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92화 (92/227)
  • < 제 30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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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도시의 광경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고, 성벽 역시 보수를 필요로 했지만 그것이 자유도시의 색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약식으로나마 미치광이 오로스를 사역마로 등록한 용호는 선술집에서 오필리아를 마주했다. 자유도시의 현황뿐만 아니라 주변 가주들의 움직임을 보고 받기 위함이었다. 물론 용호가 보고 들은 것들과 새로이 얻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자유도시는 빠르게 정리되고 있습니다. 오로스까지 넘어온 지금, 자유도시는 마몬 가의 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모두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아니고, 아직 공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질이 중요하다는 거지?”

    “네, 공표하는 건 나중에 해도 괜찮겠지요.”

    오필리아가 베시시 웃으며 칵테일 한 잔을 내밀었다.

    미치광이 오로스를 합류시킨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오필리아는 삼개 세력 가운데 하나의 수장이었다. 자유도시를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두 세력 가운데 하나의 수장인 오로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또한 오로스는 유능한 자였다. 그는 의사인 동시에 연금술사였고, 뛰어난 약사였다.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굳이 더하자면, 오필리아는 오로스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오로스가 살아서 자유도시를 떠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생산직 길드의 길드원들 가운데서도 오로스를 따라 떠나고자 하는 자들이 생겨날 터였다. 그런 이들을 하나 둘 내보내고 나면 자유도시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다곤의 죽음 때문에 무법자 무리들의 이탈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생산직 길드까지 놓칠 수는 없었다.

    물론 시간이 충분하다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유도시를 오가는 이들은 많았고, 사람이야 다시 모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마치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물처럼, 피할 수 없는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부에서 전투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늑대의 마왕 엠브리오가 서부 가주 연합과 격돌했다.

    “장기전이 예상됩니다만 워낙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해온 엠브리오입니다. 이번에도 어떤 변수를 만들어낼지 알 수 없습니다.”

    오필리아의 설명을 들으며 용호는 남부 공백지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서부 가주 연합은 엠브리오와 격돌했던 다른 세력들과 달리 단 한 번의 야전으로 승부를 짓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강점이 수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전선 그 자체를 확대시켰다.

    엠브리오가 모든 전투에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엠브리오가 나타난 전투에서 설사 패한다 할지라도 다른 곳에서 승리하면 된다.

    어찌보면 소모전이었다. 그리고 소모전이라면 이제까지 싸움을 반복해온, 더욱이 혼자인 엠브리오가 불리할수밖에 없었다.

    “엠브리오가 패할 가능성은 없나?”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쪽이 우리에게도 훨씬 더 나은 결과고요. 하지만 확신할 수 없습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지금까지 엠브리오의 행보는 가주님과 닮아 있습니다.”

    용호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오필리아가 쓰게 웃었다.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싸움들을 모두 이기며 파죽지세로 세를 불리고 있으니까요.”

    어찌보면 얼굴에 금칠하는 이야기였기에 용호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오필리아는 가끔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용호가 좋았다. 소위 말하는 인간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주 님이 가주 자리에 오르신 기간과 그 이후에 이루신 일들을 고려한다면… 틀리지도 않은 말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최악을 가정해야 하니까요. 엠브리오가 서부 가주 연합을 격파한 뒤에도 여력이 남아 바로 남부로 쳐들어오는 것이 현재 상상할 수 있는 최악입니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인도적인 생각이었지만, 장기전이 되면 될수록 좋았다. 양측 간의 피해가 커질수록 용호에게는 이득이었다.

    “그럼 이제 가까운 위협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법자 무리 가운데 일부가 자유도시의 변화를 눈치 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부는 눈치채지 못한 상태로 무력 시위를 시도하고 있고요.”

    “심각한 정도인가?”

    “오로스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꽤 문제가 되었겠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제 선에서 정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생긋 웃는 오필리아의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하지만 용호에게는 참으로 기특한 눈빛이었다.

    용호가 기분 좋게 말했다.

    “역시 유능해.”

    “감사합니다.”

