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50화 (150/227)
  • < 제 50장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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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후에 일어난 일들은 모두 반사적이었다. 허공에서 불꽃의 창이 나타난 그 순간 스트라바디는 권능을 발휘해 자리를 이탈했다. 옳은 판단이었다. 마몬 가의 가주가 아닌 다크 엘프 계집의 검이 빛살처럼 날아와 허공을 꿰뚫었다.

    단번에 방 끝에 도달한 스트라바디는 말이 아닌 의식으로 네 기사들을 불러들였다. 풀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한 네 기사들은 재빨리 스트라바디의 곁에 모여들어 방어 태세를 갖췄다.

    다크 엘프 계집이 잿빛 계집을 품에 안고 자리를 이탈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천장에서 뛰어내린 마몬 가의 가주와 두 예속 사역마- 붉은 야수와 맹수가 대신했다.

    고작 몇 초 사이에 일어난 일었다. 스트라바디는 이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생각했다.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을 막아라.”

    낮게 말했다. 마몬 가와 던전 전투로 결판을 내기로 했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순간이었다.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그 형태가 제법 달랐지만 결과만 동일하면 되는 일이었다.

    던전은 스트라바디 자신의 영역이었다. 던전의 영혼이 주변 상황을 알려주었다.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 모두가 온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와 해골기사는 아직 이 방에 도달하지 못했다. 마몬 가 가주의 곁에 선 것은 붉은 야수와 맹수뿐이었다. 호위기사로 추정되던 다크 엘프 계집은 부상이 심한 잿빛 계집을 데리고 마법사와 해골기사 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던전의 영혼이 급히 경보를 울렸다. 던전 내에 잔존해 있는 사역마 모두가 이 방으로 모여들 터였다.

    더욱이 눈앞의 붉은 야수와 맹수는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소모가 많은 편이었다. 비록 계획처럼 완전히 지치게는 못 만들었지만 최상의 상태가 아닌 것만 해도 이득이었다. 스트라바디 자신과 함께 강해진 네 기사들이라면 붉은 야수와 맹수를 제압은 못 할지언정 붙잡아 둘 수는 있을 터였다.

    ‘협공은 무리.’

    네 기사와 협공해 마몬 가의 가주를 공격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못했다. 붉은 야수와 맹수를 차단하고 마몬 가 가주와 일 대 일 상황을 만드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었다.

    스트라바디의 생각은 빨랐다. 명을 받은 네 기사들은 각오를 굳힌 얼굴로 붉은 야수와 맹수를 노려보았다.

    마몬 가의 가주- 용호는 그런 스트라바디와 네 기사들을 마주했다. 아몬을 휘두르는 대신 말했다.

    “사르가타나스를 먹어치웠군.”

    항복한 나가라쟈 가주에게 스트라바디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의심했던 일이지만 이제는 확신했다. 스트라바디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그리고 지금 그 성과를 보여주마.”

    다섯 개의 뿔은 이미 개방한 상태였다. 허나 이것이 최상의 상태인 것은 아니었다.

    스트라바디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나가라쟈의 피를 일깨웠다. 뱀의 심장이 요동치며 스트라바디를 보다 전투적으로 변모시켰다. 얼굴과 팔등에 푸른 뱀의 비늘이 돋아났다.

    스트라바디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번에는 던전의 영혼이 반응했다. 스트라바디에게 던전의 마력을 주입했다. 이것으로 마력을 키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회복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스트라바디에게 무지막지한 용량의 마력 회복 탱크를 달아준 셈이었다.

    스트라바디는 충실한 고양감을 느꼈다. 뱀의 심장을 가진 그는 애당초 사르가타나스의 죽음에 죄책감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애착 가는 대상을 죽였다는 사실에서 오는 상실감과 작은 노여움 정도가 전부였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작은 감정들조차 씻겨 나갔다.

    왜 그토록 계산에 집착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자신인데. 남부 공백지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힘을 손에 넣은 자신인데!

    스트라바디의 마력이 다시금 집결지 내부를 가득 채웠다. 한기를 띈 차가운 마력이었다.

    스트라바디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네 기사들 역시 가주의 위대한 힘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용호가 마력을 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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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개의 뿔이 우뚝 솟으며 마력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집결지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스트라바디의 한기를 녹염이 살라먹었다.

