드워프가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보랏빛 머리칼 소년이 구역질이 올라온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두 사람이 또다시 투닥거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제파스 님.”

     여인, 리메라는 그런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려 한쪽에 앉은 소년에게 말을 붙였다.

    “어떤가요. 제공한 실험재료들은 충분한가요?”

    “충분해. 넘칠 정도로.”

     밤색 머리칼에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한 열여덟 살 소년이 심드렁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굉장히 성의 없는 태도였지만, 여인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부족한 게 있다면 그게 얼마나 되든 부담 갖지 말고 말하세요. 모두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당신에게 마스터께서 걸고 계신 기대가 크답니다.”

    “그러지.”

    “당신의 그 ‘군대’는 이후에 마스터께서 연공을 마무리한 뒤엔 그분을 보필할 군대가 될 예정이니까요. 힘내 주세요.”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겨우 이런 말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부르지 마. 시간 아까우니까.”

    “…….”

     소년은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여인, 리메라는 그 무례한 태도에도 싱긋 웃는 얼굴 그대로 주위에 선언했다.

    “자, 그럼. 이번 회합은 여기까지로 하죠. 슬슬 흩어지도록 할까요.”

    “그 전에.”

     그때, 그녀의 말을 자르고 끼어드는 사내의 목소리가 있었다. 용인족 남성이었다.

     그가 드워프 쪽을 돌아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미리 말해두고 싶군. 이번엔 쓸데없이 다른 데에 신경 팔다가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지난번과 같은 일이 있어선 안 된다.”

    “크흐. 글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농담이 아니니 새겨듣는 게 좋을 거다. 넌 전적이 너무 많아. 또다시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일을 그르친다면 내가 직접 베어버리겠다. 그런 녀석 따위, 더 이상 조직에 필요 없으니.”

    “어이구 무서우셔라.”

     드워프는 명백한 협박에도 그저 한 차례 너스레를 떨었을 뿐,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용인족 남성의 이맛골이 깊게 파였다.

    ‘이 발정 난 늙은 땅딸보가.’

     드워프 노인은 분명 뛰어난 실력자였다. 그러나 트러블을 너무 많이 일으켰다. 그것도 주로 여자가 관련된 문제를.

     그냥 문제만 일으키면 상관없는데, 그게 심해서 중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자제하질 못했다. 적어도 거사 전날 밤에 여자에 빠져 정작 당일에 지각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자신으로 인해 조직이 큰 피해를 입더라도 개의치조차 않는 뻔뻔함까지 갖추고 있어 더욱 짜증 나는 상대였다. 늙은이 주책이 아주 하늘을 찔렀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드워프.”

    “네이, 네이.”

     드워프 노인은 귓가를 후비적거리며 건성으로 답할 뿐이었다.

     용인족 사내가 허리춤에 매인 검 손잡이를 한 차례 으스러뜨릴 듯이 붙잡았다가 다시 놓았다.

     * * *

     벨리아 왕국에 도착한 로엘과 르우벤은 곧바로 왕국 서부에 존재하는 밀림지대로 향했다. 수인들의 영토인 ‘대밀림’과 이어지는 이 대지는, 수많은 곤충, 벌레들의 터전과도 같은 곳이었다.

    “근데 이 넓은 곳을 어느 세월에 다 뒤져서 그 여자를 찾냐.”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도 잘 알지는 못하는 위인이라서. 이 근방을 활동 거점으로 삼아 움직인다는 것밖에는…….”

    “왜 그걸 미리 말 안 해줬어?”

     원래 역사대로라면, 지금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대륙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 두 천재가 등장하게 되어 있었다. 동갑내기 남녀 마법사가.

     마법사는 자질만 있으면 경지에 이르기까지 들여야 할 시간을 얼마든지 단축시킬 수 있다는 세간의 평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십 대 후반에 현자의 칭호를 얻어냈으니.

     남자 쪽은 안타깝게도 프레퍼에 속한 인물이었다. 이후 게르반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 수없이 많은 악행을 저지르는.

