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30화 (130/227)

< 제 43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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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몬 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묘한 이질감 속에 용호는 눈을 떴다.

조용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다.

온통 새하얀 공간 속에서 용호는 눈을 깜박였다. 무척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 것도 없이 마주한 적은 없었다.

“어… 시트리 씨?”

대답이 없었다. 용호는 약간의 불안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이렇게 끔찍한 곳이었나?’

그림자조차 없이 그저 이어져있기만 한 새하얀 지평선이 사뭇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용호는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시트리 씨?”

[인식 번호 : 009]

[그 남자의 후예.]

[마몬 가의 현 가주 천용호]

[인식을 완료했습니다. 환영합니다.]

빛의 문자가 눈앞에 펼쳐지며 약간 딱딱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런 일이었지만 둘 모두 익숙했기에 용호는 오히려 안심할 수 있었다. 던전 상회의 카탈로그 등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는 표준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시트리 님은 현재 던전 상회 내부 회의에 참석 중이십니다.]

[지금은 시트리 님과 대화하실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통상모드로 거래에 임하시겠습니까?]

용호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지나친 과신일지 모르겠지만, 시트리답지 않은 대처였다. 용호 자신이 아는 시트리라면 이렇게 기계음으로 자신을 상대하는 대신 대리인을 남기거나 직접 전언을 남겼을 터였다.

‘긴급회의 같은 건가?’

흥미가 동했다. 시트리는 늘 스스로를 던전 상회의 거물이라 표했다. 그리고 그 말은 거짓이 아닐 터였다. 그녀는 천 년이 넘는 삶을 살아온 강력한 마인이었다.

그런 시트리가 참가하는 긴급회의라면 안건도 보통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엠브리오 때문은 아니겠지?’

혹시나 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무언가 더 큰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용호는 빛의 문자 쪽을 보며 물었다.

“시트리 씨가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수는 없나?”

[가능합니다.]

[다만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는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지?”

[그 질문에는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대답이었다. 용호는 더 캐묻는 대신 손가락을 놀렸다. 주인인 시트리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온통 하얀 공간은 용호의 의지에 답했다. 용호의 등 뒤로 무척이나 푹신푹신해 보이는 의자가 솟아났다.

“기다리도록 하지. 그 동안 던전 상회의 카탈로그를 열람할 수 있을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빛의 문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대신이라도 되듯 용호의 왼손 주위에 동그란 빛의 구가 형성되었다.

하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용호는 빛의 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이미 몇 번이나 봐 익숙한 던전 상회 카탈로그가 허공에 펼쳐졌다.

용호가 기다림을 선택한 것은 시트리가 참석한 회의의 내용이 궁금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트리와의 직접 거래가 필요했다. 대금 자체도 본 드래곤의 뼈인 만큼 흥정이 필수 불가결했다.

‘좋아.’

용호는 마음을 편히 갖기로 했다. 가상공간에 접속해 있는 것 자체가 마력을 소모하는 일이었지만 이제 뿔이 다섯 개나 있는 용호였다.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마력의 양이 가상공간에서 소모하는 마력보다 더 많았다. 조급한 마음만 버린다면 나름 즐거운 휴식이 될 터였다.

‘진짜 크네.’

시트리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제한적인 카탈로그와는 달랐다. 던전 상회의 통상 카탈로그는 그 거래하는 품목이 다양한 만큼 굉장히 빽빽한 구성을 자랑했다.

용호는 일단 검색 창에 본 드래곤을 입력해 보았다. 이내 복잡한 화면이 모두 사라지고 간결한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6성 사역마 카탈로그]

[통상 거래가 불가능한 항목이 대부분입니다.]

[거래를 원하실 경우에는 담당자와 상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용호가 거래한 사역마들은 기껏해야 3성 정도였다. 그런데 6성. 절로 고개가 끄덕여 졌다. 스카자하의 생명의 힘이 아니었다면 결코 쓰러트리지 못했을 본 드래곤이었다.

‘과연.’

어째서 그렇게 강했는지도 납득이 되었다. 또한 동시에 의구심이 들었다.

엠브리오는 어떻게 본 드래곤을 손에 넣은 것일까.

본 드래곤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금광을 개발한 이후로 제법 큰 단위의 돈을 만질 수 있게 된 용호였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물론 엠브리오는 용호 자신보다 부유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본 드래곤을 손에 넣기는 어려웠을 것 같았다. 가격이 초월적인 것도 문제였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본 드래곤은 단순히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사역마가 아니었다.

용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이 몇 가지 있었지만 속단하는 대신 생각을 잠시 미뤘다. 엠브리오의 관한 일들은 좀 더 정보가 필요했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들.’

눈을 뜬 용호는 본 드래곤의 뼈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았다. 상상했던 것들이 그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드래곤의 뼈로 만든 각종 무기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버그림이 드래곤의 뼈를 제련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몸길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드래곤의 뼈가 통째로 손에 들어온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몸이 후끈 달아오른 용호는 드래곤의 뼈로 만든 무기들의 가격을 보았다. 다시 한 번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장사해도 떼돈 벌겠네.’

오필리아가 왜 그렇게 불안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 정도 가치를 가진 물건을 길바닥에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애가 타는 것이 당연했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용호는 다시 카탈로그를 조작했다. 퍼뜩 떠오른 것이 있어서였다.

‘역시!’

[4성 사역마]

[용아병]

[드래곤의 뼈에서 태어나는 스켈레톤]

[용의 뼈를 재질로 삼기 때문에 통상적인 스켈레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소체가 되는 드래곤의 종류와 생전 나이에 따라 그 속성과 강함이 다르다.]

