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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유적(5) (42/249)
  •  42화. 유적(5)

     사마귀 하나를 처리한 레인이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끔뻑이고 있는 적룡대원의 뒤쪽으로 순식간에 신형을 이동했다. 이어 그녀의 등에 걸린 검을 뽑아가며 말했다.

    “검 좀 빌리지.”

    “!”

     눈 깜박할 새에 시야에서 사라진 소년. 그 소년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뒤쪽에서 들려오자 특기자 적룡대원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레인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움직였다. 힘겹게 거대 개미와 전투 중인 용병을 지원하러 나섰다.

     그가 거대 개미의 등 위쪽에 턱 하고 내려섰다. 한참 개미를 맞상대하고 있던 용병의 눈에는 그가 갑자기 순간이동이라도 해서 나타난 것으로 보였다.

     대충 봐도 개미는 단단한 외피에 둘러싸여 있었다. 용병이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이 외피를 뚫지 못한 탓이리라.

     다리는 그리 단단하지만도 않은 듯 두어 개 잘려 나간 상태였지만 그뿐이었다. 이렇다 할 치명상은 입지 않은 상태.

     레인은 검을 휘두르려다가 멈칫했다.

     내력을 좀 응집시키면 외피를 뚫어내는 것 정도는 별로 문제 될 것도 없긴 했다. 그렇지만 그건 비효율적이었다.

    “이렇게 단단한 외피를 지닌 녀석들일수록 내부는 연약하기 마련이지.”

     그가 피식 웃으며 오른쪽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곤 머리를 향해 진각을 밟았다.

     콰앙! 으지지직!

     개미의 머리가 바닥에 균열을 일으키며 파묻혔다. 그 힘의 파장이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버둥거리던 개미의 다리가 축, 하고 늘어졌다.

     가볍게 개미를 눌러 죽인 레인의 시선이 놀란 표정의 용병에게 잠깐 향했다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한 떼의 개미들이 이쪽으로 달려드는 중이었다.

     숫자가 많긴 하지만, 저렇게 한데 뭉쳐있는 상대라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일행엔 마법사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불덩어리가 날아와 개미 떼의 정중앙에 충돌, 폭발했다.

     콰앙!

     폭음이 울렸다. 개미 떼가 폭발에 휘말려 통째로 노릇노릇하게 익은 고깃덩어리로 화했다.

     그 방향은 당분간 안전하겠다고 판단한 레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흠칫, 하고 다시 고개를 되돌렸다.

     그 근방에 있다가 레인과 같은 생각을 하며 신형을 돌린 한 용병의 뒤쪽, 그곳의 땅이 들썩이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솟아올랐다.

     캬아아아아!

     포효와 함께 거대한 지네가 솟아 올라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용병의 대처가 늦었다. 지네는, 아니 지네를 본떠 만들어진 키메라는 그런 용병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듯 흉물스러운 아가리를 벌리고 덮쳐들었다.

    “숙여!”

     레인이 든 검에 흰 빛무리가 맺혔다. 강력한 힘을 응집시켜 그것을 지네가 있는 방향으로 사출했다.

     백광이 폭사되어 경로에 놓인 식물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며 날아갔다. 그리곤 레인의 경호성에 상체를 숙인 용병의 등 위쪽을 지나쳐 막 용병을 집어삼키려던 지네를 난도질했다.

     캬아아아악!

     단말마를 내지르는 거대 지네. 지네는 그와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득한 액체를 흩뿌리며 세 토막이 나 무너져 내렸다.

     좌중의 인물들은 단번에 그 빛무리의 정체를 알아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초일류 검사의 상징과도 같은 그것. 검강.

     외견으로 추정되는 나이에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강대한 힘. 그 힘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소년이 눈앞에 있었다. 그야말로 상식을 벗어난 광경.

    “하핫!”

     적룡대 대주는 재차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미치겠군. 저 나이에 검호? 말도 안 되는 괴물이잖아.”

     * * *

     두 소년의 가세로 진형은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

     전위에 강력한 초일류 검사가 추가로 배치된 것도 모자라, 중위에 원거리 지원 특화 아티펙트 소유자가 가세했다. 일행이 갖춘 진의 안정성이 단숨에 몇 단계나 뛰어올랐다.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하는 이를 꼽으라면 단연 로엘이었다.

     소음기를 장만하지 못했기에 사실 저격용이라 하기엔 조금 애매한 소총.