     그렇기에 르우벤은 그를 동료로 삼는 것을 애초부터 포기했다. 대신, 여자 쪽을 노리기로 했다.

     마침 그녀는 끝까지 특정 세력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활동 거점이 명확한 인물이라는 점도 딱 좋았다.

     본래라면 접촉한대도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힘들겠지만, 르우벤은 그녀가 절대 거절할 수 없을 협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영입할 수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협상이고 뭐고 그녀를 눈앞에서 대면한 뒤에야 가능할 것 아닌가. 그녀가 활동 거점으로 삼고 있는 밀림지대는 넓어도 너무 넓었다.

    “쓸 만한 아티펙트는 없고?”

    “적어도 얼굴도 모르는 상대를 단번에 찾아낼 수 있는 편리한 물건은 없지. 시간은 아직 있으니까. 일단 적당히 돌아다녀 보자고.”

     애초에 곤충과 벌레의 현자 쪽을 찾는 데엔 그렇게 급하게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얼마 뒤에 일어날 프레퍼와 ‘기본의 현자’의 충돌 전까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전까지 찾지 못한다 해도 그쪽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와서 찾으면 그만이었고.

     로엘이야 바쁘니 먼저 돌아가겠지만, 르우벤은 시간이 충분했다. 아카데미의 여름방학은 3개월이나 되었으니까.

    “자, 이것 받아.”

    “뭔데?”

    “방어막을 생성시키는 아티펙트.”

    “이건 왜?”

    “그렇게 뛰어난 수준의 방어막을 형성시키진 못하지만, 지속력이 좋은 물건이야. 여길 돌아다니는 동안엔 그게 크게 도움이 될 거다.”

    “?”

     르우벤은 밀리아와 플로라에게도 아티펙트를 나누어 주었다. 로엘이 그것을 보고 ‘역시 아티펙트가 썩어나는 녀석’이라는 새삼스러운 감상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일행이 밀림 내부로 진입했다.

     초입 부분에선 그다지 느끼지 못했지만,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로엘은 르우벤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밀림에서 방어막 아티펙트는 굉장히 유용한 물건이었다.

     툭하면 방어막 바깥으로 온갖 종류의 벌레, 곤충들이 들러붙는, 절로 혀를 차게 되는 광경. 그중에는 모기를 비롯한 해충도 다수 섞여 있었다.

    “벌레와 곤충의 현자가 활동 거점으로 삼을 만도 하네.”

    “그렇지?”

     로엘의 발언에 르우벤이 살짝 웃었다.

     이내 일행은 각자 흩어져 주변을 수색했다. 빠르게 움직이며 드넓은 밀림지대에서 인기척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고 네 시간이 흘렀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여기에 있는 것 확실해?”

    “아마도.”

     밀림지대 한쪽을 통째로 불태우고 방어막을 둘러 베이스캠프를 만든 일행이 식사를 하며 힘 빠진 대화를 나눴다.

    “이런 거였으면 미리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그래야 전투팀을 풀든 인력을 고용하든 정보 길드에 의뢰하든 미리 조치를 취해뒀을 것 아니야.”

    “미안. 너무 막연하게 생각했네. 이렇게 찾기 힘들 줄이야.”

    “아니, 됐어.”

     따져서 뭘 하겠는가. 르우벤 본인도 이럴 줄은 몰랐다는데. 로엘은 가볍게 한숨을 불어내며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다.

     그러자 이번엔 플로라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거 이렇게 해서 찾을 수는 있는 것 맞아?”

    “일단 못 찾으면 기본의 현자 쪽 일을 먼저 마쳐두고 다시 오면 되니까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르우벤이 적당히 답변했다. 그런데 그 답변 직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로엘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바엔 차라리 벨리아 남부로 가서 관광이나 하자.”

    “뭐?”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식은 너무 비효율적이야. 정말로 찾아낼 가능성도 희박하고. 여기서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느니 차라리 관광이나 하면서 재충전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도.”

