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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영웅과 악마의 유적(8) (150/249)
  •  150화. 영웅과 악마의 유적(8)

     레인과 로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반면 르우벤은 치밀어오르는 고통에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크으으윽!”

     르우벤이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검을 쥔 오른팔에 온통 혈관이 불거진 상태였다. 그것이 점점 범위를 확장해 목을 거쳐 얼굴까지 침범해 들어가고 있었다.

    “끄으으윽.”

     르우벤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스스로 혀를 깨물어 정신을 유지한 것이었다.

     그 직후 그의 몸에 새겨진 온갖 문신들이 기이한 빛을 뿜어냈다. 그러자 불거진 혈관들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르우벤은 거의 10분 가까이 마검과의 힘겨루기에 힘을 쏟았다.

     그는 검 손잡이에 위치한 ‘눈’이 다시 감기고 나서야 무너지듯 신형을 허물어뜨렸다. 그리곤 격렬하게 피가래 섞인 기침을 뱉어냈다.

    “커헉! 크으으.”

     밀리아가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녀가 건넨 포션을 르우벤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별다른 효과가 없는지 이내 다시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괜찮냐?”

    “안 괜찮아. 빌어먹을 마검 같으니.”

     르우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인벤토리 툴에 수납했다. 그리곤 대자로 누워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여기 유적의 보상은 너희들이 알아서 수거해줘. 난 도저히 못 움직이겠다.”

    “그래.”

     로엘이 털레털레 걸음을 옮겨 공동에 이어진 통로 중 한 곳으로 향했다.

     그 또한 르우벤만큼은 아니라도 몸 상태가 영 별로였다. 유물의 가치를 판별하거나 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죄다 아공간에 쓸어 담아두기만 할 생각이었다.

     공동의 구조는 제1 유적의 그것과 완벽히 일치했다. 제단이 놓인 중심부에 여섯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로엘은 그중 입구를 제외한 모든 통로를 순회했다.

    ‘잠깐.’

     그러던 와중, 로엘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제1 유적에선 여섯 통로 중 하나가 제2 유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과 똑같은 구조라면 여기에도?’

     설마, 하는 심정이 든 로엘이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이내 마지막 통로 앞에 섰다.

    ‘과한 생각이었나.’

     그가 약간 아쉬운, 동시에 안도한 감정이 담긴 한숨을 불어냈다. 마지막 통로의 입구에는 제1 유적에서 보았던 ‘간판’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긴. 더 있을 리가 없지.’

     제1 유적에선 하르넴의 유산을 습득했고, 제2 유적에는 게르반의 유산을 습득했다. 더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통로 안쪽으로 들어서니 그곳에는 각종 실험 물품과 서책이 놓여 있었다. 마치 연구실과 같은 분위기. 로엘은 그곳에 있는 물품 모두를 아공간으로 쓸어 담았다.

    ‘서책들을 보관한 책장도 유물이군.’

     서책이 바래지 않도록 보존 마법이 걸린 책장이었다. 로엘은 책장까지 통째로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책장이 아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로엘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책장 뒤쪽에 비밀 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문 위로 간판이 달려 있었다. 간판 상단에 쓰인 글귀는 이러했다.

    [제3 유적]

    “…….”

     로엘이 표정이 심각해졌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제3 유적으로 통하는 문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이렇게까지 놀란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어찌 됐든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해 뒀다. 그 부분에 대해선 그래도 충격이 덜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간판 하단에 쓰인 글귀였다.

    [시간의 현자의 유적]

    “이런 게 왜 여기에 있어.”

     영웅과 악마의 유산이 잠든 이 유적에, 대체 어째서 ‘시간의 현자’의 자취가 남아 있단 말인가.

     * * *

    “그래서, 어떻게 할까. 여기.”

    “뭘 물어보냐. 당연히 공략해야지.”

     제3 유적을 눈앞에 둔 각성자들이 각자 한마디씩 내뱉었다.

    “일단은 돌아가서 한 차례 컨디션을 조정한 뒤에 다시 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마검이 있으면 이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가능하다며.”

     르우벤이 획득한 ‘마검’은 이 유적의 마스터키와 같은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다. 마검의 소지자에겐 유적의 수호자들이 적의를 표출하지 않으며, 함정 또한 발동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참고로 성검 또한 같은 역할을 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성검은 제1 유적까지만 적용되는 마스터키라는 점일까. 물론 마검은 제1, 2 유적 모두에 적용되는 마스터키였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묻는 것도 뭐하지만, 그게 마스터키의 역할을 한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로엘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전생에 단장이 성검을 들고 되돌아가는 길에 수호자들이 알아서 길을 터주는 걸 봤지. 이후에 추가로 입구의 서책이 해석되어서 그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기도 했고.”

