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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98화 (198/227)
  • < 제 68장 - 수용 >

    제 68장 - 수용

    삭풍이 협곡 사이를 오가며 날카로운 상처를 남겼다. 바람을 탄 옅은 피 냄새가 넓게 퍼졌다.

    사마엘은 죽어가고 있었다. 왼팔과 한쪽 날개를 잃은 것도 컸지만, 그보다는 사마엘의 육신 내외를 옥죄었던 아브라삭스의 마력이 문제였다.

    뱀의 피를 가진 아브라삭스의 마력은 맹독 그 자체였다. 아브라삭스의 마력을 모두 떨쳐내는 와중에도 끝끝내 남은 한줌의 독기가 사마엘의 영혼과 마력을 좀먹었다.

    바위 틈 사이에 몸을 숨긴 시트리는 사마엘을 꼭 끌어안았다. 약간의 온기나마 나눠주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트리 자신도 아브라삭스의 맹독에 중독된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체력이 쇠한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최속의 날개’ 사마엘이 마왕으로서 갖춘 권능은 공간 도약이었다. 죄악과 신기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 그 외에는 왕과 동급이라 여겨지는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답게 공백지 동부의 가주였던 스트라바디의 권능과는 그 성능 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시트리는 현재 자신과 사마엘의 위치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던전 상회 본부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었다는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수백 km 정도 거리를 뛰어넘었을지도 몰랐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마몬이 죽던 날 아로 새겨진 영혼의 상처가 다시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나태의 힘을 무리하게 사용한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하지만 시트리는 다시 한 번 나태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삭풍을 타고 번진 피 냄새를 맡았는지 몬스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어떻게든 싸움을 피해야 했다. 지금 상태로는 하찮은 오우거 무리조차도 생명을 위협하는 대적이 될 수 있었다.

    나태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은신의 힘이 시트리와 사마엘을 감쌌다. 두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유리시켰다.

    ‘사마엘.’

    사마엘의 상태가 심각한 것에는 아브라삭스의 맹독 이외에도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시트리를 심란케 했다.

    사마엘의 마력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급격히 약해졌다. 더욱이 단순한 약화가 아니었다. 마력의 최대치 자체가 줄어들었다.

    예속 사역마들의 죽음이 초래한 변화가 분명했다.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었다.

    배신한 세 이사들이 던전 상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사마엘의 본영인 던전 상회 특별 경매장을 손에 넣었다. 사마엘의 세력 전체가 세 이사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용호에게 알려야 했다. 폭력의 왕과 격노의 왕에게도 경고해주어야만 했다. 이대로는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몬…….’

    시트리는 사마엘을 보듬으며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의식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깨진 그릇에서 물이 새듯, 영혼의 상처로부터 끊임없이 힘이 새어나갔다.

    삭풍이 불었다. 마지막으로 힘을 발한 시트리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아침잠이 많은 카타리나에게는 언제나 힘겨운 오전 시간이었지만 유리아에게는 아니었다.

    몸 안에 넘쳐흐르는 힘을 주체 못하겠다는 듯 말 그대로 방방 뛰며 활기차게 말했다.

    “이건 낑낑이 침대고요, 요 옆은 바둑이 침대에요. 그리고 저긴 흰둥이 자리고요!”

    과거 ‘사육실’이라고도 불렸던 유리아의 방은 무척이나 넓었다. 유리아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방을 함께 쓰는 친구들의 침대를 가리켰다. 새끼 던전 미어 캣인 낑낑이의 것은 인형 놀이에 나오면 딱 좋을 것 같은 크기의 미니어처 침대였고, 바둑이의 것은 오우거가 누워도 될 정도로 커다란 초대형 침대였다.

    “낑낑!”

    “왈왈!”

    유리아와 마찬가지로 펄펄 뛰며 낑낑이와 바둑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둘 모두 활짝 웃는 것이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지목된 흰둥이- 한 때 엠브리오를 따랐던 늑대 무리의 수장 격인 회색 늑대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바둑이와 달리 네 발 짐승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흰둥이였기에 침대 대신 푹신한 담요와 몸을 기대기 좋은 짚단을 곁에 두고 있었다.

    흰둥이가 제대로 호응해주지 않아 속상했지만 잠깐 뿐이었다. 유리아는 빙글 돌아서서 바둑이의 침대 맞은편에 자리한 분홍색 침대를 가리켰다. 침대에 지붕뿐만 아니라 커튼까지 따로 달려있는 것이 영락없는 공주님 침대였다.

    “이건 제 침대에요. 예쁘죠? 이 이불은 카이완 언니가 가주 님 고향에서 사다주신 거예요.”