     다른 이들에겐 그저 미지의 아티펙트로만 여겨지는 그것이 굉음을 터뜨릴 때마다 비행형 키메라들이 격추되었다. 어쩌다 전황이 밀리는 장소는 순식간에 전황이 복구되었다.

    타앙-!

     일행 쪽으로 접근해오던 거대 나방의 몸통이 정체불명의 액체를 흩뿌리며 터져나갔다.

    “몇 번을 봐도 적응이 되질 않는군.”

     용병들이 추락하는 나방과 로엘을 번갈아 힐끔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로엘이 가진 병기가 고대의 아티펙트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그 위력과 효용성으로 미루어보아 확실히 이 시대의 것은 아니라고.

     한편 레인은 레인대로 바빴다.

     레인은 전면에 나타난 개미의 위쪽 허공으로 도약, 발끝에 내력을 집중시킨 채 신형을 휘돌며 떨어져 내렸다.

     천근추(千斤墜). 내력으로 인해 중력의 영향이 몇 배나 높아져 위력이 극대화된 진각이 개미의 머리를 찍어눌렀다.

     콰아아앙!

     개미의 머리가 박살 나 흩어졌다. 진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대지에 작렬했다. 그 아래, 땅속에서 기회를 엿보던 거대 지렁이가 그대로 짓이겨졌다.

     단숨에 두 키메라를 처리한 레인이 로엘 쪽을 힐끗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만든 것보다는 확실히 위력이 높아졌군. 거기다 속도도.”

     그가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이전 것에 비하면 단점도 있지만, 역시 성능은 신무기가 윗줄인가.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무구의 종류도 세 가지나 갖췄으니 단점을 단점이라 하기도 좀 그렇고.”

     레인이 중얼거리다 말고 갑자기 피식, 하고 웃었다. 옛날 생각이 난 탓이었다.

     그러니까 로엘에게 가르칠 무공을 선정하던 때. 그때 그가 분명-

    [엉? 나더러 살상용 무공을 익히라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상대가 날붙이 들고 덤벼드는데 이쪽도 마주 달려들라고? 도망쳐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렇게 말했었지.

    “경신법으로 도망 다니면서 저 병기로 원거리 공격만을 퍼붓는다면 확실히 상대하기 까다롭겠어.”

     분명 처음부터 저 병기의 제작을 염두에 두고 자신에게 경신법만을 요구했던 것이리라.

     * * *

     로엘은 탄창을 갈아 끼웠다. 그동안 꾸준히 금나수를 연습해온 보람이 있어 꽤 신속하게 탄창이 교체되었다.

     일단 당장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비행형 키메라가 없나 확인하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땀을 줄줄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플로라가 있었다.

     다른 적룡대원들이 그렇듯이, 그녀 또한 굉장한 미인이었다. 레인과 로엘에 비해 많아 봐야 서너 살 더 많아 보이는데 이미 몸매에 완연한 굴곡이 져 나름 성숙한 매력을 뽐냈다.

     그녀는 가진 힘의 특성상 다른 대원들처럼 굳이 가죽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단순한 여행복을 입었는데, 지금 그것이 땀에 푹 젖어 몸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윤기 있는 하늘색 머리칼이 땀에 젖은 채 도톰한 입술 근처에 달라붙은 모습이 뇌쇄적이었다. 주변 용병들이 바쁜 와중에도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을 힐끔거렸다.

    “힘드신 것 같은데, 괜찮나요?”

    “괜찮아.”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플로라는 확실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유적에 진입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쉴 새 전황을 지원하느라 너무 많은 힘을 소진했기 때문.

     방금 전 로엘이 격추시킨 나방도 원래는 플로라 선에서 처리되어야 했었다. 그런데 심하게 지친 플로라가 상대를 놓친 탓에 로엘이 대신 처치해준 것이었다.

    “아무래도 역할을 바꾸는 게 좋겠네요.”

    “?”

    “앞으로 비행형 키메라들은 전부 제가 처리할게요. 플로라 양은 제가 간혹 놓친 녀석들이 있으면 그 녀석들만 처리해 주세요.”

    “아, 아니, 그럴 순······.”

    “괜찮아요. 그게 합리적이기도 하고. 전 아티펙트를 사용하는 것이다 보니 플로라 양처럼 지치지 않으니까요.”

    “…….”

    “대신 이 아티펙트는 플로라 양의 힘에 비해 범용성이 좀 떨어지거든요.”

    “?”

