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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91화 (91/227)
  • < 제 30장 - 귀가 >

    제 30장 - 귀가

    용호가 첫 목적지로 삼은 곳은 에일 가의 던전이었다.

    자유도시로부터 이틀 거리, 서두른다면 그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당도하는 것도 가능할 만큼 가까운 거리였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던전 접수는 생각 이상으로 수월했다.

    군대의 출발지였기 때문인지 아가레스는 에일 가의 던전을 거의 비워두다시피 했다. 그나마 남겨두었던 소수의 병력들도 아가레스의 죽음을 눈치 채고 도망친 것 같았다.

    아가레스는 타고난 포식자였다. 자신이 쓰러트린 마왕을 문자 그대로 먹어치우던 그는 항복한 사역마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에일 가에 남아 있는 흔적들로 보아 마왕뿐만 아니라 사역마들 가운데 일부도 아가레스에게 잡아먹힌 것 같았다.

    수족인 곤충형 사역마들을 제한다면 나머지 사역마들은 ‘공포’로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 공포의 근원이 사라졌으니 도망치는 것이 당연했다.

    호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에일 가에는 사역마 뿐만 아니라 함정도 없었다. 남은 것은 부서지고 망가진 함정의 잔해들뿐이었다.

    아마도 아가레스가 에일 가를 먹어치우는 과정에서 파괴한 함정들일 터였다.

    아가레스는 함정을 복구하지 않았고, 에일 가를 그저 잠시 쉬어갈 장소로만 사용하였다.

    사역마도 없었고 함정도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용호의 앞길을 방해할 것은 던전의 복잡한 구조뿐이었는데, 그나마도 탐욕 앞에서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유일한 흠이라면 에일 가의 던전의 심장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마치 짐승의 이빨에 난도질당한 것처럼 심한 상처가 남은 것은 던전만이 아니었다.

    용호는 에일 가의 던전의 심장으로부터 정수를 추출한 뒤 냉기의 마력으로 잘 감싸 주머니에 보관하였다. 던전의 심장에서 나온 정수가 탐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능한 던전의 심장에서 나온 정수들은 루시아에게 몰아줄 생각이었다.

    루시아는 아직도 마몬 가의 1층 밖에 통제하지 못했다. 탐욕의 왕 마몬이 지하 층에 남긴 유산들을 습득하기 위해서라도 루시아를 성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에일 가에서 반나절 가량 휴식을 취한 용호는 바로 다음 던전으로 향했다.

    에일 가 던전의 상태를 보아하니 아가레스의 휘하의 다른 던전들 역시 소위 말하는 막장 상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동부의 다른 가주들이 아가레스의 죽음을 눈치 챘다면, 아마 용호 자신과 마찬가지로 던전 접수에 돌입했을 터였다.

    스컬을 태운 나이트메어가 지친 기색을 애써 감추고 강한 척을 해서 그런지 살라미도 더는 끙끙 거리지 않았다.

    에일 가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던전인 유빙 가의 던전에 도착한 용호는 마찬가지 수순으로 빠르게 던전을 접수했다.

    에일 가의 던전과는 다르게 곤충형 괴물들 몇이 남아있었지만 마몬 가의 최정예 앞에서는 그저 장작더미에 불과할 뿐이었다.

    유빙 가의 던전의 심장으로부터 정수를 추출한 용호는 잠시 갈등했다.

    욕심이 났다.

    세 번째 던전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 더 무리를 한다면 더 많은 정수를 모을 수 있지 않을까.

    탐욕이 일었다. 용호에게 무어라 선택을 종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순수한 속내를 거울처럼 비쳐주었다.

    먹고 싶었다. 손에 넣고 싶었다.

    용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탐욕을 가다듬었다. 스스로의 욕망을 억제했다.

    더는 무리였다. 이미 며칠 간의 강행군으로 지칠 대로 지친 마몬 가의 사역마들이었다.

    아가레스의 죽음으로부터 벌써 사흘이 넘게 지났다. 가까운 다른 던전으로 이동하는 데는 못해도 이틀 이상이 걸릴 터이니, 세 번째 던전에 도착했을 때는 아가레스의 잔류 병력이 아닌 동부의 다른 가주들과 맞부딪힐 가능성이 높았다.

    용호는 머릿속으로 남부 공백지의 지도를 떠올려 보았다. 유빙 가의 던전이면 이미 남부를 벗어나 동부 지대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시트리도 절제하지 못하는 탐욕은 진정한 탐욕이 아니라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용호와 시선이 마주치기만 해도 끙끙 거리는 살라미에게 마지막으로 무리할 것을 부탁한 용호는 에일 가의 던전으로 돌아갔다. 이미 평정된 에일 가의 던전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자유도시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그리하여 에일 가에 도착하고 약 한 시간 여.

    그나마 남은 이런저런 세간을 던전 입구 방에 모은 용호는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을 보며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스컬 부대의 소속원 가운데 몇의 진화 숙련도가 가득 차 있었다. 자유도시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룬 그들인 터라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가장 용맹하게 싸운 스컬의 진화 숙련도가 가득 차기는커녕 반밖에 차지 않았다는 점이었지만, 마몬 가의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가장 진화의 권능의 혜택을 많이 본 스컬이었다.