    성난 그것은 폭발이었다. 힘 싸움 같은 것도 없이 스트라바디의 마력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네 기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더욱이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장과 브리가다로부터 빛이 일었다. 마신왕의 심장을 이루는 일곱 발톱 가운데 두 개가 동시에 용호의 심장을 물었다.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을 이끌어냈다.

    스트라바디의 마력은 그저 거대할 뿐이었다. 반면에 용호의 마력은 소용돌이 쳤다. 거센 폭풍과 같았다.

    단 한 걸음을 내딛은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스트라바디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고양감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단순한 마력의 격차가 아니었다.

    마력의 절대적인 양만을 따진다면 스트라바디 자신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아니, 던전의 지원까지 고려한다면 오히려 이쪽이 더 나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당했다.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벽에 두려워할 뿐인 네 기사들과 달리 스트라바디는 그 이유를 간파했다. 그렇기에 더 큰 감정의 낙차를 경험했다.

    마력의 강함이 달랐다.

    양이 아닌 질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쾅!

    굉음이 터졌다. 용호와 엘리고스, 오필리아 세 사람이 동시에 진각을 밟으며 난 소리였다.

    생각에 매몰된 스트라바디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절대 떠올려서는 안 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길 수 있을까-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과카가가가가가강!

    엘리고스와 오필리아가 네 기사를 강타했다. 엘리고스의 주먹이 벽과 바닥은 물론이고 기사의 갑주까지 박살냈다. 오필리아의 공격은 훨씬 더 우아했지만 치명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용호의 마력에 압도되었던 기사 가운데 하나가 가슴을 걷어차였다. 버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밀려나 벽과 충돌했다. 집결지 전체가 진감했다.

    스트라바디는 공간을 도약했다. 아슬아슬한 순간 권능을 발해 용호의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스트라바디의 움직임은 회피가 아닌 도주에 불과했다.

    아몬이 허공을 꿰뚫은 바로 그 때 용호가 돌아섰다. 수많은 사투를 통해 만들어진 경험이 용호를 이끌었다. 거칠게 뿌린 왼팔로부터 검은 마력이 뻗어나가 공간 도약을 막 마친 스트라바디를 움켜쥐었다. 재차 공간 도약 할 틈조차 주지 않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등부터 전해진 충격에 스트라바디가 고통을 토했다. 아무리 마력이 강대하다고 해도 결국엔 육체에 속박된 존재였다.

    찰나가 생겼다. 스트라바디가 통증을 억누르며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용호의 다음 수가 펼쳐진 후였다. 크게 확장된 검은 마력이 스트라바디의 시야를 가렸다. 공간 도약을 저지했다.

    쾅!

    아몬이 검은 마력을 헤집었다. 불타는 창이 스트라바디의 복부를 꿰뚫었다. 도저히 인내할 수 없는 고통이 스트라바디를 엄습했다. 강인한 나가라쟈의 육체는 쇼크를 견뎌냈지만 스트라바디의 정신은 아니었다. 스트라바디는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오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권능을 발휘했다.

    생각하고 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거리나 위치를 조절하는 일 따위는 하지 못했다. 흩어지는 어둠 사이로 보았고, 눈에 보인 곳으로 몸을 날렸다.

    스트라바디는 부유감과 추락의 감각을 동시에 느꼈다. 불타는 창이 사라졌기에 아주 약간이지만 홀가분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스트라바디의 목 줄기를 용호가 움켜쥐었다.

    다시 한 번 바닥과 충돌했다. 더욱이 이번에는 머리부터였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고, 설사 떴다 해도 보이는 것은 오직 바닥뿐일 터였다.

    마력. 마법. 권능.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것.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용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용호의 왼손이 스트라바디의 허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몬이 뚫어놓은 구멍 속에서 왜곡의 방패가 펼쳐졌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용호의 손이 마치 로켓처럼 상처에서 튕겨져 나왔을 때 스트라바디의 뱃속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상처는 더 크게 벌어졌고, 짓눌린 내장은 찢어지고 뭉개졌다.

    우아한 검투 따위는 없었다. 백중세의 마력을 겨루는 가주들 간의 싸움 역시 펼쳐지지 않았다.

    용호는 마력을 오른손에 집중시켰다. 스트라바디가 카이완의 마력을 억압했듯이,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폭발하려는 스트라바디의 마력을 찍어 눌렀다.

    집결지가 요동쳤다. 마치 던전 전체가 신음을 토하는 것 같았다.

