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72화 (72/227)
  • < 제 23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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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합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온통 하얀 공간에 홀로 시선을 빼앗는 존재가 있었다.

    붉은 머리칼의 시트리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하얗고 고풍스런 의자에 앉은 채로 용호에게 인사한 그녀는 가볍게 손짓으로 앉을 것을 권했다. 어느새 용호의 등 뒤에는 의자 하나가 솟아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기에 용호는 당황하지 않고 시트리와 마주 앉았다. 이번에도 기습처럼 시트리가 입술을 벌렸다.

    “강해지셨군요.”

    뿔의 개수처럼 눈에 보이는 변화를 포착한 것이 아니었다.

    용호는 구체적으로 답하는 대신 그저 웃어 보였고, 그런 용호의 대응에 시트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용호는 강해졌다.

    포라스와의 싸움 이후 뒤틀림의 마력뿐만 아니라 랜드 웜과 융케라스의 정수를 취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힘의 변화가 워낙에 커 다른 사람이라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시트리와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격한 성장이 시트리의 얼굴에 자꾸만 미소를 퍼트렸다.

    시트리는 앉은 자세를 고쳤다. 우아하게 꼬고 있던 다리를 바꾸었고, 무척이나 긴 치마를 입고 있음에도 용호는 반사적으로 그런 시트리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시트리가 키득거렸다.

    “아무래도 선술집에 다녀오신 것 같은데… 오필리아는 잘 만나 보셨나요?”

    구체적인 지명은 여러 가지 것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용호는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렸다. 자연스럽게 턱을 괴고 시트리를 바라보았다.

    “알고 계셨군요.”

    굳이 말해보았고, 시트리는 부정하는 대신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이었어요.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는… 저도 그저 상상할 뿐이죠.”

    시트리는 선술집의 여주인이 과거 마몬 가의 사역마였던 오필리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용호는 시트리가 자신 외에 다른 곳에서도 정보 얻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던 일을 기억했다.

    ‘만남 자체를 유도했다고도 볼 수 있을까?’

    용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트리가 자신을 조종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선술집에 방문할 마음을 품은 것도, 그 시기를 고른 것도 용호 자신이었다.

    시트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용호는 그런 시트리의 평온에 파문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불필요한 일이었다. 괴었던 턱을 떼며 말했다.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무척이나 유능한 친구더군요.”

    “그녀의 아버지인 엔델리온은 카이완의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능한 자였으니까요. 레드 데몬 자체가 꽤 준수한 전투 종족이기도 하고요.”

    지나가듯 흘린 말이었지만 용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단어가 있었다.

    시트리는 밀고 당기는 대신 순순히 정보를 내려놓았다.

    “레드 데몬은 마계 내에서도 꽤나 유명한 전투 종족이랍니다. 드래곤이나 수라, 아크 데몬처럼 타고난 강자는 아니지만 무척이나 성장성이 좋은 종족이죠. 극한까지 강해진 레드 데몬은 정말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답니다. 단순 육탄전만으로 마계 최강의 환수종인 드래곤- 그것도 완전히 성장한 에인션트 드래곤을 제압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성장을 거듭했을 때 이야기죠.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레드 데몬은 오우거는커녕 오크보다도 못하답니다.”

    마지막 말에서 엘리고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레드 데몬들은 육탄전에 강하답니다. 마력을 키워도 마법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죠. 그냥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해서 적을 치는 쪽을 선호한다고 할까요? 그쪽이 효율이 좋기도 하고요. 오필리아처럼 정신 계열 마법을 약간이나마 익힌 레드 데몬은 정말로 드물답니다. 아마 무척이나 노력해서 익힌 마법일 거예요.”

    친절한 설명이었고, 용호는 자연스럽게 동의했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 모두 마력 보다는 육체 관련 능력에 잠재력이 높았기 때문이다.

    ‘에인션트 드래곤조차 육탄전으로 제압하는 존재…….’

    마계의 마족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드래곤’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머릿속에 연상되는 강함이란 것이 있었다.

    절로 호기심이 생겼다. 시트리는 이번에도 빼지 않고 바로 말해주었다.

    “극한까지 강해진 레드 데몬의 예로는… 제가 속한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인 ‘최강의 괴력’ 오로바스가 있겠네요. 마계의 ‘데몬프린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그는 정말로 엄청난 육체 능력의 소유자랍니다. 아마 ‘힘’만이라면 던전 상회뿐만 아니라 마계 전체에서도 그를 이길 존재가 없을 거예요.”

    흥미를 동하는 단어들이 그야말로 쏟아져 내렸다.

