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99화 (199/227)
  • < 제 68장 #2 >

    &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이 탐욕의 미궁 9층에 자리한 공간의 문 관제소에 모여들었다. 카디스 요새에 있는 오필리아와 티그리우스까지 원거리 통신으로나마 연결이 되자 용호는 바로 본제를 꺼냈다.

    용호가 시트리의 던전의 심장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 시트리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

    둘, 시트리의 현재 위치는 북부 어딘가이다.

    “던전의 심장을 통해서도 명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대략적인 위치만이야. 하지만 그 지역 전체를 뒤져서라도 시트리를 찾아야만 한다.”

    용호의 어조는 단호했다. 루시아가 허공에 표시한 빛의 지도를 유심히 살피던 오필리아의 허상이 의견을 제시했다.

    “던전 상회는 여섯 왕들에게 그 영향력을 인정받아 마계 곳곳에 자치령을 가지고 있어요. 말씀하신 곳 부근에는 다름 아닌 던전 상회의 본부가 위치해 있죠. 다섯 이사들의 회의가 진행될만한 장소입니다.”

    오필리아가 손을 들어 지도를 가리켰다. 루시아가 따로 빛을 내 구역을 표시해주니 과연 던전 상회의 자치령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던전 상회 본부는 격노의 왕과 식탐의 왕, 색욕의 왕이라는 세 왕의 국경이 서로 겹치는 곳에 도도히 자리했다.

    [주인님, 현재 가동 가능한 공간의 문들의 위치 정보입니다.]

    마계 전도 위로 밝은 빛의 점들이 펼쳐졌다. 공백지 너머로 갈수록 그 숫자가 줄어들었지만 다행히 던전 상회 본부 부근에도 빛이 하나 있었다.

    “가장 가까운 건 색욕의 왕의 땅에 있는 건가.”

    색욕의 영토 깊은 곳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색욕의 왕의 통치 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용호에게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설사 색욕의 왕의 던전 바로 옆이 게이트의 위치라 해도 작전을 강행할 기세였다.

    구시온이 나직이 말했다.

    “나리, 너무 서두르고 있는 것 같은데? 다른 누구도 아닌 시트리 그 여자다. 쉽게 죽을 리가 없어.”

    용호는 반사적으로 구시온을 노려보았다. 구시온이 평소 시트리에게 애증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빛에 절로 적의가 어렸다.

    하지만 구시온은 그런 용호를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마주했다. 이내 용호가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흥분했음을 인정하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티그리우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시트리는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인 동시에 나태의 왕입니다. 그런 그녀가 죽기 직전 상황에 처한 채 북부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다는 건 보통 특수한 상황이 아닙니다.”

    “최소 던전 상회 이사급. 어쩌면 왕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를 사건이라 이거군.”

    구시온이 다시 말을 보탰다. 아몬의 말대로 설사 시트리가 씻을 수 없는 부상을 입었다하더라도 그녀는 나태의 왕이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의 공격 따위로는 결코 저런 상황에 처할 리가 없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용호가 구시온의 말을 끊었다. 시트리를 죽기 직전까지 내몬 상대라면 보통내기들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정말로 중요하지 않았다.

    “시트리를 구하러 간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루시아, 다시 한 번 공간의 문 위치를 표시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용호의 영향을 받았는지 루시아는 다소 딱딱한 어조로 답한 뒤 서둘러 용호의 명을 따랐다. 용호는 계속해서 명령했다.

    “보다시피 색욕의 왕의 영토가 가장 가깝다. 저기서부터 탐색을 시작하겠어.”

    다급했다. 초조했다. 분명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머리가 완전히 굳은 것은 아니었다. 시트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에 용호는 이성적인 잣대를 들이대었다.

    “식탐의 왕과 색욕의 왕의 영토를 가로질러 가면서까지 티아메트를 직접 끌고 가는 건 무리다. 왕들이 펼쳐놓았을 대공 결계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역시 비행시간이다. 따라서 비행을 통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는 대신 공간의 문을 활용한다. 소수의 병력으로 색욕의 왕의 영토에 침투한 뒤 수색을 개시한다."

    잠시 말을 멈춘 용호는 예속 사역마들 뒤에서 긴장한 얼굴로 서있는 살라미와 부케팔로스를 보았다. 평소 회의와 달리 둘을 대동시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파이어 엘리멘탈 드래곤으로 진화한 살라미는 정령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진 덕에 자신의 크기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었다. 최고 크기로 키운다면 그 등 위에 네 명 이상이 탑승할 수도 있었다.