    유리아가 자랑하듯 부드럽고 푹신한 솜이불을 들척였다. 얼굴을 보니 어서 한 번 만져보라는 것 같았다.

    유리아의 텐션을 하늘 끝까지 높여놓은 장본인인 스카자하는 유리아의 호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솜이불뿐만 아니라 유리아의 머리까지 쓰다듬은 뒤 방 한가운데 크게 깔려 있는 매트리스와 그 위에 펼쳐져 있는 담요를 가리켰다.

    “그럼 이건 뭐니?”

    스카자하의 물음에 유리아는 바로 답하는 대신 뺨을 긁적였다. 몸을 살짝 꼬다가 답했다.

    “헤헤헤. 각자 침대에서 자면 외로우니까 밤에는 여기에 다 같이 모여서 자요.”

    어쩐지 침대들이 하나 같이 깨끗하다 했다. 스카자하는 까르르 웃고 말았다.

    “저기 유리아, 그럼 오늘은 언니도 여기서 같이 잘까?”

    “진짜 진짜 진짜요?”

    유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스카자하는 마찬가지로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답해 주었다.

    “진짜 진짜 진짜지요.”

    유리아는 꺅 소리를 내며 스카자하를 끌어안았다. 스카자하는 그런 유리아를 품에 안으며 눈을 감았다. 천 년 만에 저택을 나서서 방문한 첫 장소가 유리아의 방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훈훈하구먼.”

    “훈훈하네.”

    멀찍이서 지켜보던 구시온과 용호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특히 구시온의 시선과 목소리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스카자하는 항상 아이들을 좋아했지.”

    생명의 화신이라 할 수 있을 스카자하는 구시온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근본부터가 서로 다른 존재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격노의 왕 쪽에서 회담 요청이 들어왔다고?”

    구시온은 감상에 빠지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오후에 진행된 가르디문디와의 만남을 떠올린 용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식탐의 영토를 치자는 것 같아. 자세한 사항은 회담에서 논하자는 것 같지만 말이야.”

    격노의 왕은 식탐의 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 더 행동을 서둘렀을 터였다.

    “그런 쪽으로는 나보다 더 좋은 조언 해줄 녀석들이 많을 것 같으니 생략하지. 다만…….”

    말끝을 흐린 구시온은 습관적으로 입에 물려던 담배를 다시 갈무리했다. 여전히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스카자하와 유리아를 한 차례 돌아본 뒤 말을 이었다.

    “회담 전에 11층을 공략하고 가는 걸 추천한다. 유스티아 할멈까지 넘어왔으니 사실상 큰 어려움은 없을 거다. 설사 루시아가 11층까지 완전 장악을 못한다 할지라도 유노의 인정은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손해 볼 것 없는 이야기지.”

    구시온의 말대로였다. 11층을 지키고 있을 처녀좌, 별을 헤아리는 유노의 인정을 받으면 마몬의 신기가 거의 다 완성되는 셈이었으니 서둘러서 나쁠 것이 없었다.

    “그 유노라는 여…자라고 하긴 좀 뭐하고 아가씨? 아무튼 전승에는 좋은 이야기밖에 없더만. 실제로도 그래?”

    “실제로도 그렇다. 스카자하 정도는 아니지만 성격도 꽤 좋은 편이고. 마몬 가의 요리사인 동시에 지원 마법의 대가였… 아, 미안하다. 나리가 궁금한 건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외모라면 미녀 맞다. 확실히 미녀야. 몸매도 속된 말처럼 쩔어주고. 엘룬이나 스카자하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미녀지.”

    구시온이 은근한 목소리로 답했다. 연이어 머리 위 허공에 홍련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주인이여, 그대의 번뇌력이 증-]

    “그런 적 없거든? 그리고 외모가 궁금하지도 않았… 씁.”

    아몬의 말을 중간에서 끊은 용호는 채 말을 마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구시온이 껄껄 웃었다.

    “내가 이래서 우리 나리를 좋아한다니까? 솔직하거든.”

    용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재차 무어라 목소리를 내려는 아몬을 만류한 뒤 화제를 전환했다.

    “헛소리는 이쯤하고 댁의 예속 사역마 화나 진행합시다. 다들 네가 1순위라고 해서 자리 비워둔 지 오래라고.”

    “허허, 나리가 정말 날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도 남아서 스카자하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합체 강화의 결과 강해진 것은 용호의 마력만이 아니었다. 탐욕의 힘 역시 강해졌기에 이전보다 더 많은 예속 사역마들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마몬처럼 당장 12 사역마를 갖추는 것은 무리였지만 적어도 열 명까지는 어찌어찌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럼 점심 먹고 오후쯤에 진행하는 게 어때? 다른 예속 사역마들도 모두 모여 있을 때 진행하는 편이 여러모로 효율적일 테니까.”

