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서장 (151/249)
  •  151화. 서장

     길었던 유적 공략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일행은 마검 소지자인 르우벤을 앞세워 빠르게 유적을 거슬러 올라갔다.

     르우벤의 말대로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함정도, 언데드도, 조각상도, 가디언도. 모두가 일행에게 해를 끼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들어오는 길에는 여건상 갈 수 없었던 유적 구석구석을 뒤지며 움직였다. 그렇게 몇몇 비밀공간에 숨겨져 있던 아티펙트들을 수거했다.

     안타깝게도 유적 자체를 구동시키는 아티펙트는 챙겨갈 수가 없었다. 이미 유적과 완전히 동화되어버린 상태였기 때문.

     그 와중 레인은 제2 유적을 지나면서 일행과 따로 움직였는데, 이후 합류한 일행은 그가 가져온 물건을 보고 기겁했다.

    “왜 로엘에게서 특수한 용기를 받아 가나 했더니만.”

     르우벤이 질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레인이 수십 개의 용기에 가득 채워온 것은, 유적의 함정지대를 순회하며 모은 ‘극독’들. 그것을 어디에 활용하려 하는지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계속해서 이동.

     제1 유적을 거의 다 돌았을 무렵, 레인이 턱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쓸 만한 물건은 별로 없네.”

     아무래도 레인이 원하는 종류의 물건은, 그 자체에 충실한 성능을 지닌 무구류였다.

     화려한 성능이 달린 아티펙트들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공간검을 탐낸 것은 특수한 케이스였고.

     영웅과 악마의 유적에서 얻은 아티펙트들은 호화찬란했지만, 레인이 유용하게 사용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있다면 제3 유적에서 얻은 몇몇 공용 아티펙트 정도일까.

    “…….”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레인이 르우벤에게 물었다.

    “유적 탐사로 내게 올 지분. 전부 네게 몰아줄 테니 대신 네가 원래 지니고 있던 아티펙트를 좀 받을 수 있을까.”

    “응?”

    “네가 원래 가지고 있던 아티펙트들 중에서 내게 맞는 것들을 골라서 받고 싶다고.”

    “얼마든지.”

     르우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과 레인의 취향은 확실하게 갈리기에 아티펙트 배분에 문제가 생길 소지는 적었다.

    “충분히 챙겨 줄게. 그리고, 이전에 내가 사용하던 사슬낫 기억하지?”

    “어.”

    “이참에 그것도 줄게. 이번 유적 공략 건과는 별개로.”

    “그걸 주겠다고?”

    “여러모로 노력해 봤는데, 나로선 도저히 완숙하게 활용을 못 하겠더라. 너라면 대충 몇 달만 시간을 들여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겠지.”

     르우벤이 옅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지옥염을 무기에 싣거나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공격의 궤도를 틀어버릴 수 있는 옵션이 있지만, 네겐 그다지 끌리지 않는 성능이겠지?”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활용하기에 따라선 굉장한 유용성을 보일 성능일지 모르지만, 그 정도는 그냥 자신의 능력으로도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사슬낫의 성능 중에 가장 중요한 건 이거지. 원하는 대로 길이를 늘이고 줄일 수 있다는 것. 적어도 200미터까진 늘어나는 것 같더라고.”

    “확실히 그건 좀 끌리는군.”

    “비기스트에 검강을 생성시키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면, 그 사슬낫도 쓸 만하지 않겠어? 거기다 길다고 해봐야 표면적은 비기스트에 비할 바가 아니니 금세 사용할 수 있게 될 것 같은데.”

    “비기스트를 활용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건가.”

    “심지어 앞으로 쓸 일이 많을 거야. 마왕군에는 대형 마물이 많으니까. 그만큼 대형 괴수를 상대하는 데 유용한 물건은 몇 없다?”

     르우벤의 설명에 레인이 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방문 판매원도 아니고.”

    “방문 판매원?”

    “그런 게 있어.”

     르우벤의 반문에 로엘이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의외로 르우벤에게 장사꾼의 소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런 와중, 레인이 로엘에게 물었다.

    “‘그건’ 안 사용하려고?”

    ‘그것’이란, 제3 유적에서 획득한 시간의 현자의 유물을 뜻했다.

     로엘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이런 수상쩍은 걸 그냥 사용할 순 없지. 일단 여러모로 알아보고 나서 쓰려고. 여기 저장된 ‘기록’도 지금 쓰지 않을 것을 권하고 있기도 하고.”

     수상쩍은 물건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일회용 소모성 아티펙트라는 점도 사용을 보류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적어도 이게 무슨 물건인지는 파악하고 나서 사용해야 할 것 아닌가.