    다섯 이사, 최강의 괴력, 데몬 프린스.

    천외천이란 말이 떠올랐다. 현재 눈앞에 두고 있는 ‘강함’을 초월하는 새로운 강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한 느낌이었다.

    거기까지 강해질 수 있었다. 그 이상 나아갈 수도 있었다.

    “마왕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시트리가 돌연 말했다.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이 눈꺼풀을 따라 부드럽게 내려갔다.

    “마왕 또한 성장을 하죠. 가장 약한 마왕은 오크는커녕 고블린과 비등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가장 강한 마왕은… 그야말로 손짓 한 번에 천지를 불태우고 바다를 증발시키죠. 에이션트 드래곤 한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를 홀로 격퇴하고요. 수만 대군이 몰려와도 걱정할 것이 없죠. 그저 바라보는 순간 모조리 바닥에 머리를 조아릴 테니까요.”

    낯익은 단어들이 용호의 귀를 자극했다. 용호는 시트리가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마왕의 권능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답니다. 하지만 성장 역시 가능해요. 벽을 깨면 새로운 벽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 벽 역시 돌파하면 그만이죠. 나아가는 한, 나아갈 의지가 있는 한 그 성장에 끝은 존재하지 않아요.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발을 멈춘다면, 그 의지를 잃는다면… 스스로 만든 한계 안에 갇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겠죠.”

    포라스는 냉기의 마왕이었다.

    과연 그의 권능은 그저 한기를 일으키는 것에 그쳤을까? 거기서 더 진보할 수 없는 능력이었을까?

    융케라스의 이명은 지배의 마왕이었다.

    그는 정신제압으로 상대방을 마비시키거나 특정 움직임을 강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우 그것에 불과하다면 ‘지배’라는 이명이 아까웠다. 분명 더 나아갈 수 있었다. 보다 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라스도, 융케라스도 더는 성장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체하고 말았다.

    진화의 권능에도 분명 한계가 존재할 터였다.

    사역마로 받아들인 존재만을 진화시킬 수 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한계 가운데 하나였다.

    어쩌면 진화시킬 수 있는 사역마의 숫자에도 제한이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한계에 불과했다.

    용호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변함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트리를 마주했다.

    분명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고객과 이를 응대하는 상인과는 달랐다.

    시트리는 용호 자신의 성장을 바랐다. 아예 손을 이끌어주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마주할 때마다 지나가듯이 던지는 충고와 조언은 용호 자신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째서 그러한 것일까.

    단순히 마몬 가의 후견인이 아니라 어쩌면 조금 더 긴밀한 관계이지 않을까?

    마치 오필리아처럼. 시트리는 과거 마몬과 함께 마계를 호령했던 열두 사역마- 즉 ‘마몬의 사역마’였던 것이 아닐-

    “아니에요. 아니랍니다. 저는 늘 말씀드렸듯이 그저 던전 상회의 거물일뿐이랍니다. 그러니까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해주세요.”

    용호의 속내를 간파하듯 단호하게 말한 시트리는 미소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용호는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납득했다.

    애당초 시트리를 완전히 믿지 않겠다고 말한 용호 자신이었다.

    시트리가 마몬의 사역마인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는 그녀에게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좋지 못했다. 지금의 관계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지고 오신 물건들이 많으신 것 같네요. 이번에는 어떤 것들을 구매하실지 제가 다 두근거리는 걸요?”

    시트리가 모처럼 상인답게 말했고, 용호는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한 이유를 상기했다.

    시트리와의 만남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구매하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오늘은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죠.”

    자리에서 일어난 시트리는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책장이 있기라도 한 것마냥 커다란 책을 연달아 뽑아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애당초 이곳은 가상공간이었고, 시트리는 강력한 마족이었다.

    “원하시는 건 역시 사역마일까요? 아니면 무구들? 그것도 아니면 다른 물건들?”

    시트리의 손을 떠난 카탈로그들이 용호의 앞에 나란히 놓였다. 용호는 카탈로그들 대신 시트리를 보며 대답했다.

    “세 가지 모두요.”

    “오늘 제 실적을 잔뜩 쌓아주실 건가 보네요. 역시 전담도 아닌데 공을 들이길 잘했어요.”

    “아직도 전담 아니라고 우기시는 건가요?”

    “정말 아니니까요.”

    용호도 이제는 그냥 웃고 말았다. 카탈로그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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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획 없는 시장 방문은 충동구매를 낳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용호는 가상공간에 접속하기 전에 쇼핑 계획을 세워두었다.