    용호는 다시 손을 놀렸다. 압도적인 상황이었지만 방심하지 않았다.

    던전은 여전히 스트라바디에게 마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나가라쟈의 육신은 내장의 태반이 짓뭉개진 와중에도 빠르게 육신을 재건했다. 그러니 더욱 몰아쳐야 했다.

    용호는 왼손으로 아몬을 짧게 쥐었다. 연달아 스트라바디의 등을 찍어 새로운 구멍을 만들었다. 스트라바디가 다시 한 번 몸부림쳤지만 결코 용호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끔찍한 작업이 반복되었다. 아몬을 허공에 푼 용호가 재차 구멍에 왼손을 집어넣었다. 왜곡의 권능을 발휘해 스트라바디의 육신을 물리적으로 파괴했다.

    비늘이 돋은 가죽이 크게 부풀었다. 왜곡의 방패에 짓눌린 뼈가 부서졌다. 폐 역시 뭉개져 핏물이 되었다. 마력의 집결지 가운데 하나인 심장이 부서지니 육체의 수복 속도 역시 느려졌다.

    용호는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스트라바디의 뱀 같은 목을 으스러트린 뒤 이제는 넝마조각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스트라바디의 육신 위에 왼손을 얹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아몬을 움켜쥐었다.

    스트라바디가 꿈틀거렸다. 던전의 영혼이 절규하듯 쥐어짜낸 마력을 스트라바디에게 불어넣었다.

    소용없었다. 초고온의 열을 발한 아몬이 스트라바디의 뒤통수를 꿰뚫었다. 녹염으로 스트라바디의 머릿속을 불태웠다.

    “가주 님!”

    네 기사 가운데 누군가가 외쳤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를 상대로 고군분투하던 그들은 마력이 격감하는 것을 느꼈다. 가주가 죽었기에 예속 사역마들 간의 연결 역시 끊어진 것이었다.

    용호 또한 스트라바디의 죽음을 확신했다. 긴 숨을 토하는 것으로 마력을 갈무리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영육에 무리를 주고 있는 마신왕의 심장을 해제한 뒤 바로 다음 수순으로 넘어갔다.

    스트라바디는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가진 강대한 마력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고, 동부 가주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세검 실력 역시 뽐내지 못했다. 나가라쟈의 비전 마법과 공간 도약의 권능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호는 그것들에 관심이 없었다. 싸움에 임했고, 승리했으니 이제 그 과실을 거둘 때였다.

    뿔 다섯 개 분의 마력.

    동부와 북부에 존재했던 가주들의 집결체라 할 수 있을 그것.

    엘리고스와 오필리아가 돌아섰다. 공백지에서 나고 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단순히 승리한 가주가 패배한 가주의 정수를 흡수하는 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남부 공백지.

    이름 그대로 주인 없는 땅. 저 위대한 탐욕의 왕 마몬 이래 언제나 분열되어 있던 땅.

    이제는 아니었다.

    천 년의 세월을 넘어 마침내 새로운 왕의 시대가 펼쳐질 터였다.

    용호는 탐욕을 발했다. 스트라바디의 정수가 지닌 모든 것들을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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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백지의 왕.”

    까마귀가 말했다. 스트라바디의 던전을 주시하던 그것은 새카만 눈동자에 정보를 담았다. 크게 홰를 쳐 날아올랐다.

    공백지가 통일되었다. 아직 그 힘이 하나로 합쳐지지는 않았지만, 그 마력의 정수는 하나가 되었다 해도 좋았다.

    “공백지의 왕.”

    시트리가 말했다. 검은 적막 속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해묵은 추억들을 파헤치는 대신 지금을 보았다.

    과연 이 변화는 북부의 전쟁과 맞물려 어떤 사건을 초래할까.

    시트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추론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저 순수한 감정을 헤아렸다. 기뻐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마몬.”

    그리운 음률이 마음을 따스하게 했다. 시트리는 마치 소녀처럼 해맑게 웃었다.

    용호가 자신을 찾아오는 것은 언제일까.

    시트리는 두근거림을 감추지 않았다. 가슴을 살며시 짓누르며 눈을 감았다. 용호와 마주할 순간을 고대했다.

    제 50장 - 던전 돌파 끝, 제 51장 - 공백지의 왕으로 이어집니다.

    < 제 50장 #4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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