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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84화 (84/227)
  • < 제 28장 - 개전 >

    제 28장 - 개전

    마몬의 투기장은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투기장에 도전한 가주들은 많았고, 구시온은 그들의 도전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래, 보통 저층은 쉽게쉽게 돌파들 하긴 하는데…….”

    구시온은 말끝을 흐렸다. 턱을 괸 채 입 안에서 혀를 굴려보았다.

    사실 카이완처럼 1층부터 죽을 고생을 하며 돌파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었다.

    마몬 가가 완전히 몰락하는 데는 꽤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

    탐욕의 왕 시대가 워낙 강성했기에 싸잡아 '몰락'이라 표현할 뿐, 실질적으로 '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카이완의 전대 혹은 전전대 가주 시대 때나 되어서였다.

    객관적인 지표로만 평한다면 마몬 가의 역대 가주들은 제법 세력 있는 가문의 주인들이었던 셈이었다.

    마계에서 세력 있는 가문이란 곧 강력한 던전과 가주를 보유한 가문을 의미했다.

    때문에 쥐뿔도 없이 맨몸으로 도전한 카이완을 제한다면, 적어도 5층이나 7층쯤은 가야 제대로 된 좌절을 맛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 해도.’

    구시온의 시선 끝에는 경기장 한 가운데 홀로 선 용호가 자리했다. 눈을 감은 채 탐욕의 왕 마몬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용호는 단번에 2층의 플로어 마스터를 격파했다. 일전에 한 번 싸워본 적이라도 있는지 1층의 플로어 마스터인 강철 소와 싸웠을 때보다도 훨씬 더 깔끔하고 세련된 승리였다.

    ‘물론 아몬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사기긴 하지만…….’

    소위 말하는 ‘장비 덕’을 본 가주는 참으로 많았다. 그들에 비한다면 용호에 맞춰서 스스로를 퇴화시킨 아몬은 딱히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

    ‘감이 좋아. 담도 세고.’

    전투 감각이 좋았다. 불꽃과 냉기라는 서로 상반되는 마력을 보기 좋게 잘 이용했고, 쇄도하는 공격 앞에서도 결코 눈을 감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구시온은 결국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마몬 이래 처음으로 탐욕의 힘을 타고난 가주답게 용호는 구시온을 기껍게 해주었다.

    한편 구시온의 평판회가 펼쳐지는 가운데 용호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흡수한 마력을 받아들이며 구시온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했다.

    ‘운이 좋았어.’

    2층의 플로어 마스터는 불꽃의 진이었다.

    이미 뒤틀림에서 튀어나온 녀석과 한 번 싸워본 적이 있었기에 용호는 같은 요령으로 비교적 손쉽게 불꽃의 진을 격파할 수 있었다.

    물론 뒤틀림에서 튀어나온 녀석보다는 훨씬 더 강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용호 역시 그때보다 훨씬 더 마력이 강해진 상태였다.

    ‘공략집 대로는 안 되는 건가.’

    카이완은 무척이나 꼼꼼한 성격이었다. 그녀의 일지에는 1층부터 마주한 모든 플로어 마스터들의 정보와 공략방법들이 적혀 있었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언젠가 병마에서 회복할, 그리하여 투기장에 도전할 동생을 위한 공략집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공략집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당장 1층의 플로어 마스터가 달랐을 때부터 예상한 바이긴 했지만 2층의 플로어 마스터 역시 카이완의 공략집과 달랐다. 아무래도 비슷한 수준의 사역마들이 도전자에 따라 랜덤하게 배치되는 형태인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낙승이었다. 기분 좋게 마몬의 마력까지 흡수한 용호는 구시온 쪽을 돌아보았다. 재촉하는 시선을 보내자 기분 나쁘게 웃고 있던 구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번에 용호와의 거리를 좁혔다. 구시렁거리며 손가락을 놀리자 용호의 눈앞에 빛으로 된 상자 세 개가 형성되었다.