    “그렇지만 제3 유적은 공략하는 게 옳아.”

    “어째서?”

    “다음번엔 이렇게 쉽게 유적에 침입할 수 없을 테니까.”

    “그것도 그런가.”

     그러고 보면 바깥에는 노러츠 왕국군이 포진되어 있었다. 현재는 유적이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니 괜찮겠지만, 이후로 점점 충원인력이 늘어날 터였다.

    ‘아마 되돌아가는 길에 한 차례 충돌이 일어날 테니, 2번째엔 왕국 차원에서 경계를 대폭 늘려둘 거라고 봐야겠지.’

     지금이야 괜찮은 수준일 거라 낙관할 수 있었다. 바깥을 포위하고 있는 전력은 기껏해야 초인 하나둘 정도가 한계일 것이 뻔했으니까.

     침입자의 정확한 경지를 모르는 만큼 굳이 왕국에 하나뿐인 초월자를 배치하진 않았을 터였다. 애초에 그는 절대 국경지대를 벗어나지 않기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고.

     그러니 지금 바깥에 형성된 포위망 정도는 이 일행이라면 가뿐하게 뚫어내는 게 가능할 터였다. 재차 유적에 침입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져도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한다면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렇지만 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잖아.”

     레인이 르우벤을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르우벤은 연속된 유적 탐험과 마검의 획득으로 인해 육신도 멘탈도 제 상태가 아니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이런 일은 할 수 있을 때 한 번에 끝내둬야 해.”

     르우벤이 고개를 저었다. 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리하는 것 같은데.”

    “괜찮다니까.”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는 르우벤. 로엘이 그런 그를 빤히 응시하다 말했다.

    “우선 지금 당장 출발하는 건 무리야. 다들 너무 지쳤어.”

    “…….”

    “그러니 오늘은 쉬고 내일 공략을 시작하도록 하자. 그리고, 제3 유적 공략엔 르우벤과 밀리아를 제외하기로 하고.”

    “무슨 소리야!”

    “그 몸 상태로 유적 공략을 이어가는 건 무리야. 이 유적의 난이도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너도 알 텐데.”

    “그렇지만.”

    “그리고 밀리아 양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

    “뭐?”

    “심하게 다쳤어. 용인족 특유의 강인한 육체로 그걸 억지로 버티고 있을 뿐이지. 네가 걱정할까 염려해서 겉으로 그걸 드러내지 않고 있는 거야.”

    “……!”

     르우벤이 밀리아를 휙 하고 돌아보았다. 밀리아가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마주 응시했다.

    “정말이야?”

    “…….”

     밀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어떤 말보다도 확실한 답변이었다. 성실한 그녀가 르우벤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일은 웬만해선 없으니까.

     제2 유적 마지막 관문은 정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본 드래곤에 천에 달하는 언데드 군세는 아무리 규격 외 실력자인 네 사람이라도 벅찰 수밖에 없었다.

     일행 중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밀리아가 큰 부상을 입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외상이야 포션으로 말끔하게 치료했지만, 내상은 그렇지 못했다.

     의술에 조예가 없는 르우벤은 적당히 그녀가 포션으로 완치되었겠거니 생각했다. 르우벤이 걱정할 것을 염려한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숨겼고.

     그렇지만 레인과 로엘의 눈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두 소년은 밀리아의 생각을 존중해 그녀의 부상 소식을 숨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환자는 휴식을 취하게 하는 게 옳았다.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유적 공략은 컨디션이 무너진 사람이 참여해 봐야 짐짝밖에 되지 않아. 그리고 밀리아 양이 여기 남아서 맘 편히 몸을 추스르기 위해선 마스터키를 지닌 네가 함께 있어 줘야 해.”

     제1 유적의 보상 방은 확실한 안전지대였다. 그것을 르우벤이 전생에 직접 확인했다.

     아마 제2 유적 또한 그럴 것이라 예상되기는 했다. 당장 제1 유적의 그것과 같은 주변 경광만 놓고 봐도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막연하게 ‘제1 유적이 그랬으니 이곳도 그렇겠지’ 라고 여기는 것보단, 만의 하나를 경계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곳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유적이니까.

    “그래도 너희 둘 만으론 전력이 너무 부족해. 이곳 제2 유적도 그렇게 힘들게 돌파했는데.”

    “위험해지면 몸 빼낼 정도의 실력은 돼. 너도 알잖아.”

