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83화 (83/227)
  • < 제 27장 #2 >

    &

    “엔델리온의 딸 오필리아가 위대한 마몬 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큰일입니다.”

    거의 바닥을 구르듯이 착지하자마자 마몬 가의 던전 안으로 달려 들어온 오필리아는 용호 앞에 급히 무릎을 꿇었다. 평소보다 두 배쯤 빠르게 인사말을 끝내자마자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진정하고, 일단 여기 물.”

    용호가 손수 물 잔을 내밀자 오필리아는 허둥거리다 겨우 물 잔을 받아들었다. 한결 차분해진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필리아 너니까.”

    신뢰감 가득한 용호의 말에 오필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아주 잠깐이지만 밝은 미소를 지었다. 품에서 꺼낸 마법석을 발동시키며 말했다.

    “일단 상황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손바닥만한 보라색 마법석에서부터 뿜어진 빛이 허공에 빛의 지도를 그렸다. 공백지의 지도였다.

    “서부의 가주들이 대규모로 연합해 반 엠브리오 연맹을 결성했습니다. 엠브리오도 이를 무시할 수 없는 터라 병력을 서부에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조만간에 상당히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번 전투로 엠브리오의 세력이 와해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도에는 몇 가지 정보들이 마계의 문자로 표시되었다.

    반 엠브리오 연맹에 참여한 가문의 수는 무려 열 한 개나 되었다. 저 정도 숫자면 서부의 가문들 거의 전부가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부와 서부의 싸움.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어디가 이겨도 좋았다. 쉬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인만큼 승자 역시 상처투성이가 될 터였다.

    ‘아니, 조금 다른가.’

    인계의 싸움이라면 그럴 터였다. 하지만 마계- 그 중에서도 던전을 가진 마왕들간의 싸움은 조금 달랐다.

    사역마들은 소모될 지언정 승리한 가주는 패배한 가주의 정수를 취해 더 강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전투의 양상이 중요했다. 가능하면 반 엠브리오 동맹이 승리하는 것이 용호에게 유리했다.

    북부와 서부의 격돌은 분명 공백지의 미래를 결정할 정도로 의미있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오필리아가 이렇게 서둘러 달려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과연 용호의 예상대로 오필리아는 빛의 지도를 조작했다. 북부와 서부 대신 공백지의 동부와 남부를 확대 시켰다.

    “북부와 서부가 시끄러운 가운데 동부의 가주들은 엠브리오를 치는 대신 저들끼리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남부를 노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지도가 확대되었다. 이제는 사실상 공백지 남부만을 가리킨다고 해도 좋았다.

    “가주 님의 활약으로 융케라스와 포라스가 동시에 사라진 터라 남부는 현재 힘의 공백 상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포라스 가와 이웃한 라우라 가는 예나 지금이나 숨을 죽이고 있고, 융케라스의 딸은 가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도시를 중심으로 한 세 개 가문 가운데 하나가 사라졌고 둘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아직 융케라스와 포라스를 쓰러트린 것이 용호라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니 힘의 공백 상태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였다. 일부 가주들에게는 지금의 남부가 차려놓은 밥상으로 보일 터였다.

    “남부를 노리는 동부의 가주는 아가레스. 이미 몇 개나 되는 가문들을 굴복시킨 강자입니다.”

    지도 동쪽에 위치한 던전 세 개에 동시에 빛이 일었다. 셋 모두 아가레스의 지배하에 있는 던전인 것 같았다.

    “그가 마몬 가를 노리고 있다는 건가?”

    용호의 물음에 오필리아는 입술을 한 차례 깨물었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답했다.

    “최종적으로는 그럴 터이지만… 현재 그가 노리고 있는 것은 자유도시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기에 용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오필리아가 설명했다.

    “거대한 던전을 가진 강대한 가주들은 보통 던전 주위의 땅을 자신의 영지로 삼습니다. 자유도시는 마왕과 던전이 없는 영지라고도 할 수 있죠.”

    “충분히 먹음직스런 먹이란 말이군.”

    “예, 자유도시에 기거하는 사역마들의 숫자도 적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자유도시는 주변의 던전들을 공격하기 위한 거점 역할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할 것 같았다.

    남부의 여러 던전들과 두루 가까운 자유도시는 공격을 위한 최고의 거점이었다.