    구시온의 제의는 제법 타당했다. 구시온을 예속 사역마로 삼으면 그 즉시 다른 예속 사역마들에게 그 영향이 미칠 터였으니 말이다.

    “좋아, 그럼 이따 오후에 보도록 하지.”

    적당히 답한 용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시온은 용호를 따라 일어서는 대신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소 과장된 예를 표했다.

    “살펴 가시죠, 나리.”

    “오냐.”

    구시온에게 짝을 맞추듯 과장되게 답한 용호는 돌아섰다. 유리아의 방을 나섰다.

    오필리아와 티그리우스는 어젯밤 카디아 요새에 돌아갔고, 엘리고스는 새로 합류한 마몬 가의 전대 가주 십여 명과 근 백여 마리에 육박하는 투기장의 사역마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느라 바빴다.

    용호는 아침잠과 격전을 벌이며 깨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카타리나와 대놓고 그냥 늦잠을 즐기고 있는 카이완을 내버려 둔 채 마왕의 방에 홀로 자리했다. 옥좌에 앉자마자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다시 접속하시려고요?]

    “시트리와 만나야 하니까. 전력 강화를 위해 구매할 것들도 많고.”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꼭 감아 주세요.]

    용호는 옥좌에 몸을 조금 더 편안히 묻었다. 천천히 눈을 감는 것을 신호로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했다.

    온통 하얀 세상은 어제와 같았다. 텅 빈 세상을 마주한 용호는 약간의 실망감 속에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무래도 시트리는 아직도 귀환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돌연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끝없이 이어져 있던 공간이 단절되었다. 하얀 바닥은 순식간에 십여 미터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축소되었고, 그 외 모든 공간은 칠흑으로 가득 찼다.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인식 번호 : 009]

    [그 남자의 후예.]

    [긴급 상황 대처 17.]

    [현시간부로 해당 가상공간과 던전 상회 공용 네트워크와의 모든 연결을 차단합니다.]

    [오직 탐욕의 미궁으로부터의 접속만을 허가합니다.]

    “시트리?!”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빛의 문자 역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용호는 불길함을 느꼈다. 시트리의 신변에 무언가 이변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긴급 상황’이란 글귀가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시트리! 대답해요! 시트리!”

    아무리 악을 써도 소용없었다. 용호는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턱대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 생각했다.

    이 공간은 특별했다. 용호 자신은 늘 이곳에서 시트리를 만났다. 빛의 문자대로라면 시트리는 이 공간을 던전 상회의 네트워크와 구태여 단절시켰다. 탐욕의 미궁과의 연결만은 유지한 채로 말이다.

    일전에 얼핏 엿보았던 시트리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기억이 재생된 장소 역시 이 공간이었다.

    시트리는 때때로 침대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정말로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막 깨어 용호를 마주한 적도 있었다.

    용호는 직감했다. 이 공간은 단순한 단말이 아니었다. 다른 가주들이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장소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시트리의 개인 공간. 그녀의 은밀한 장소.

    용호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시트리를 강하게 열망하며 탐욕의 힘을 발동시켰다.

    탐욕의 연기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사방팔방 뻗어나간 그것은 단숨에 공간 안을 가득 채웠고, 이내 응집해 몇 개의 가닥을 이루었다. 마침내 온전한 하나가 되어 용호에게 길을 인도하였다.

    허공이 갈라지며 감춰져 있던 비밀 문이 드러났다. 탐욕의 연기가 문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 안에 용호가 갈망하는 것이 있다고 소리쳤다.

    다시 눈을 뜬 용호는 마력을 집중시켰다. 반쯤 부수다시피 하며 비밀 문을 열어젖혔다. 상대가 용호이기 때문인지 비밀 문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자신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드러난 장소. 가상공간 위에 고스란히 재현된, 그렇기에 실제 세상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공간.

    탐욕의 연기가 다시 한 번 움직였다. 비밀 문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이내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붉고 거대한 보석을 휘감았다.

    던전의 심장. 시트리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는, 시트리의 분신과도 같은 그것!

    용호는 다시 한 번 탐욕의 인도를 따랐다. 던전의 심장 위에 손을 올렸고, 마치 루시아를 대하는 것처럼 말을 걸어 보았다. 던전의 심장과의 교감을 시도했다.

    던전의 심장은 비밀 문과 마찬가지로 용호를 거부하지 않았다. 순순히 받아들이며 용호가 원하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트리.”

    단번에 가상공간에서 벗어난 용호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시트리를 구해야 했다.

    < 제 68장 - 수용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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