    “미리 이곳 왕국에 파견해 놓은 인력에 네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해둘게. 이곳 현자의 영입 문제는 그 결과가 나오면 네가 알아서 처리해.”

     르우벤이 탄성을 흘렸다. 그런 식의 접근방식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무조건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너무 매여있었던 모양.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게 차라리 지금과 같은 주먹구구식 탐색보단 훨씬 나을 거다. 그러니까 식사 마치고 나면 잔말 말고 본 드래곤이나 대기시켜.”

    “미안하다.”

    “됐다니까.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참에 나도 좀 쉬어야지. 요즘 너무 빡세게 일만 했어.”

    “그렇게 생각해 주면 다행이고.”

     그렇게, 예기치 않은 관광 일정이 정해졌다.

     * * *

     벨리아 남부에는 벨리아 왕국 제2의 수도라 불리는 도시, ‘카르테나’가 있다.

     해안과 인접한 도시인 카르테나는 풍성한 볼거리와 먹거리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했는데, 그 특성상 로엘이 펼친 사업장이 여럿 들어선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두 커플이 더블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이거 먹어보세요, 누나. 맛있네요.”

    “그래? 고마워.”

     로엘이 플로라에게 노점 음식을 건넸다.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음식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군것질도 나쁘지 않다.

    “주인님. 일전에 그라푸아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어, 그런데?”

    “저기서 판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짜? 와! 매물이 없어서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고 있었는데! 역시 해양도시 카르테나!”

     밀리아가 가리킨 상점으로 달려간 르우벤이 모종의 액체가 담긴 조그마한 유리병을 구입해 왔다.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너, 밀리아 양과 거기까지 간 관계였냐?”

     로엘이 드물게 동요한 얼굴로 물었다.

    ‘그라푸아’는 해양 몬스터인 크라켄의 내장기관을 특별한 방법으로 정제한 액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미노타우로스의 꼬리뼈조차 비교되질 않는 효능을 지닌 정력제였다.

    “뭘 그런 당연한 걸 물어?”

     르우벤이 쿨하게 답변했다. 로엘이 할 말을 잃었다.

     로엘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플로라 쪽으로 향했다. 마침 플로라도 로엘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터라 시선이 교차했다.

    “…….”

     플로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로엘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내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음?”

     그러던 와중, 르우벤이 광장 한쪽에서 길거리 연주가 한창인 음유시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어쩐지 들어본 것만 같은 목소리에 이끌려서.

     우뚝.

     그리고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아이들과 여인들에 둘러싸여 있는, 상당한 수준의 외모를 지닌 미청년에게 정확히 고정되었다.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선 그를 일행이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왜 그래?”

    “저자가 이 시기에 벨리아 왕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나.”

    “뭐?”

    “로엘. 아무래도 네 결정이 옳았던 것 같다. 여기서 저 인물과 조우하게 될 줄이야.”

    “?”

    “저쪽에 있는 저 음유시인, 정령사야. 그것도 대륙에 몇 존재하지도 않는 최상위 정령사.”

    “최상위 정령사면 거의 초인에 맞먹는 실력자잖아. 그런데 엘프도 아니고 인간 중에 최상위 정령을 다루는 자가 있다고?”

     로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인간은 선천적인 자연 친화력이 엘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인간 중에서도 간혹 정령사가 출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최상위 정령사는 역사상 등장한 사례가 없었다. 간혹 일반적인 정령의 한계를 초월한 암흑정령이 등장한 적은 있었지만.

    “사실 엘프야. 인간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거지. 실제 나이도 지금 시점이면 40대 초반 정도는 될걸?”

    “오.”

    “반드시 끌어들여야 할 인재야. 만나게 되면 무슨 수를 써서든 회유하려 했는데, 이런 곳에서 볼 줄이야.”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물이야?”

    “그래. 단순히 그 자신의 실력만 대단한 게 아니거든.”

     르우벤의 입가에 미소가 내걸렸다.

    “저 양반이 엘프들 사이에서 상당히 명망이 높은 인물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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