    “…….”

     맞는 말이었다. 레인과 로엘의 기동성이 상식을 벗어난 수준임을 르우벤은 잘 알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라도 이만한 유적에선 완전히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차라리 레인의 말대로 한 차례 태세를 정비한 다음에 다시 오는 게 어때?”

    “아니. 이번에 끝내야 해. 네가 말했던 대로 다시 찾아오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로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르우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우울해졌다.

     이 자리의 각성자들은 모두가 전생의 기억을 가진 탓에 지닌 바 성향의 특색이 짙었다.

     르우벤의 성향 중 한 가지는, ‘동료’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것.

     그는 동료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을 맞이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아무래도 전생이 전생이었다 보니.

     함께한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르우벤에게 있어 레인과 로엘은 이미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로 자리매김했다.

     안 그래도 자신이 끌어들인 일인데 자신으로 인해 두 사람이 짊어져야 할 위험부담 정도가 더욱 높아졌다. 굉장히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레인이 가늘게 뜬 눈으로 르우벤을 노려보며 툭 하고 내뱉었다.

    “쓸데없는 책임감 같은 건 가지지 마라. 넌 우리 보호자도 뭣도 아니야. 그리고 좀 믿어.”

    “…….”

     르우벤이 할 말을 잃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

     로엘이 손바닥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 * *

     풍족한 식사를 마친 일행이 본격적으로 컨디션을 돌보기 시작했다.

     레인과 로엘은 각자 운공으로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었다. 그런 뒤 르우벤과 밀리아의 부상을 돌봤다.

     로엘이 르우벤을, 레인이 밀리아를 맡았다. 두 환자의 몸에 세침이 빼곡히 뒤덮였다.

     치료 도중, 레인이 밀리아에게 말했다.

    “돌아가면 무공 하나 전수해 줄 테니 배워.”

    “예?”

    “너와 상성이 잘 맞을 것 같은 무공이 있어. 그 무공을 베이스로 아티펙트를 사용하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거다. 웬만한 초인은 찍어누를 수 있을 정도로.”

    “제게 그런 귀한 걸 전수해주셔도 되겠습니까?”

    “내가 사람 보는 눈은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적어도 네가 내 뒤통수를 칠 녀석이 아니란 걸 알아보지 못할 만큼 옹이구멍은 아니야.”

     지금까지 레인이 무공을 전수한 대상은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기껏해야 제자들, 그리고 각성자인 로엘과 르우벤에게 가르쳤을 뿐. 그 외에는 정보 유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로엘의 전투팀 구성원들이 신투의 무공을 익히는 것을 허락한 정도였다.

     말하자면, 밀리아는 레인에게서 진정한 의미의 ‘신용’을 첫 번째로 얻어낸 타인인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거친 종류의 무공이긴 하다만, 그 튼튼한 육신이라면 어렵잖게 익힐 수 있겠지.”

    “?”

     레인은 밀리아의 의아한 표정을 무시하고 세침을 하나하나 회수했다.

     한편, 르우벤의 치료를 맡은 로엘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의 상태가 훨씬 좋지 않았다.

    “너, 이 몸을 하고 유적 탐험을 계속하겠다고 고집부린 거야? 정신이 나간 녀석일세, 이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오른쪽 상반신이 거의 못 써먹을 수준이 됐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에라이 미친놈아.”

     제단에서 마검을 뽑아낸 후유증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완치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로엘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혹여나 우리 들어간 뒤에 몰래 따라 들어올 생각 따윈 절대 하지 마라. 무조건 쉬어. 그랬다간 머리칼에 눈썹까지 남김없이 밀어버릴 테니.”

    “…….”

    “알아들었으면 네 몸이나 잘 추슬러 인마.”

     로엘이 이런 식으로 거친 언사를 내뱉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르우벤이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태도는 레인에게나 취하던 것 아니었던가. 그 태도가 자신에게도 적용되자 내심 당혹한 기분이 드는 르우벤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리 나쁘진 않은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왜 이런 곳에 시간의 현자가 남긴 유적이 있는 거지.”

    “그건 나도 도통 모르겠다.”

    “너무 이질감이 강해서 더 확인해보고 싶어진단 말이지.”

     혹시라도 유적 공략을 통해 시간 마법을 복구해낼 수 있는 단초를 얻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욕심이 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3 유적에서 습득하게 되는 유물의 지분은 나와 레인 쪽에 높게 적용될 거다?”

     로엘이 세침을 회수하며 지분 주장을 했다. 웃는 낯이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었던 르우벤의 마음이 약간 차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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