    “그나저나 생체 정보 인증에 성공하다니. 알고 보니 너도 굉장한 혈통이었던 것 아냐? 네 선조가 과거에 하르넴과 함께 활약했던 영웅 중 하나였다든지”

    “그런가?”

    ‘생체 정보 인증’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일행은 모두 실패한 것을 로엘 혼자서 성공했으니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리라 짐작할 뿐.

     일단 회중시계의 소유권은 로엘에게로 넘어갔다.

     그 활용을 위해, 로엘은 황실 도서관, 엠페러 아이즈 방문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보를 모아볼 생각이었다. ‘시간의 현자’와 그의 유물에 대한 자료를.

    “아무튼, 그 문제는 나중으로 두고. 다들 다시 가면 써. 정체를 숨겨야지.”

     르우벤이 처음에 들어선 지하유적 입구 앞에 서서 일행에게 가면과 로브를 나눠주었다. 일행이 군말 없이 그것을 착용했다.

     그그그긍.

     제단이 옆으로 밀려나며 입구를 드러내었다. 일행은 입구 안쪽에서부터 바깥으로 차례차례 걸어 나왔다. 이전과 달라진 것 없는 피라미드형 건축물 내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혹시 여기서부터 포위가 펼쳐져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네.”

    “아무래도 유적 내부에서 포위망을 펼치고 있기는 껄끄러웠던 거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해?”

    “아니. 여긴 진짜 그냥 입구야. 아무런 장치도 없어.”

     르우벤이 고개를 저었다. 노러츠 왕국군의 소심함을 비웃듯,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가자. 여기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으니.”

    “너희 둘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하니 잘 뒤따라오고.”

     네 사람이 건축물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로부터 새어 나오는, 며칠 만에 보는 태양 빛이 그들을 반겼다.

     * * *

    “나, 나왔다!”

    “비상! 비상! 괴인들이 유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유적 바깥에 구성되어있던 포위망에 빠르게 소란이 번졌다. 병사들이 웅성거리고 기사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리고, 막사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초인’이 병력을 제치고 앞으로 나서 ‘괴인들’과 대치했다.

    “네놈들이냐? 겁도 없이 왕국 소유의 유적에 무단침입한 놈들이?”

     그중 대형 해머를 어깨에 걸친 사내가 내뱉는 발언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왕국 소유 유적이라니.

    ‘머리가 좀 모자라나?’

     로엘의 감상이었다.

     애초에 유적이란 건 국가의 소유가 될 수가 없었다. 그게 통상적인 인식이자 관례였다. 공략이 완료된 유적이라면 모를까.

     노러츠처럼 썩어빠진 국가라면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하긴 했다. 아니, 이만한 유적이라면 딱히 노러츠가 아니더라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올 법하긴 하지만.

     그러나 적어도 유적의 소유권에 대한 왕국의 주장은 각성자 일행이 유적에 들어선 이후에나 이뤄졌을 터.

     그걸 굳이, 이 시점 이 장소에서, ‘괴인들’에게 언급하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봐도 그냥 폼 잡고 싶어서 내뱉은 자아도취성 발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주위 병사들이 그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한 번씩 던지는 것만 봐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기색을 보아하니 그다지 인망도 없는 인물인 듯했다.

     로엘이 그런 평가를 내리고 있던 와중.

    “플리퍼 자작?”

     르우벤의 발걸음이 우뚝, 하고 멈췄다. 그의 시선이 상대에게 못 박힌 듯 떨어지질 않았다. 어깨가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괴인들은 당장 정체를 밝혀라!”

     으드득.

     르우벤이 이를 갈았다. 어찌 이 목소리를 잊을 수가 있을까.

     섬뜩한 기세가 전해져 오자 레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 왜 그렇게 흥분했냐.”

    “저 녀석이야. 전생에 단장을 죽인 녀석.”

    “아.”

     레인이 바보같이 거대한 해머를 응시하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적당히 길만 뚫어서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지만, 안 되겠다. 방식을 변경해야겠어.”

     르우벤이 가면 아래서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플리퍼 자작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그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사실 플리퍼 자작을 직접 보기 전까진 이렇게까지 감정이 격해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그였다. 일단 ‘그 일’은 현생에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었으니.

     그런데 막상 마주치게 되자 단숨에 감정이 들끓었다. 살심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어쩌려고?”

    “죽이고 갈 거다.”

    “야. 정체를 숨겨가면서 초인의 영역에 이른 무인을 죽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냐.”

    “들키더라도 저 녀석만큼은 죽이고 가야겠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만.”