    게임에서 고레벨이 될수록 레벨이 힘들어지는 것과 매한가지로 이제는 성장이 다소 더뎌질만도 하였다.

    ‘그래도 아쉽긴 하네.’

    스켈레톤 매직 나이트 이후의 승급 단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아마도 어느 쪽으로든 특화 진화를 한 번 정도 해줘야만 할 것 같았다.

    마력을 강화할 것인지, 아니면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육체 능력을 상승시킬 것인지.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고민이었다.

    용호는 연이어 스컬 부대의 탑승물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범한 말들에서 시작한 녀석들답게 진화 숙련치가 모두 가득 차 있었다. 이번 강행군으로 지구력의 소중함을 느낀 용호는 다섯 마리 모두를 체력 특화로 진화시켰다.

    그리고 대망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을 나이트메어.

    “이제부터는 부케팔로스라고 부르마.”

    스컬에게 이름을 지어주게 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역시 무리였다. 지금 이대로라면 스컬컬 혹은 스컬스컬이란 이름이 붙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명마였던 부케팔로스를 알 턱이 없는 나이트메어였지만 썩 마음에 드는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토했다.

    [이름 : 부케팔로스 (여)]

    [종족 : 나이트메어]

    [속성 : 어둠 1레벨]

    [개체 천성]

    [도도함]

    [개체 적성]

    [체력 / 민첩]

    [진화 숙련치 : 100/100]

    [체력 특화 1레벨 | ★★☆ (2.5)]

    [힘 특화 1레벨 | ★★ (2)]

    [체격 특화 1레벨 | ★★ (2)]

    [민첩 특화 0레벨 | ★★☆ (2.5)]

    [마력 특화 1레벨 | ★☆ (1.5)]

    [현재 승급 가능 종족/직위]

    [나이트메어 - 강습형] / [나이트메어 - 속도형] / [나이트메어 - 마력형]

    특화 진화 대신 승급 창 근처로 손을 가져간 용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스컬을 불렀다. 최대한 간결하고 단순하게 뜻을 전했다.

    어떤 걸로 진화시켜 줄까?

    스컬은 고민할 것도 없이 즉답했다. 그 대답 역시 스컬컬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다행히 용호는 스컬의 소망을 이해했다. 가주와 예속 사역마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용호는 부케팔로스를 강습형으로 진화시켰다. 살라미와 마찬가지로 덩치가 커진 부케팔로스였지만 그래도 암말이라 그런지 몸 곳곳에 유려한 곡선이 살아 있었다. 장갑차라기보다는 SF에나 나올 법한 고기동 전차라는 느낌이 들었다.

    승급을 마친 부케팔로스가 자신의 몸을 돌아보더니 이내 살라미를 돌아보았고, 씩 웃는가 싶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에 낮게 으르렁 거린 살라미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용호를 돌아보았다. 자기도 한 번 더 진화시켜 달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리였다. 덩치는 커졌지만 어째 더 귀여워진 것 같은 살라미의 콧잔등을 쓰다듬은 용호는 마지막으로 카타리나를 불렀다.

    용호의 호위 기사답게 투기장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전투에 참여한 카타리나였다. 이번 전투에서도 맹활약을 펼친 덕분인지 진화 숙련치가 가득 차 있었다.

    스컬보다도 훨씬 더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카타리나답게 조곤조곤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마력 특화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쉐도우 러너로 승급한 이후 검은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된 카타리나였다.

    조금 더 빨라지고 싶은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새로 얻은 힘을 보다 더 잘 다루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

    용호 역시 이번 아가레스 전에서 카타리나의 공격력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카타리나의 뜻에 동조했다.

    “좋아, 그럼 눈을 감고 마음을 편히 가져. 이미 몇 번이나 했으니까 잘할 수 있지?”

    “물론입니다.”

    용호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은 카타리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가만히 그런 카타리나를 바라보던 용호는 문득 살짝 늘어져 있는 기다린 귀에 관심을 두었다.

    저러다 날아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파닥거리는 카타리나의 귀.

    저도 모르게 손잡이 붙잡듯 붙잡았다. 깜짝 놀란 카타리나가 움찔했지만 그렇다고 눈을 뜨지는 않았다.

    ‘주, 중독될 것 같아.’

    손아귀 안에서 움찔거리는 귀의 감촉이 실로 기묘했다. 용호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외우며 눈을 감았다.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다 됐다.”

    손을 놓은 용호가 말했다. 다행히 카타리나는 몸 안에서 증폭된 마력에 정신이 팔려 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검은 마력을 일으켜 보는 와중에도 귀를 파닥거렸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용호는 카타리나가 마력의 점검을 마치자마자 얼른 다른 화제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던전의 심장에서 정수를 취하면 던전 그 자체가 죽어버리잖아?”

    “네, 가주님.”