    “자, 골라 보…….”

    “이걸로 하겠다.”

    1층 때와 마찬가지로 구시온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상자를 고른 용호였다.

    구시온이 다시 구시렁거렸다.

    “어이, 가주. 상자가 여러 개인 이유가 뭐일 거 같수?”

    “몰라. 관심도 없고.”

    카이완의 일지에 따르면 상자 안의 보상은 절대 공평하지 않았다. 카이완도 운이 좋을 때는 연달아 좋은 장비를 얻었지만, 운이 나쁠 때는 소량의 금을 얻거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잡동사니를 얻곤 했었다.

    하지만 용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탐욕이 언제나 최고의 선택만을 해주었다.

    “뽑기의 묘미가 있거늘.”

    마음에 안 드는 구시온이 구시렁거리니 절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용호였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빛의 상자를 건드렸고, 이내 안에서 나온 물건을 거머쥐었다.

    “장갑?”

    “마장이다. 성장형이군. 그 정도면 2층에서 나온 것 치고는 진짜 대박인데 말이야. 단순 뽑기로 나온 거면 정말 짜릿했-”

    “방어구 같은 건가?”

    용호가 자연스럽게 구시온의 말을 잘라먹었다. 구시온은 인상을 구긴 채 설명했다.

    “손에 껴봐라. 방어구겸 무기인 녀석이니까. 마침 나도 비슷한 게 하나 있으니 시범을 보여주마.”

    구시온은 하얀 정장 외투를 벗더니 어느새 나타난 짐승 가면의 사내에게 넘겼다. 용호는 건틀렛이라고 하기도 뭐한 은색 장갑을 왼손에 껴보았다.

    “마력을 주입하면 마장이 반응한다. 마장마다 최종적인 형태는 다르지만… 대충 이런 느낌이지.”

    구시온이 돌연 마력을 방출했다. 이전처럼 용호를 억압하기 위한 방출이 아니었다. 잘 갈무리된 마력은 구시온의 두 주먹에 머물렀다.

    검붉은 금속들이 구시온의 양팔은 물론이고 어깨까지 뒤덮었다. 분명 금속으로 되어 있었지만 일반적인 갑옷과는 달랐다. 강철로 된 근육이란 느낌이었다. 거의 두 배 가까이 커진 양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하며 구시온이 말했다.

    “성장형 마장. 마몬의 사역마 가운데 하나인 ‘천형의 호루스’가 만든 물건이다. 마치 가주와 예속 사역마의 관계처럼 주인이 성장할 때마다 마장 역시 함께 성장하지.”

    어째서 무기인 동시에 방어구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용호 역시 왼손에 낀 장갑에 마력을 주입해 보았다.

    얇은 사슬을 엮어 만든 것 같은 장갑 위로 은색 금속판들이 덧대어졌다. 여전히 손목보다 약간 올라오는 길이에 불과했지만 손가락과 손등 모두 금속에 뒤덮여 있는 터라 훨씬 더 견고하고 전투적인 느낌을 주었다.

    ‘가벼워.’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피부의 연장이라도 된 마냥 감각 역시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진지한 눈으로 마장을 살펴보는 용호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구시온이 말했다.

    “이번에는 거의 소모 없이 2층을 돌파했군. 어떤가? 바로 3층에 도전할 건가? 3층의 벌칙은… 본인에게 있어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을 돌이켜 보는 거군. 이 정도면 거의 패널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이야.”

    용호는 잠시 가장 수치스런 기억을 마주하는 후손을 보며 즐거워하는 마몬을 떠올려 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벌칙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목숨이 위태로운 일은 아니었다. 구시온 말마따나 사실상 패널티가 없다고 해도 좋았다.

    용호는 관중석에 서 있는 카타리나를 돌아보았다. 청각이 좋은 엘프답게 이쪽 이야기를 이미 다 들었는지 눈빛과 표정으로 무어라 뜻을 전하고 있었다.