    “기동성을 중시해야 하기 때문에 전원이 갈 수는 없어. 더욱이 공간의 문의 사용횟수를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부터 내가 호명하는 인원들이 나와 함께 간다.”

    오필리아와 티그리우스가 직접 탐욕의 미궁에 오는 대신 원거리 통신으로 회의에 참석한 것은 공간의 문의 일일 사용 횟수 제한 때문이었다. 공간의 문 관제소를 통한 이동은 하루에 두 번이 한계였다.

    오필리아와 티그리우스는 올 수 없었다. 용호는 나머지 인원들을 돌아보았다.

    “구시온, 스카자하, 카이완, 카타리나, 스컬.”

    카타리나는 자체적으로 비행이 가능했고 스컬에게는 부케팔로스가 있었다. 회복 능력이 있는 스카자하는 반드시 데려가야만 했다.

    “엘리고스는 탐욕의 미궁을 지킨다. 오필리아와 티그리우스는 평소처럼 카디스 요새의 전력 강화를 부탁한다.”

    시트리가 공격당했다는 예상 밖의 사태가 발생한 지금 탐욕의 미궁을 마냥 비워둘 수는 없었다. 사자좌의 리처드가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보물고만을 지킬 뿐이었다.

    엘리고스가 긴장한 얼굴로 용호의 명을 받았다. 카타리나는 조급해하는 용호가 걱정인지 귀를 살짝 늘어트렸다.

    잠자코 듣고 있던 구시온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나리, 한 가지만. 출발하기 전에 예속 사역마 등록을 하자.”

    색욕의 왕의 영토는 말 그대로 미지의 땅이었다. 더욱이 구시온에게 있어 색욕의 왕은 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적이었다. 적진에 들어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전력을 강화해야 했다.

    용호도 구시온의 말을 옳게 여겼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간의 문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루시아에게 명령했다.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춘 구시온을 마주했다.

    “미안하다, 구시온.”

    조금 더 제대로 된 자리에서 격식을 갖춰서 하고 싶었던 의식이었다. 구시온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간 용호의 손을 슥 돌아보더니 능글맞게 웃었다.

    “의식이라면 투기장을 정복했을 때 한 것으로 충분해. 다른 예속 사역마들도 거창한 의식을 한 건 아니잖아?”

    용호도 작게나마 미소를 보였다. 루시아의 도움을 받아 구시온을 용호의 예속 사역마로 등록하였다.

    벌써 여덟 번째 예속 사역마였다.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예속 사역마의 등록 효과는 체감되기 마련이었지만 등록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구시온이었다.

    용호는 막대한 힘이 자신에게 합류하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뿔을 개방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예속 사역마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뿔을 개방한 상태로 새로운 힘을 절감하였다.

    특히 구시온과 카타리나의 변화가 심상치 않았다. 평소에도 돌출되어 있는 구시온의 황소 같은 두 뿔에서부터 마력이 소용돌이 쳤다. 마몬이 죽으면서 잃었던 마력 가운데 일부를 되찾았다.

    카타리나의 변화는 더욱 극적이었다. 극한 쾌락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카타리나는 자신의 양 어깨를 끌어안은 채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두 눈에서 새하얀 안광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하얀 머리칼 사이로 새로운 뿔이 돋아났다. 카이완과 마찬가지로 벽을 넘어 여섯 번째 뿔에 도달한 것이었다.

    다른 예속 사역마들 역시 저마다 힘의 증가를 느꼈다. 용호는 숨을 길게 토해 마력을 가라앉혔다. 자신뿐만 아니라 예속 사역마들의 마력 역시 진정시킨 뒤 구시온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카이완이 얼른 카타리나를 부축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카타리나의 얼굴에는 희열에 찬 미소가 어려 있었다.

    평소라면 카이완과 더불어 카타리나를 보살폈을 용호였지만 이제는 정말 마음이 급했다. 스카자하에게 카타리나의 회복을 부탁한 뒤 루시아에게 명해 공간의 문을 가동시켰다.

    마몬의 마법사였던 마그나돈은 죽었다. 하지만 그의 유산인 공간의 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역할을 다 하였다.

    “출발하자.”

    용호가 앞장서서 공간의 문 안으로 들어섰다. 카이완은 다소 걱정스런 눈으로 용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카타리나와 함께 그 뒤를 따랐다.

    구시온과 스카자하, 살라미와 부케팔로스까지 모두 들어가고 나자 스컬은 걱정 말라는 듯 엘리고스를 보며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스컬컬 기분 좋게 웃어준 뒤 마지막으로 공간의 문 안에 들어섰다.