    “그럼 결국 던전은 계속 줄어들기만 하는 거 아닐까? 던전도 자연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 건가?”

    용호의 물음에 카타리나는 기억을 더듬듯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답했다.

    “가주 님의 말씀처럼 자연 발생하는 경우가 가장 보편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아기 던전들은 대체로 무척이나 작고 연약한 법입니다. 가주의 적절한 보살핌이 없다면 금방 죽어버리기 일수죠.”

    아기 던전이란 말에 용호는 루시아를 떠올려 보았다. 카타리나가 계속 말했다.

    “그 외에…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던전 상회에서 던전 생성의 씨앗 같은 것을 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공 던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만들어졌을 때부터 꽤나 강한 힘을 보유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가격이 정말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습니다. 양산도 힘들다고 하고요.”

    제법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지금 같은 난세가 아니면 던전이 고사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으니 대충 던전의 죽음과 생성 사이의 사이클이 맞아 떨어질 것 같기도 하였다.

    무사히 잘 대답했다는 사실에 만족했는지 카타리나는 오랜만에 냉정한 여기사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식 웃은 용호는 다시 카타리나의 귀를 보았고, 연이어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물었다.

    “저기, 카타리나.”

    “네, 가주님.”

    “꼬리 만져 봐도 돼?”

    카타리나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다이나믹하게 변했다.

    &

    용호가 새로운 중독에 빠져들 위기에 처한 그 때, 오필리아는 차분한 얼굴로 사과를 깎고 있었다.

    자유도시의 유일한 의료시설이자 미치광이 오로스의 거처인 병원 안이었다.

    일인실 안은 조용했다. 오로스는 침대 위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오필리아 역시 묵묵히 사과 깎기에만 몰두했다.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는 소음이 아닌 침묵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오필리아가 다 깎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그 때 오로스가 눈을 떴다. 오필리아가 아닌 천장을 바라보며 잠긴 목소리를 토했다.

    “언제부터였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오필리아는 이해했다. 미치광이 오로스는 옛날부터 영리한 작자였다. 그렇기에 순순히 답해주었다.

    “마몬 가의 가주 님께서 처음 자유도시를 방문했을 때부터야. 우리 집이 본래 마몬 가의 사역마였다는 건 알지?”

    존칭을 감추지 않았다. 오로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바로 다시 마몬 가의 휘하에 들어갈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불찰이었군.”

    “아니야, 네 생각이 맞아. 처음에는 휘하에 들어갈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으니까. 정신제압을 걸었다가 오히려 압도당하지만 않았다면… 이야기가 꽤나 달라졌겠지.”

    오필리아가 키득 웃었다. 오로스는 눈동자를 굴려 그런 오필리아를 보았다.

    “다곤의 죽음이 네 계산 범위 안에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곤은 용맹하게 싸우다 죽은 것이니까. 하지만… 싸움이 끝나면 자유도시를 마몬 가에 바칠 생각을 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군.”

    “맞아, 그럴 생각으로 마몬 가에 도움을 청하자고 한 거야.”

    오필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너무나 시원한 태도였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아니, 나 역시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가레스가 자유도시를 침공하기로 결정한 순간 이미 모든 것이 정해졌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곧 가주 님이 돌아오실 거야. 그럼 자유도시는 이제 마몬 가의 영지가 되겠지.”

    “이미 준비를 다 갖춰둔 모양이군. 하기야… 애당초 이렇게 너와 내가 독대하고 있다는 사실 부터가 모든 것을 증명하겠지.”

    아무리 지난 십여 년간 우애 아닌 우애를 쌓았다 할지라도 선술집의 여주인과 생산자 길드의 장은 서로 적대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오필리아는 지금 무방비 상태가 된 오로스를 일 대 일로 마주하고 있었다. 생산자 길드를 이미 오필리아가 장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법자 무리는?”

    “그치들은 힘에 굴복하니까. 가주 님이 돌아오시면 금방 해결될 거라 생각해. 끝까지 반항하는 녀석이 몇 있겠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

    오필리아가 사과를 잘랐다. 조각 하나를 입에 넣으며 오로스를 보았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몬 가의 사역마로 들어와. 자유도시가 마몬 가의 영지가 된다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과연 그러할까. 오필리아의 제안은 늑대에게 사냥개가 되라는 것과 같았다.

    오로스가 쓰게 웃었다.

    “만약 거부한다면?”

    “그러지 마. 다곤에 이어 너까지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

    오필리아는 다정했고, 단호했다. 오로스는 다시 한 번 쓴웃음을 머금었다.

    “엠브리오가 오고 있다.”

    “그래, 맞아. 서부의 가주들이 연합해서 맞서고 있지만, 아마도 그가 이기겠지. 그와 싸워야만 할 거야.”

    “마몬 가의 가주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도발 섞인 물음에 오필리아는 단아하게 웃었다. 더 이상의 문답은 불필요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미치광이 오로스는 오필리아와 함께 용호를 맞이했다.

    마몬 가의 사역마가 되었다.

    < 제 30장 - 귀가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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