    “자유도시의 지배자들의 반응은 어떻지?”

    “가주 님도 아시다시피 자유도시는 세 개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선술집과 무법자들의 집단, 해체업자를 비롯한 생산직들의 길드로 말이죠. 무법자들과 생산직들의 수장들은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 마몬 가의 사역마인 만큼 가주 님의 뜻을 따를 생각이지만… 현재는 다른 두 수장들에게 항전에 동조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오필리아가 급히 찾아온 이유를 대강 알 것 같았다.

    용호가 침묵하자 이제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엘리고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두 수장들이 결사항전을 표명한 것은 꽤 의외군요.”

    용호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엘리고스는 오필리아에게 한 번 시선을 준 뒤 용호에게 말했다.

    “물론 수장 자리를 지키고픈 것이 당연하기는 하지만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요. 오필리아를 모욕할 생각은 없지만, 보통 자유도시의 수장들은 명예보다는 목숨을 중시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가주나 던전의 사역마들처럼 장소에 속박된 자들도 아니었다. 상대하기 버거운 적이라면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당사자 가운데 하나인 오필리아가 동조했다.

    “엘리고스 오라버니 말이 맞습니다. 아마 평소대로였다면 다른 두 수장들도 항전보다는 항복을 생각했을 겁니다. 아가레스는 그만큼이나 두려운 상대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오필리아는 거기서 말을 한 번 끊었다. 침을 한 번 삼킨 뒤에야 말을 이었다.

    “아가레스는 식인귀입니다. 마인이라기보다는 마수에 가까운 존재죠. 그에게 항복한다면 수장들은 정수를 흡수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잡아먹힐 것이 분명합니다. 휘하의 부하들 역시 비슷한 운명에 처할 가능성이 높고요. 지금까지 아가레스에게 당한 가주들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항복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었다.

    용호가 다시 물었다.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것은?”

    “그들 역시 하나의 무리를 이끄는 수장들입니다. 더욱이 자유도시에 터를 잡은 세월도 적지 않으니…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무작정 도망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마몬 가의 사역마인 동시에 선술집의 주인인 오필리아였다.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수장들과 똑같은 심정이었다.

    “아가레스는 작은 엠브리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부 가주들에게는 공통의 적이라 할 수 있죠. 때문에 다른 두 수장들은 주변의 가주들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입니다.”

    서부의 가주들이 대 엠브리오 동맹을 만든 것처럼 대 아가레스 동맹을 만들겠다는 이야기였다.

    용호는 다시 빛의 지도를 보았다.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자유도시의 지배자들이 막상 구원을 청할 이는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필리아 역시 용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오필리아가 마몬 가의 사역마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결국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을 터였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융케라스의 딸은 처음 기대와 달리 가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우라 가는 침묵으로 일관할 가능성이 높고요. 무엇보다… 과연 라우라 가의 가주가 아가레스와 맞서 싸울 무력이 있는지조차 의문입니다.”

    전통의 강자였던 포라스와 융케라스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다.

    “다른 두 수장들은 ‘불꽃의 마왕’인 가주 님께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주 님과 일면식이 있는 제가 수장들을 대표해서 마몬 가를 찾은 것이고요.”

    오필리아의 말마따나 아가레스는 언젠가는 맞서 싸워야 할 적이었다.

    자유도시의 세력들을 아군으로 삼을 수 있다면 오히려 기회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가레스가 노리는 것은 마몬 가가 아니라 자유도시였다. 이번 전투의 무대는 갖가지 함정을 준비해둘 수 있는 던전이 아니었다. 보다 전통적인 수성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싸움.

    다수 대 다수가 격돌하는 대규모 전투.

    “오필리아, 아가레스가 자유도시를 공격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있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빠르면 열흘 내, 늦어도 보름 정도면 아가레스의 공격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병력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시간을 고려해서 말한 시간이었다. 용호는 다른 것을 물었다.

    “다른 두 세력의 힘은? 선술집과 동등한가?”

    “엇비슷한 수준입니다. 무법자들은 숫자가 많다는 강점이 있고, 생산직들은 기본적인 전투력은 가장 약하지만 기간테스을 비롯한 몇 가지 전쟁도구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기간테스?”