용호는 연달아 손가락을 놀렸다. 이번에는 사역마 항목이 아니라 스크롤 항목을 찾아보았다.

[용아병 생성의 스크롤]

[* 드래곤의 뼈가 필요합니다.]

[* 드래곤의 뼈를 함께 구매하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다행히 존재했다. 용호는 안도의 숨을 토했다. 티그리우스라는 우수한 마법사를 보유한 마몬 가였지만, 티그리우스는 네크로멘싱 쪽으로는 초심자나 다름없었다.

스컬 부대의 신병들을 용아병들로 채운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드래곤 본으로 다시 태어날 스컬을 떠올린 용호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절로 배가 부르는 기분이었다.

엠브리오와의 전투로 용호는 확실히 깨달았다.

마계의 전투는 인계의 전투와 달랐다. 병력 개개인의 단위 전투력이 그야말로 초월적인 세계였기에 질로 양을 제압한다는 것이 가능했다.

처음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정신 승리하듯이 택한 소수정예 체계였지만, 비전이 있었다. 빈약한 무장과 전투력의 병력 일천을 만들 비용으로 일당백의 정병 열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았다. 일반적인 가주들이라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용호 자신에게는 진화의 권능이 있었다. 충분히 가능했다.

본 드래곤과 용아병들에 관한 정보 검색을 마친 용호는 좀 더 느긋한 마음으로 고급 사역마들을 구경했다. 구매나 소위 말하는 아이쇼핑이 목적이 아니었다. 용호는 고급 사역마들의 계보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싸게 사서 키워 써야지.’

특히 눈에 띈 것은 최상위 진들이었다. 우연찮게 마주했던 불꽃의 진과는 격 자체가 달랐다.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을 한 불꽃의 진 이프리트.

강력한 거인의 모습을 한 대지의 진 위칸트라.

그리고 나머지 다섯 속성의 최상위 진들.

‘살라미도 진의 계보에 들어가네?’

하지만 이미 이프리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살라미였다. 아마 앞으로 진화를 거듭한다 해도 드래곤과 같은 형상이 된다면 모를까, 인간형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용호가 머릿속의 구매 리스트를 차곡차곡 쌓아갈 때였다. 눈앞의 빛의 문자가 갈라지며 눈부신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하는 고객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와 같은 시트리였다. 그녀는 반갑게 일어나 인사하는 용호에게 예를 한 번 표한 뒤 맞은편 자리에 의자를 만들어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긴 터라 회의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시트리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용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결되신 건가요?”

“아뇨, 이제 겨우 시작이라서요. 한 동안은 이런 회의가 연이어질 것 같답니다.”

시트리는 생긋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마주한 용호는 시트리가 힌트는 흘릴지언정,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회의를 열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을 거란 사실을 확신했다.

시트리가 화제를 돌렸다.

“사랑하는 고객님, 오늘은 무슨 일이시죠?”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묻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런데 용호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시트리가 짝하고 박수를 쳤다.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제 정신 좀 봐.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다는 건, 우리 사랑하는 고객님께서 엠브리오를 쓰러트리셨다는 거겠죠?”

이것으로 확실해 졌다. 회의에서 논한 것은 엠브리오의 일이 아니었다.

용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트리가 돌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축하드릴 일은 그것만이 아닌 것 같은데요?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용호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바보처럼 풀어진 표정을 마주한 시트리는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으음… 고객님에 대한 사랑이 아주 살짝 약해지는 기분이 드네요. 방금 표정 같은 거 다른 여자 앞에서는 짓지 마세요. 진심어린 충고랍니다.”

하지만 그래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귀를 파닥거리는 카타리나를 떠올린 용호는 억지로 헛기침을 터트렸다. 가까스로 표정을 갈무리한 뒤 시트리에게 말했다.

“본 드래곤의 뼈를 거래하고 싶습니다.”

시트리와의 거래는 언제나처럼 빠르고 경쾌했다.

본 드래곤의 왼쪽 다리 뼈 전체를 판매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던정 상회의 운송 서비스와 다량의 회복 물품, 용아병 생성의 스크롤 등을 구매했다.

용호가 보기에 본 드래곤의 뼈 가격이 다소 낮게 책정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항의를 하지는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시트리가 자신에게 엉터리 가격을 강요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언데드 화를 거치면 드래곤의 뼈 가치가 하락하기 마련이랍니다. 죽음의 기운이 드래곤의 뼈에 깃들기 때문이죠. 본 드래곤의 뼈를 제련하실 거라면 이 점을 유의해 주세요.”

용호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했는지 시트리가 가볍게 덧붙였다. 용호는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거래가 모두 끝났다. 시트리와의 대화는 즐거웠지만 그 이상으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용호였기에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뵐게요.”

“그 전에 제가 조언 한 가지 드려도 될까요?”

시트리도 용호를 따라 일어섰다. 의아해 하는 용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집’에 다녀오실 거라면 서두르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면, 다녀오실 틈이 없어질 수도 있답니다.”

용호는 시트리를 보았다. 시트리는 표정을 감추고 뒤로 다시 한 걸음을 물러섰다. 방금 조언은 긴급 회의와 관련된 것임이 분명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다음에 또 뵐게요.”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한 시트리는 용호에게 윙크한 뒤 사라졌다. 마치 나머지는 스스로 알아보라는 것 같았다.

마계에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시트리의 태도로 보아 용호 자신에게 당장 직접적인 악영향을 줄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역시 경계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한 차례 고개를 내저은 용호는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가상공간과의 접속을 끊었다.

&

[두근두근]

[콩닥콩닥]

[저는 없는 사람 취급해도 된답니다. 이해해 드릴게요.]

< 제 43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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