    ‘미안.’

    아무래도 욕심이 났다. 1층 돌파 때와는 상황도 달랐기에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잠시 쉴 수 있을까?”

    “얼마든지. 대기실이라도 하나 내줄까?”

    선선히 수락한 구시온이 물었다. 이왕 쉴 거 편히 쉬는 편이 나았기에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짓을 해 관중석에 자리한 카타리나를 이쪽으로 불렀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잠깐의 시간.

    용호는 관중석 한 가운데 자리한 일단의 무리를 보았고, 다시 구시온을 돌아보았다. 망설임을 드러내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물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말마따나 질문은 딱 하나만 받도록 하지.”

    마치 지금까지의 퉁명스러움에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한 구시온의 눈빛이었다. 이런 식으로 티격태격하다보니 처음 마주했을 때의 위압감이나 두려움은 어느새 다 사라져 있었다.

    용호는 다시 관중석 쪽을 보았다. 그런 용호를 보며 구시온은 카이완에 대한 것들을 떠올렸다.

    카이완은 몇 층까지 올라갔느냐.

    저 관중석에 자리한 자들은 마몬 가의 전대 가주들이 맞는가.

    대충 예상되는 질문들이 몇 가지 있었다.

    과연 용호는 그것들 가운데 무엇을 물을까.

    용호가 다시 돌아섰다. 성질 급한 구시온은 이미 몇 개나 되는 답변들을 준비한 채 용호를 마주했다.

    용호가 입술을 열었다. 구시온이 머릿속에 떠올린 답변들을 한 번에 지워버렸다.

    “구시온, 시트리라는 여자를 아나?”

    구시온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마치 으르렁 거리는 것과 같은 사나운 미소를 머금은 뒤에야 말을 이었다.

    용호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

    자유도시 뉘른베르크는 크게 세 개의 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선술집의 여주인 오필리아를 수장으로 하는 기녀들과 도박사들, 방랑자들의 무리.

    도망 사역마들과 용병들로 구성된 무법자 집단.

    해체업자나 대장장이 같은 자유도시의 각종 생산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생산자 길드.

    세 무리는 서로 경계하나 적대하지 않았고, 불필요한 싸움 대신 수장들 간의 협상으로 의견을 조율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유도시의 질서는 세 세력의 힘이 거의 균등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균형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동안 이어진 피로 피를 씻는 항쟁의 결과물이었다.

    세 세력의 수장들이 자유도시 성문 위에 모여 있었다.

    밀실이 아닌 공개된 장소에서 수장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근 십년만의 일이었다.

    생산직 길드의 수장인 미치광이 오로스는 오우거 손가락보다도 굵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인상을 찡그렸다. 푸른 피부를 가진 그는 군데군데 기운 자국이 잔뜩 난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는 의사인 동시에 약사였고, 자유도시 최고의 연금술사였다.

    물론 그렇다 하여 그가 트롤이란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 평생 메스로 베어낸 피부보다 허리에 찬 언월도로 베어낸 살덩이가 더 많을 터였다.

    오로스 옆에는 무법자들의 수장인 다곤이 서 있었다. 마법이 걸린 새카만 부분 갑주를 걸친 그는 오우거들 사이에서 극히 드물다는 오우거 메이지였다.

    마법사답게 평범한 오우거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지성의 소유자인 그였지만 태생 그 자체를 잊지 않은 것은 미치광이 오로스와 같았다. 다곤은 마법으로 적을 폭사시키는 것보다 손에 거머쥔 메이스로 직접 머리를 박살내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피냄새를 풀풀 풍길 것 같은 흉악한 두 사내 사이에는 가냘프고 아름다운 여인이 삐딱한 자세로 서있었다.

    선술집의 여주인인 오필리아였다.

    “기다리게 하는군.”

    성문 아래를 쏘아보던 다곤이 낮게 으르렁 거렸다. 오필리아는 머리 위에서 전해진 더운 김에 인상을 찡그리더니 불쾌감을 드러내듯 꼬리를 크게 한 번 휘두르며 말했다.