    “마력으로 구동하는 전쟁병기입니다. 어… 거대한 리빙 아머나 골렘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설명을 듣는 용호의 눈이 비정상적으로 초롱초롱했기에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헛기침으로 망상을 몰아낸 용호는 속으로 수를 헤아렸다. 뜻을 결정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었다.

    “오필리아, 네 의견은?”

    오필리아는 자세를 바로 했다. 진지한 눈으로 용호를 마주했다.

    “아가레스는 언제고 마주해야만 하는 적입니다. 선술집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몬 가의 사역마로서 말씀 드리건데, 자유도시를 이용해 아가레스와 맞서 싸우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아가레스를 꺾는데 그치지 않고 자유도시까지 손에 넣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른 두 수장들이 들었다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만한 이야기였다. 오필리아는 아가레스와의 싸움 뒤를 생각했다.

    물론 다른 두 수장들 역시도 비슷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오필리아는 선술집의 여주인이기 이전에 용호에게 충성하는 마몬 가의 사역마였다.

    용호는 계속해서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리쿰부터 시작해 하나씩 의견을 밝혔다.

    “자유도시의 세력을 이용할 기회입니다. 오필리아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가주님께서 던전 밖에서 싸우셔야 한다는 사실이 불안하긴 하오나… 저 역시 동의합니다.”

    리쿰과 엘리고스가 뜻을 같이했다. 카타리나는 의견을 밝히는 대신 용호에게 예를 표하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숨을 걸고 가주 님을 지키겠습니다.”

    용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뜻을 따르겠다는 결의였다. 마지막으로 용호의 시선을 마주한 스컬은 전투 망치를 가슴에 올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컬스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 의미는 명확히 전달되었다.

    “좋아, 자유도시의 수장들을 만나보겠다. 오필리아가 자리를 준비하도록.”

    용호의 명령이 떨어졌다. 자리에 모여 있던 사역마들은 다시 한 번 예를 표했다. 소리 높여 답했다.

    “가주 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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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틀 뒤에 자유도시를 향해 출발하겠다는 용호의 확답을 들은 오필리아는 잠시 쉴 새도 없이 바로 마몬 가를 떠났다.

    다른 두 수장들을 협상 테이블로 이끄는 한 편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오필리아를 떠나보낸 용호는 바로 휴식에 돌입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이상 용호 역시 서둘러야만 했다. 시트리를 만나는 것은 모든 일이 끝난 뒤라도 늦지 않았다.

    오필리아가 예상한 아가레스의 공격 예상일은 지금으로부터 약 열흘 뒤.

    자유도시에 방문해서 수장들과 협상을 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데 소요될 시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빠듯한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호는 바로 오필리아와 함께 자유도시로 향하는 대신 이틀이란 시간을 두었다.

    마몬 가 역시 전투 준비를 갖추기 위한 시간이 필요해서 만이 아니었다.

    오필리아의 방문으로부터 하루가 지난 아침.

    용호는 카타리나만을 대동하고 던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카이완의 휴게실로 향했다. 마몬의 투기장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개방했다.

    주어진 시간은 하루.

    아가레스라는 강적을 마주하기 전에, 자유도시의 수장들을 마주하기 전에 최대한 힘을 끌어올린다.

    짐승 가면의 사내가 용호를 인도했다. 다시 한 번 도착한 투기장에서는 하얀 정장을 갖춰 입은 구시온이 용호를 맞이하였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카이완은 다음 층에 도전하는 데 일주일이란 시간이 필요했는데 말이야.”

    여전히 신경을 살살 거스르는 구시온이었다.

    구시온은 분명 용호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이전과 달리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굳이 카이완을 언급해 용호를 자극한 것도 자기 딴에는 용호의 전투력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려 보겠다고 한 짓임에 분명했다. 그나마 카이완을 대동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젠가는.’

    카이완을 구하고 구시온을 수하로 삼으리라.

    용호가 구시온을 노려보았다. 투기장에 방문한 목적을 밝혔다.

    “투기장 2층에 도전하겠다.”

    “얼마든지.”

    구시온이 기껍게 웃으며 경기장을 가리켰다. 2층의 플로어 마스터가 용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 27장 - 자유도시 출진 끝, 제 28장 - 개전으로 이어집니다.

    < 제 27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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