    훈훈한 가운데 어느 순간부터 배경이 된 스컬이 껄껄 웃었고, 카타리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오필리아의 보고는 어느새 마지막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융케라스의 딸이 극도의 불안감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직 자유도시가 마몬 가의 수중에 들어간 것 까지는 모르지만, 전투 결과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니까요. 저대로 놔두면 서부 가주 연합이든 엠브리오든 남부에 내려오는 자에게 항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항복할 성격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그냥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더욱이 가문 내의 분열도 가속화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융케라스 가의 던전은 마몬 가의 던전에서는 멀었지만 자유도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자유도시에서 용호가 맹활약을 펼쳤으니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던전 공격을 고민해볼 때인 것 같군.”

    물론 당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기가 먼 것 또한 아니었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던전 전투를 경험했지만 제대로 방비하고 있는 던전에 쳐들어간 일은 없었다. 융케라스의 딸과의 싸움은 최초의 던전 공격이 될 터였다.

    오필리아의 보고가 모두 끝나자 용호는 동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살라미와 부케팔로스, 스컬 부대가 변한 모습을 이미 확인했던 오필리아는 카타리나마저 진화를 했다는 사실에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진화하고 싶다.

    나도 더 강해지고 싶다.

    이런 것도 선술집의 여주인답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오필리아에게는 참으로 많은 얼굴들이 있었다. 지금 모습은 당당한 여장부가 아니라 마치 어린 소녀 같았다. 용호는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유리창 너머로 트럼펫을 바라보는 흑인 소년’을 떠올렸다.

    “그럼 할까? 오필리아도?”

    “저도 가능해요? 진화 숙련치 다 찼어요?”

    오필리아가 소녀처럼 물었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필리아가 마몬 가에 합류한 뒤 치른 전투만 두 번 이었고, 그 사이에 실행한 대련이라 쓰고 노인공격이라 읽어도 될 법한 엘리고스와의 훈련은 수십 번에 달했다.

    진화 숙련치 쌓이는 게 느린 오필리아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제는 진화를 할 때가 되었다.

    “어떤 쪽으로 특화시켜 줄까?”

    “으, 잠시만요. 고민 좀 할게요.”

    오필리아가 방방 뛰는 모습에 스컬은 다시 껄껄 웃었다. 그런데 카타리나가 조금 이상했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용호의 손과 오필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입술을 움츠렸다.

    용호도 그 시선을 느꼈다. 그런데 왜일까. 카타리나의 그 시선에서 오히려 재미를 느낀 용호는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겨우 진화 루트를 결정한 오필리아를 바라보았다.

    ‘꼬리 만져도 되냐고 물으면 재밌을 것 같지만.’

    용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오필리아와 귀를 살짝 늘어트린 채 집중하는 카타리나 모두에게 말했다.

    “시작할게. 잠시 눈을 감아봐.”

    오필리아는 눈을 감았고, 카타리나는 더욱 집중했다. 용호는 오필리아의 꼬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오필리아의 양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뒤 마력을 주입했다.

    오필리아를 진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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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고스 오라버니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마력 특화로 진화를 마친 오필리아가 용호를 배웅하며 말했다. 정이 잔뜩 어린 그 눈빛과 목소리에 용호는 키득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유도시에 며칠 더 머물고 싶은 용호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몬 가로 돌아가야만 했다.

    목이 빠져라 용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을 엘리고스를 안심시켜야 했고, 루시아 역시 성장시켜야 했다.

    부가적으로 용호가 계속 자유도시에 머물면 융케라스의 딸이 신경쇠약에 걸려 죽거나 무척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전자는 상관없었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미치광이 오로스는 이미 마음을 정리했는지 용호 앞에서 불퉁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워낙 유능한 오필리아가 곁에 남을 것이기에 용호는 오로스에 관한 걱정을 접었다.

    자유도시를 나선 용호는 마몬 가로 향했다.

    ‘집’에 돌아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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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 미어 캣’으로 진화한 던전 미어 캣들은 이전보다 더 먼 거리를 관측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용호의 귀환을 일찌감치 파악한 엘리고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사역마 일동과 함께 용호의 마중을 나왔다.