    홀로 남은 엘리고스는 공간의 문을 닫았다. 먼 곳에서나마 용호의 무운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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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욕의 왕의 땅에는 협곡과 산이 많았다. 깎아지는 것 같은 벼랑과 돌로 된 산은 오래 전부터 색욕의 왕의 영토를 지키는 천연의 요새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공간의 문은 무너진 동굴 안쪽에 있었다. 입구가 커다란 돌들로 꽉 막혀 있는 덕분에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지만, 덕분에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아몬이 홍련의 불길로부터 오직 빛만을 발생시켜 어둠을 몰아냈다. 구시온이 가벼운 주먹질로 바위들을 가루로 만들었고, 스카자하는 지하에서 끌어올린 수분으로 무너진 자리들을 굳혔다. 동굴이 다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

    세 사역마들의 그림 같은 협동 덕분에 도착한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용호는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협곡 사이로 삭풍이 매섭게 불었다. 눈앞에 자리한 거대한 벼랑을 마주한 카이완은 걱정스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삭풍에 무리를 이루고 사는 야생 몬스터인 칼날 오우거들의 향취가 묻어 있었다.

    평소라면 모를까, 시트리가 정말로 죽어가는 상황이라면 저 정도 몬스터들로도 위험했다.

    '하지만....'

    선뜻 수색에 나서기에는 협곡이 너무 넓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색을 해야 할 지 감도 오지 않았다.

    용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몬이 용호에게 불길로 속삭였다.

    [주인이여, 시트리를 갈망하라.]

    [소유욕을 극대화하여 탐욕의 힘을 이끌어라.]

    믿을 것은 오직 탐욕의 인도뿐이었다. 허나 예속 사역마 등록을 통해 온전히 용호 자신의 것이 된 카타리나나 카이완과는 상황이 달랐다. 용호는 시트리에게 소유욕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용호는 눈을 감았다. 시트리를 생각했다.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 그녀의 품에 안겼을 때 받았던 느낌을 떠올렸다.

    분명 소유와는 달랐다. 하지만 탐욕은 용호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발산된 탐욕의 기운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휘감았다. 그리고 이내 하나가 되어 용호에게 길을 인도하였다.

    그리 멀지 않았다. 의외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살라미!”

    용호가 명한 그 순간 살라미가 날개를 펼쳤다. 크기를 최대한 키운 뒤 납작 엎드려 등을 내주었다. 용호와 카이완, 구시온과 스카자하가 그 등위에 올라탔고, 살라미는 주저 없이 날아올랐다.

    스컬을 태운 부케팔로스가 그 뒤를 따랐다. 카타리나는 그림자의 날개를 펼쳐 비상했다.

    대공망에 걸리지 않을 저공비행이었다. 살라미는 있는 힘을 다해 날았고, 부케팔로스는 지면뿐만 아니라 협곡의 벽 위를 거침없이 달렸다. 카타리나는 살라미보다 앞서 날며 지상을 주시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카타리나가 마치 추락하듯 지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용호는 가슴 한 곳에서 맥동하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격노의 왕이나 식탐의 왕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지상에는 몸에 칼날 같은 돌기들이 비쭉비쭉 돋아있는 오우거들이 많았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카타리나에게 적의를 보였지만 아주 잠깐 뿐이었다. 스컬과 부케팔로스는 그 등장만으로도 칼날 오우거들을 두려움에 빠트렸다. 보랏빛 안광이 번뜩이는 스컬의 시선을 마주한 칼날 오우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등을 보이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살라미가 지상에 안착했다. 서둘러 뛰어내린 용호는 탐욕의 연기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바위더미 깊은 곳에 무언가가 있었다. 어떤 마법의 힘 때문인지 딱히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용호는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의 두근거림이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나태의 힘.’

    용호는 탐욕의 연기를 거둔 뒤 발걸음을 내딛었다. 탐욕의 녹염으로 나태의 방벽을 불태워버렸다.

    순간 아지랑이가 이는 것처럼 공간이 뒤틀렸다. 바위더미 사이로 두 사람의 인영이 드러났다.

    “시트리!”

    소리친 것은 스카자하였다. 그녀는 급히 바위더미를 향해 달려갔다. 피투성이가 된 두 여인을 내려다보며 숨을 삼켰다.

    금발에 검은 날개를 가진 여인을 안고 있는 것은 시트리였다. 천 년 전 그러했던 것처럼, 피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그녀였다.