    “우리 부름에 응답한 건 그 하나뿐이야. 그리고 그가 우리를 기다리게 했다기보다는… 우리가 너무 서둘러 모인 것이겠지.”

    아가레스의 공격이 멀지 않았다.

    미치광이 오로스와 다곤 모두 싸움에는 이골이 난 자들이었지만 자유도시 외부에서의 공격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낯선 경험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더욱이 동부의 아가레스는 이미 몇 번이나 스스로의 강맹함과 흉포함을 드러낸 바가 있었다.

    오로스와 다곤은 긴장하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었고, 조급함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성문 위에 모인 것부터가 그러했다.

    오로스는 다곤처럼 초조함을 드러내는 대신 연신 담배를 태웠다.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몬 가의 가주는 미지수였다.

    오필리아의 정보에 따르면 그가 포라스와 융케라스를 죽인 것은 맞다.

    아마 둘 보다는 강한 것이 분명할 터였다.

    하지만 얼마나 더 강한지 알 수 없었다.

    포라스와 융케라스? 자신이나 다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물론 자유도시의 수장급 강자가 ‘셋’에서 ‘넷’이 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유의미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동부의 가주들을 문자 그대로 먹어치워 강해진 아가레스를 막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오로스는 다곤보다 생각이 많았다. 마몬 가의 가주는 강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그 강함이 정도 이상이면 곤란했다. 늑대를 쫓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꼴이 될 수는 없었다.

    세 번째 담배가 어느새 모두 타들어갔다. 오로스는 네 번째 담배를 꺼내 물었고, 다곤은 인상을 더욱 찡그렸다. 두 사람 사이에 서있던 오필리아는 팔짱을 끼고 꼬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초조함을 연기하다가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온다.”

    오필리아가 먼 곳을 가리켰다. 오로스와 다곤은 서둘러 오필리아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마수라 불러도 좋을 것 같은 거대한 말 여섯 마리가 자유도시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녹색 연기에 휩싸인 칠흑의 거마가 자리했다.

    “언데드?”

    오로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는 그 때에도 질주하는 말들과 자유도시 사이의 거리를 좁아지고 있었다.

    각각의 거마 위에 올라탄 것은 스켈레톤들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스켈레톤들과는 겉모습부터가 달랐다. 전원이 칠흑으로 된 갑주를 입고 있었고,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었다. 자유도시에도 몇 마리쯤 보이는 스켈레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특히 선두에 달리고 있는 유령마- 나이트메어는 보는 이의 시선을 문자 그대로 강탈했다.

    뒤에서 따르는 다섯 마리 말들 역시 마수에 가까운 존재들이었지만 나이트메어는 과연 저것을 말이라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칠흑의 털은 빛을 흡수했고, 전신에 두른 녹색의 연기는 근방 일대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런 나이트메어 위에 올라탄 자.

    뒤의 다섯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육중한 칠흑의 갑주 뒤로 검붉은 망토가 바람을 따라 흩날렸고, 오른손에 거머쥔 전투망치로부터 푸른 뇌전이 일었다.

    “스컬컬!”

    선두에 선 자가 돌연 외쳤다. 스켈레톤의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로 세상을 진감시키는 거대한 포효였다.

    스켈레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뇌전을 머금고 있던 전투 망치를 빙빙 돌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하늘을 내찔렀다. 응축된 뇌전이 하늘을 향했다. 천둥소리가 대기를 짓찢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옮겨졌다. 세 수장들뿐만 아니라 성벽 위에 나와 있던 이들 모두가 소리와 빛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뻗어나간 푸른 번개줄기보다 더 강렬한 것을 보았다.

    불꽃의 궤적이 하늘을 갈랐다. 색색으로 뒤덮인 마계의 하늘에서 그 존재를 분명히 했다.