    일단 구매할 사역마는 아이언 골렘 세 기와 스켈레톤 일꾼들.

    아이언 골렘은 전투용인 동시에 작업용이었고, 스켈레톤 일꾼들은 역설적으로 작업용이 아닌 전투용이었다.

    용호는 스컬을 대장으로 하는 스켈레톤 정예 부대를 구상했다.

    마력만 공급되면 지치지도 않고 단순 반복 작업을 할 수 있는 언데드의 특성과 끈기만 있다면 느리게나마 진화 숙련치를 쌓을 수 있는 사역마 훈련장의 시너지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할 터였다.

    ‘데스나이트까지 키우기로 했으니까.’

    아예 기사단을 만든다.

    데스 나이트와 리치 등으로 구성된 최정예 언데드 부대.

    물론 완성되는 것은 참으로 머나먼 미래일 터였지만, 어찌되었든 투자해볼만한 일임에는 분명했다.

    ‘일단 스컬까지 포함해서 여섯 명으로 시작. 부대 이름은 스컬 분대 정도면 되겠지? 나머지 스켈레톤들은 스컬 2나 스컬 3 같은 콜 싸인 같은 걸로 부르고.’

    아이언 골렘 세 기와 스켈레톤 일꾼 다섯 마리.

    일단 구매하기로 한 사역마는 저 여덟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앞으로 신설할 던전 시설들을 위해 필요한 재료들과 각종 생필품, 기초 작업장에서 제조에 쓸 재료들이었다.

    용호는 시트리의 조언을 들어가며 처음 세워온 구매 계획을 모두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엄청나게 강력한 충동구매 욕구를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4성 사역마 카탈로그]

    시트리가 웃으며 표지를 보여주었고, 용호는 참으로 오랜만에 시트리가 상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경만 하세요.”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에요?”

    “에이, 다 알면서.”

    구경만 할 수 있을까?

    용호는 남은 예산을 헤아리며 손을 뻗었다. 악마의 유혹에 걸려들듯 카탈로그의 첫 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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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합니다, 고객님.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나긋나긋한 허리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엘프 정령사는 카타리나의 얼굴과 관능적인 허리를 떠올리는 것으로 견뎌냈다.

    얼굴만 봐도 강해보이는 트롤 전사 역시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를 떠올리는 것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스켈레톤 나이트는 오히려 스컬의 진화 후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느낌이라 구매욕구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용호의 굳은 의지를 시험에 들게 하는 사역마가 존재했다.

    ‘머, 멋있어.’

    나이트메어.

    유령마 팬텀스티드의 상위급 존재라 할 수 있을 말 형태의 사역마.

    그야말로 크고 아름다웠다. 기본적인 형태는 말이었지만 그 체구와 인상은 그야말로 강렬했다. ‘마수’라는 단어가 이토록 어울리는 말은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티 하나 없이 새카만 육신과 반대로 새하얀 갈기, 초록색 귀화가 피어오르는 눈.

    ‘내겐 살라미가 있는데!’

    멋진 화룡으로 진화할 살라미가 있다. 그러니까 참을 수 있다.

    아니었다. 불가능했다.

    스켈레톤 나이트로 진화한 스컬이 타고 다니면 어떨까. 아니면 그림자를 부리는 카타리나가 타면 또 어떨까.

    전투는 던전 내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이동 수단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 아낀다.’

    어찌어찌 이유를 만들어낸 용호는 나이트메어의 구매의사를 밝혔고, 시트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것 같은 화사한 미소로 보답했다.

    이제는 정말 용무가 모두 끝났다.

    충동구매 이후 반드시 찾아오고 마는 현자 타임에 용호가 시달릴 때, 시트리는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처럼 계속 강해지신다면… 큰물을 한 번쯤 경험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큰물?”

    저도 모르게 되묻자 시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골 사이에서 전단지 한 장을 꺼내 용호에게 내밀었다.

    [던전 상회 경매장]

    용호가 고개를 들었다. 시트리는 부드럽게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난세는 더욱 격화될 거예요. 그 난세 속에서 살아남으신다면, 더욱 강해지신다면… 다음에 제가 모시도록 하죠.”

    시트리는 용호 앞에서 고풍스런 예를 표했다. 언제나와 같은 미소로 마무리를 지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다음에 뵐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온통 하얀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용호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던전 상회 경매장…….’

    시트리는 어째서 그곳을 큰물이라 묘사했을까.

    생각이 끊어졌다. 용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카타리나와 엘리고스의 얼굴이었다.

    < 제 23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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