    “비행형 키메라가 이미 용병을 낚아채서 하늘로 날아오른 경우엔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요. 잘못하면 붙잡힌 용병까지 다치게 할 수 있으니까.”

    “아……!”

    “그러니까, 그럴 때는 플로라 양에게 부탁할게요. 그러니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진 가능한 한 체력을 보충해 두세요. 일단 플로라 양이 빠진 자리는 제가 최대한 커버해 보일 테니.”

     그렇게 말하며 로엘이 빙긋 웃자 플로라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안 그래도 힘들던 차였다. 이렇게 자신을 신경 써주고 배려해주는 것도 고마운데, 그 상대가 잘생기고 예의 바른 데다 능력까지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친 와중에 이런 식으로 배려받자 갑자기 확 하고 속에서 무언가 치솟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렇지.”

     로엘이 뭔가 생각난 듯 소총에 매인 가죽끈을 어깨에 걸쳐 멨다. 그리곤 플로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깐 손 좀 줘 보실래요?”

    “소, 손?”

    “네.”

     로엘이 웃는 얼굴로 손짓하자 플로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손을 덥석 붙잡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아.”

     로엘은 맞잡은 손을 통해 자신의 내력을 흘려보냈다.

     그의 내력은 생사공으로 축적한 것. 그것을 다른 이의 체내에 흘려보내 일정한 경로를 통해 순환시킨 후 회수하면 상대의 피로를 어느 정도 덜어주는 것이 가능했다.

    “어?”

     손을 통해 밀려 들어오는 이질적인 기운, 그리고 동시에 찾아오는 청량감에 플로라의 눈이 커졌다.

     약간이지만 피로감이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1분쯤 손을 맞잡고 있었다.

    “어떤가요?”

     손을 놓은 뒤 로엘이 묻자 플로라는 활짝 웃는 얼굴로 상쾌한 느낌이었다고, 정말로 고맙다고 답했다.

    ‘뭔가 아쉽네.’

     그녀가 방금 전까지 로엘과 맞잡고 있던 손을 힐끗 곁눈질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괜히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기분은 잠시 후에 또 다른 비행형 키메라가 날아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진형이 안정되었다곤 하지만, 일시적으로 한숨 돌린 것에 불과했다. 여전히 컨트롤 룸을 발견할 실마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

     방대한 크기의 유적 내부를 이렇게 정처 없이 헤매기만 하다 보면 당연한 수순으로 일행의 체력이 바닥나게 된다. 그 전에 컨트롤 룸을 찾아야 하는데,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공복감이 체력 소모를 한층 더 가속화시켰다. 식량은 충분히 챙겨왔지만, 이렇게 연속해서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 제대로 식사를 할 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정예들로만 구성된 탐사대인 만큼 아직까진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대로 정처 없이 떠돌며 시간만 축냈다간 일행이 전멸하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용병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조금씩 불안감이 전염되어 점차 이곳저곳에서 그 문제를 가지고 쑥덕대는 이들이 늘어났다.

     항상 냉정하게 상황을 관조해야 하는 일행의 리더, 적룡대주마저도 그런 분위기 속에선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아.”

     그러던 중, 레인이 뭔가를 알아챈 듯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한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플레이나가 관심을 가졌다.

     어린 소년이지만 엄연한 초일류 검사. 그 또한 초감각을 지녔으니 무언가 중요한 것을 알아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뭔가 찾았나?”

    “그런 것 같은데.”

     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지로 전방을 가리켰다.

    “저기.”

    “?”

     레인이 가리킨 방향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밀림이 펼쳐져 있을 뿐이라 플레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있다는 거지? 내가 보기엔 별것 없는데.”

    “눈으로 말고, 기감을 돋워. 인위적인 흔적을 느낄 수 있을 테니.”

    “!”

     곧바로 감각을 집중해보니 과연 넝쿨과 잎사귀들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인위적인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가.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은 바위의 표면이 저렇게 매끄러울 수는 없겠지.”

    “나도 방금 전에 알아챈 건데, 저런 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있는 것 같다.”

    “그 말은, 저 바위들이 배치된 경로를 따라가면 컨트롤 룸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겠군.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무작정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고.”

    “그렇지.”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발견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유적의 주인이 없어지면서 관리가 되지 않은 식물들이 멋대로 자라 바위들을 죄다 가려버린 모양이군. 이러니 그렇게 돌아다녔는데도 소득이 없었지.”

     플레이나가 한 차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한숨 돌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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