    “파이어 드래곤?!”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크기가 작았다. 하지만 하늘을 가르는 불꽃은 파이어 드래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엎드려!”

    누군가가 외쳤다. 순식간에 성문 바로 위까지 접근한 붉은 궤적으로부터 초록빛 불꽃의 파도가 내뿜어졌다. 그것이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오로스와 다곤 역시도 뒤로 물러서며 급히 머리를 보호했다.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불꽃의 파도는 결코 성문 위의 존재들을 해하지 않았다. 꽃이 지듯 화려하게 산화한 그것 사이로 불꽃의 날개를 가진 살라멘더가 착지했다. 그 위에는 붉은 거창을 든 남자와 새하얀 머리칼의 다크 엘프 미녀가 앉아 있었다.

    “마몬 가의 가주, 천용호다.”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남자- 용호가 말했고, 눈앞의 광경에 순간이나마 압도당한 오로스와 다곤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오필리아는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용호를 보았고,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

    “일단은 성공적인 쇼맨 쉽…이었다고 해드릴게요.”

    선술집 최상층에 위치한 오필리아의 바.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바 안쪽에 자리한 오필리아는 약간은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카타리나, 스컬과 나란히 앉은 용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로 성공적이지 않았나?”

    매사에 첫 인상이 중요한 법이었다.

    오로스와 다곤이 용호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은 용호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 좋을 것은 없었다. 다소 과하다 할지라도 강한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리 쉽게 생각할 자가 아니다.

    오필리아는 용호의 의도를 알았다. 그렇기에 진지하게 답했다.

    “오로스와 다곤은 그렇게 단순한 자들이 아니에요. 당장은 놀랐겠지만, 곧 본질을 보려고 할 겁니다.”

    하늘에서 불 쇼 좀 한다고 아가레스가 물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적을 죽이는 것은 화려하게 꾸며진 예식용 칼이 아니라 투박할지언정 날카롭게 벼려진 진짜 칼이었다.

    물론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두 수장뿐만 아니라 각 세력에 속한 이들이 용호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용호와 오필리아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았고, 그렇기에 눈빛만 몇 번 교환할 뿐 그에 관한 이야기를 구태여 하지 않았다.

    용호는 자신 몫으로 오필리아가 내민 유리잔을 매만지며 물었다.

    “아무튼… 회담이 뒤로 미뤄진 건 그것 때문이야?”

    도착하자마자 수장들과 마라톤 회의를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간단한 통성명만 마친 오로스와 다곤은 나중에 다시 보자며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 버렸다.

    공식적으로 용호의 접대를 맡은 '선술집의 여주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확히 그것 때문은 아니고… 이쪽도 간을 좀 봐야 하니까요. 주지육림으로 신출내기 가주의 마음을 살짝 느슨하게 하는 것이 제 역할이랍니다.”

    “주지… 육림?”

    용호가 그리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지육림하면 연상되는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물론 카타리나와 오필리아가 미녀이기는 했지만 주지육림이 이런 건조하기 짝이 없는 술자리를 의미할 리는 없지 않은가.

    “어머나, 그럼 진짜로 마련해 드려요? 애들 부를까요?”

    오필리아가 속을 떠보듯 눈웃음을 치며 물었고, 용호는 김샌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뭐, 우리만 있으면 잘 되었네. 이참에 그간 미뤘던 일을 진행하자고.”

    용호의 말에 이번에는 오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간 미뤄둔 일이라니?

    스컬은 언제나처럼 껄껄껄 웃을 따름이었고, 카타리나는 묘하게 입술을 삐쭉이다가 뒤로 물러섰다.

    오필리아는 다시 눈을 깜박였고, 고개를 네 번쯤 갸웃했을 때 마침내 알아차렸다. 기쁜 얼굴로 단번에 바를 뛰어넘어 용호 앞에 섰다.

    “예속 사역마 등록을 시작하자.”

    용호가 말했다. 오필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예를 표했다.

    < 제 28장 - 개전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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