    용호도 그런 사역마들이 반가웠다. 진화를 거듭한 덕분에 이제는 노인이라기보다는 미중년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 엘리고스와 얼굴을 마주하니, 정말로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고블린 레인저들과 바둑이는 강습형으로 진화한 살라미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좋아했다. 항상 바둑이와 함께 다니는 공주개미 유리아는 살라미보다는 부케팔로스에게 감탄한 듯 눈을 반짝였다. 카타리나가 어린 시절 입던 원피스를 입었기 때문인지 인외의 존재가 아닌, 그저 귀여운 소녀로만 보였다.

    리쿰과 오크들은 자유도시에서의 전투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스컬 부대는 말을 못했고, 스컬이 하는 말은 스컬컬이 다였다. 궁금증을 해소해줄 수 있는 것은 용호와 카타리나뿐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만만하며 실제로도 만만한 카타리나에게 강렬한 눈빛들을 보냈다.

    용호는 사역마들 간의 화목과 평화를 위해 카타리나에게 잠시 휴가를 주었고, 원하지 않는 휴가를 받은 카타리나는 리쿰을 필두로 한 오크들에게 끌려갔다.

    카타리나 대신 스컬을 대동한 용호는 바로 던전의 심장 방으로 직행했다. 가는 길 내내 루시아는 두근두근이라든지, 콩닥콩닥이라든지 속이 훤히 보이는 의성어들을 아주 작게 반복했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주인님!]

    심장 방에 들어오자마자 루시아가 소리쳤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치 머리를 쓰다듬듯 던전의 심장을 쓰다듬은 용호는 지체하지 않고 에일 가와 유빙 가의 정수를 꺼내들었다.

    루시아는 언제나처럼 의성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꿀꺽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에요.]

    용호는 왜 딸바보라는 말이 존재하는 지를 이해했다. 바보처럼 웃으며 루시아의 본체인 던전의 심장에 정수를 주입했다.

    루시아가 전율했다. 그 영혼의 떨림을 용호는 느낄 수 있었다.

    [던전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던전의 통제력이 훨씬 더 강력해졌습니다. 또한 보다 큰 범위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영역이 느껴집니다. 단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지만… 지하! 지하 층의 존재가 느껴집니다! 1층보다 더 넓은 공간이 지하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으아아! 너무 맛있어요!]

    [기존의 시설들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지금이라면 공간의 문의 제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주님 최고!]

    군데군데 사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었지만, 참으로 기분 좋은 보고였다.

    특히나 마지막 보고가 용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공간의 문 완공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지?”

    [네, 가주님. 충분한 마력이 모였습니다. 자료가 부족하고 공사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긴 하지만 가능합니다!]

    용호의 기쁨은 곧 루시아의 기쁨이기도 하였다.

    용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쾌재를 한 차례 지른 뒤 다시 한 번 던전의 심장을 쓰다듬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루시아.”

    [헤헤헤.]

    [그럼 바로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른 작업에 투입되어 있던 사역마들 가운데 일부를 공사현장으로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허가를 부탁드립니다.]

    약간은 바보처럼 웃은 루시아가 용호의 눈 앞에 빛의 문자들을 투사했다. 공사에 투입할 사역마들의 명단과 그들이 본래 하고 있던 일들에 관한 보고서였다.

    빠르게 검토한 용호는 허공에 서명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루시아가 다시 물었다.

    [모처럼 돌아오셨으니 푹, 정말로 푹 쉬실 것을 권장드립니다.]

    “오늘은 그럴 거야.”

    [내일은 바로 일하실 거고요? 조금 더 쉬셔도 될 텐데.]

    [투기장과 2층 탐사 가운데 어느 쪽을 우선시 하실 건가요? 후자를 택하신다면 사역마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루시아의 물음에 용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호가 택한 것은 양쪽 모두 아니었다.

    “다녀올 곳이 있어.”

    용호가 말했고, 루시아는 이내 그 장소가 어디인지를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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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고객님,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제 30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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