    스카자하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녀에게 있어 시트리는 원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천 년 전의 수라장을 함께 헤쳐 나온 둘 도 없는 동료였다. 그저 얼굴을 마주한 것뿐인데도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스카자하는 눈물을 닦아낼 새도 없이 두 손에 생명력을 듬뿍 담았다. 시트리와 사마엘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아직 살아 있어. 둘 다 무척 쇠약해졌지만 괜찮아. 내가 왔으니까. 절대로 죽게 하지 않아.”

    스카자하가 말했다. 용호는 당장이라도 시트리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안도의 숨을 토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일이 훨씬 잘 풀린 셈이었다.

    ‘사마엘.’

    시트리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인 ‘최속의 날개’ 사마엘이 분명했다. 시트리 혼자만이 아니라 그녀까지도 저런 상태인 것을 보면 분명 무언가 큰 사달이 났음에 분명했다.

    ‘던전 상회 내부의 항전인가?’

    던전 상회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시험 삼아 동부의 휘하 가주 중 하나에게 물건을 구매하도록 시켜봤으니 확실했다.

    정말 내부 항쟁이든, 아니면 외부의 적이든 무척이나 은밀하게 이루어진 공격임에 분명했다.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던전 상회를 운영하지는 못할 터이니 말이다.

    용호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스카자하의 곁에 다가간 뒤 가만히 시트리의 손을 잡아보았다.

    나태의 왕. 다른 왕들 모두가 마몬을 배신했을 때 최후의 최후까지도 그 곁을 지킨 그녀.

    “시트리.”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창백하기만 하던 시트리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스카자하가 용호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용호는 시트리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고, 구시온은 사마엘을 안아들었다.

    “응급처치를 한 것뿐이야. 생명의 정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해.”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트리를 안은 두 팔에 힘을 준 뒤 살라미에게 향했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

    질시의 왕의 던전은 어제와 같았다.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 외에는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

    질시의 왕의 옥좌.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직 단 한 명의 왕만을 모셔온 그 자리에 오만의 왕이 앉았다.

    오만의 왕은 깊은 포만감을 느꼈다. 가슴 안에서 맥동하는 질시의 힘이 그를 더 없이 기쁘게 하였다.

    질시의 왕 레비아탄은 죽었다. 하지만 그의 군세는 여전히 오만의 군세와 싸우고 있었다. 주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결사항전하는- 그런 군인정신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질시의 왕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그 같은 사실을 모르는 것은 오만의 군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보는 힘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질시의 왕이 죽었다는 사실도, 던전 상회가 오만의 왕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지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시간을 최대한 늦출 필요가 있었다. 무지는 언제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색욕의 왕은 오만의 왕 자신의 것이었다. 지금 허리춤에 자리한 것이 색욕의 신기가 아닌 질시의 신기인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오만의 왕은 눈을 감고 수를 헤아렸다. 계획에서 다소 어그러진 것들을 점검했다.

    먼저 나태의 왕.

    이건 차라리 행운이었다. 어딘가에 숨어 나타나지 않는 나태의 왕보다는 ‘시트리’라는 구체화된 적이 나았다. 그녀가 나태의 왕이라는 사실은 의외였지만 비프론즈의 보고대로라면 지금의 시트리는 반편이였다. 더욱이 지금쯤 죽기 직전인 상태로 빌빌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격노의 왕은 애송이 잡종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싸움도 할 줄 모르고, 전장에서는 부하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겠다며 천방지축 날뛰는 원숭이였다.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하는 계집애 따위 적수가 되지 못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사실이었지만 폭력의 왕은 강대했다. 더욱이 폭력의 왕이야말로 식탐의 왕을 죽인 범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이기는 했지만, 그가 격노의 신기뿐만 아니라 식탐의 죄악까지 손에 넣었다면 지금까지 이상의 대적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각기 하나의 죄악일 뿐이었다.

    폭력의 왕과 격노의 왕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어설픈 공조 이상의 것을 해낼 수 없었다. 드래곤들이 괜히 일자왕이라는 오만불손한 이명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나태의 왕은 나머지 두 왕과 이렇다 할 연결고리가 없었다.

    오만의 왕 자신에게 적대할 세 왕. 그들은 각기 따로 존재했다. ‘구심점’이 없는 힘들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답은 간단했다. 오만의 왕은 머릿속에 떠올린 마계 전도 위에 하나의 선을 그었다. 던전의 영혼에게 명해 식탐의 왕 진영에 한 가지 명을 전달하였다.

    전통과도 같은 각개격파였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별조차 없는 가장 어두운 밤에 식탐의 군세는 움직임을 개시했다.

    진군하는 방향은 서쪽.

    격노의 왕의 영토를 향해서였다.

    제 68장 - 수용 끝, 제 69장 - 격노로 이어집니다.

    < 제 68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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