     아무리 회귀하면서 ‘없었던 일’이 되었다지만, 플리퍼 자작은 르우벤에게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플리퍼 자작만큼은 그가 용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설사 그것이 플리퍼 자작 본인에게는 황당할 뿐인, 어찌 보면 부당한 분노일지라도.

     그리고 애초에 플리퍼 자작은 본성부터가 썩어빠진 작자였다. 노러츠 왕국의 귀족답다고 해야 할지.

     그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소아성애자로 유명했다. 현시점에서도 그에게 강간당한 어린 소녀들이 세 자리 숫자를 넘어섰다.

     세상을 위해서라도 치워버려야 할 인물이었다. 전부터 르우벤에게서 자작에 대한 욕설 섞인 평가를 들어온 레인과 로엘 또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동안엔 그럴 여건이 안 되었지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그를 없애기에 가장 좋은 기회인지도 몰랐다.

    “말리지 마.”

    “잠깐만 있어 봐. 저 녀석을 죽이는 건 좋은데, 지금 네 몸 상태가 심각하잖아.”

     그것은 정체를 숨기는 것 이전의 문제였다. ‘초인’이란 것들은 절대 만만하게 볼 수가 없는 존재였다. 컨디션이 그리 좋지 못한 르우벤이 마냥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조금 미안한 말이다만, 저 녀석을 죽이고 싶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저 녀석에게 대신해서 복수해줄 것을 부탁하거나, 그게 아니면 네가 컨디션을 회복하고 차후에 다시 찾아와서 암살하거나.”

    ‘저 녀석’은 레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로엘은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르우벤이 스스로의 감정에 휘말려 자멸하는 상황은 만에 하나라도 있어선 안 되었다.

    “…….”

     르우벤은 눈가를 찡그리며 고뇌에 잠겼다. 그 또한 로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기에 딱히 반발하진 않았다.

     이내 르우벤은 결정을 내렸다. 레인에게 복수를 부탁하기로.

    ‘플리퍼 자작을 내 손으로 직접 족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러나 그보다 앞선 것이 용병 특유의 성질머리였다.

     직접 복수하지 못하는 아쉬움보다도 자작이 같은 공기 아래 숨 쉬는 기간이 길어진다는 사실이 더욱 불쾌했다. 직접 복수하는 데에 집착하는 유형의 인간은 분명 있겠지만, 적어도 르우벤은 아니었다.

     더불어, 플리퍼 자작을 오래 살려둘수록 그로 인해 고통받는 어린 여아들이 늘어날 터였다. 남 일이라고 그걸 그냥 간과할 수도 없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이쪽에서 직접 알아내지.”

     플리퍼 자작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덩치에 알맞은 거검(巨劍)을 든 사내가 일행에게 접근해 왔다. 자작과는 다르게 진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두 초인의 접근에 맞춰 유적을 둘러싼 병력이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오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을 슥 하고 둘러보며, 로엘이 새삼스러운 사실을 중얼거렸다.

    “확실히 ‘하르넴의 유적’이라는 이름값이 크긴 한가 보네.”

     무려 초인 두 사람에 기사가 다수 포함된 수백의 병력이라니. 아무리 괴인이 침입했다지만 일개 유적에 파견하기에는 과한 전력이었다.

     노러츠 왕국의 초인은 채 열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중 절반 이상이 내전을 비롯한 분쟁에 휘말려 있는 상태.

     플뢰비르 영지의 건만 해도 그것이 드러나는 좋은 사례였다. 영지에 그만한 위기가 닥쳤음에도, 왕국은 초인 한 명조차 파견하지 않았다.

     그것을 감안했을 때, 눈앞의 병력은 왕국 상층부가 최대한의 전력을 끌어모아 배치한 것이라 봐도 좋을 터였다.

     확실히 이 유적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긴 했다. 왕국의 판단은 옳았다고 할 수 있었다.

     왕국에서 실책을 내린 것이 있다면, 유적에 침입한 ‘괴인’들의 실력이 죄다 초인이거나 그에 육박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가능한 한 빠르게 뚫어내는 게 좋겠지. 지체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저쪽에 대검을 든 기사는 네가 적당히 견제해. 시간만 끌어.”

     로엘이 르우벤에게 고갯짓으로 상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으론 레인을 돌아보았다.

    “너는 최대한 빠르게 플리퍼 자작을 족치고.”

    “어.”

     참고로 네 사람의 목소리는 모두 르우벤이 나눠준 가면의 효과로 변조된 상태였다. 르우벤 본인이 사용하는 반지와는 달리 적에게 위압감을 선사하는 성능까진 없었지만.

     휘익!

     네 가면인이 일제히 왕국의 병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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